그럼에도 불구하고, U2는 '저항의 판매상'일 뿐이다
얼마 전 처음으로 내한 공연을 가진 록 밴드 U2. 이번 내한 공연에서, 그들은 여성에게 가해진 지난한 폭력의 역사, 그리고 이에 맞서 투쟁한 인물들을 무대의 비주얼 아트로 보여주며, "모두가 평등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
모두가 알다시피, U2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룡 록 밴드다. 이들은 그래미 어워드의 4대 본상 중 하나인 ‘그래미 올해의 앨범 상(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2회 수상을 포함하여, 역대 그래미에서 22개의 트로피를 휩쓸었다. 빌보드 200의 정상에 오름과 동시에 빌보드 Hot 100의 1위 싱글 두 개를 배출하며 3000만장 가까이 판매된 LP <The Joshua Tree>(1987)를 비롯, 그들의 정규 앨범은 세계적으로 1억 5000만장이 넘게 판매되었다. 또한 그들은 롤링 스톤스나 메탈리카 등을 능가하며, 매 투어마다 세계 최고의 공연 수익을 달성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U2는 그들의 전성기 직전이던 80년대 초부터, 이미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인’ 밴드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물론 펑크 무브먼트에서 훨씬 더 급진적인 현장예술을 실천했던 뮤지션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가령 1985년 U2가 에티오피아 난민을 위한 자선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을 위해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 올랐을 때, 당시 사회를 보았던 배우 잭 니콜슨은 U2를 이렇게 소개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온 밴드입니다. 이들의 영혼은 온 세계와 함께 하고, 이들은 그들이 느끼는 것을 발화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죠. U2입니다!”
잭 니콜슨의 소개가 끝나자 마자, 무대에 오른 U2는 그들의 기념비적인 저항가 “Sunday Bloody Sunday”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1972년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군경이 시위대를 학살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제로 한 이 곡은, 아일랜드의 분단 상황과 민족 모순을 고발하며 “우리는 언제까지 노래만 불러야 하는가? 바로 오늘 밤, 우리는 하나될 수 있다”는 강렬한 프로파간다를 후렴구로 삼고 있다. 다음 곡 “Bad”는, 빈곤이 만연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마약 남용으로 사망한 보컬 보노의 친구를 기리며, “깨어 있음”, 즉 의식화와 대자화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시적 발라드다. 원래 이 날 U2는 마지막 곡으로 마틴 루터 킹을 기리는 히트곡 “Pride (in the Name of Love)”를 공연하려 했으나, 이는 관객석에 소요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72,000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인파에 밀려 앞 줄의 관객들이 깔려 죽으려 하자, 보컬 보노는 공연 도중에 관객석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구해내고, 두 팔로 꼭 안아주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전 세계 19억 대중들에게 위성방송으로 방영되며, 잭 니콜슨의 소개와 같이 ‘사회문제에 관해 거침없이 노래하며’, ‘관중-민중과 호흡하는 젊은 록스타’ U2는 한 순간에 시대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타임지에서 U2의 보컬 보노의 사진을 커버에 실으며(2002년 3월 4일호), “보노는 세계를 구할 것인가?”라는 문구를 헤드라인으로 올렸던 것은, 로큰롤 시대의 저항적 시대정신으로서 U2가 가진 상징적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U2와 그들의 메시지가 저항음악(프로테스트 송 – protest song)과 저항예술의 대중적 상징으로 여겨지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기실 U2는 어떤 반체제적 이미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이를 대중이 보기 좋게 – 소비하기 좋게 내놓아 떼돈을 버는, 그리고 종국에는 반체제적 구호 속에 교묘히 섞인 체제순응적 프로파간다를 설파하는 ‘저항의 판매상’에 가깝다. U2 음악의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 토대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쉽게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U2 프로파간다가 가진 ‘자유주의(리버럴)·개혁주의’적 측면
2. U2 프로파간다가 가진 ‘반동적 민족주의’의 측면
3. U2 프로파간다가 가진 종교적(기독교적) 측면
우선 U2 음악이 내포하는 자유주의·개혁주의적 메시지들을 들여다보자. U2가 자신들의 음악에서 본격적으로 정치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소년병의 사진 위에 빨간 글씨로 앨범명을 적은, 언뜻 보면 ‘혁명적’인 디자인의 3집 앨범 <War>(1983)부터다. <War>를 포함한 U2의 초기 음악은 ‘포스트 펑크’라는 장르 카테고리로 거칠게 분류될 수 있는데, 포스트 펑크는 단순한 형식의 음악 위에 급진적(공산주의적·아나키즘적) 구호를 배치했던 70년대 중-후반부 펑크 운동을 토대로 이것의 형식적 다변화를 꾀한 음악이다. 그런데 U2의 기타리스트인 디 에지는, 이러한 음악적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는 더 클래시(70년대 중후반 영국의 펑크 운동을 주도했으며, 이후 포스트 펑크 물결에서 레게나 디스코 같은 형식들을 수용한 실험적인 음악을 하면서도 정치적 급진성을 잃지 않았던 밴드)와 같은 분노를 원했다. 그러나 좀 더 ‘정제된’ 분노를 원했다.”
U2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지 분노를 과격하고 단순하게 표출하는 펑크의 형식을 ‘정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음악이 함의하는 메시지와 담론마저 ‘정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가령 <War>의 수록곡 중 가장 선동적인 민중가요로 꼽히는 히트 싱글 “New Year’s Day”는 1980년대 폴란드의 반공주의 노동조합운동으로 동구권의 반혁명에 앞장섰던 연대자유노조의 수장 레흐 바웬사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다. 이 곡은 “새로운 해방의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순진한 메시지를 강렬한 프로파간다로 녹여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 서구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폴란드 인민들의 삶은 나아지기는 커녕 고단하기만 하다. 폴란드는 서유럽 선진국들에 저임금 노동력을 공급하는, 주변부의 피착취 국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과연 폴란드 민중은, 바웬사와 U2가 약속한 ‘새 날’을 언제가 되어서야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실험사회주의(혹은, 현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반동적 입장만으로, 이들을 우파적 기획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앨범 <War>와 U2의 다른 곡들도 살펴보자. 앨범 <War> 수록곡들의 가사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구호는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인데, 문제는 U2가 포착하는 ‘하나 된 민중’의 전제다. U2는 자신의 음악들 속에서, 계급 투쟁의 과정이 야기하는 여러 유혈 사태들을 근거로 계급 투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오고 있다.
“저는 미국에 와서, 조국을 떠나온 지 2-30여년이 지난 여러 아일랜드계 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조국에 대해, 저항에 대해, 고향에서의 혁명에 대해, 혁명에서의 영광에 대해, 혁명에서의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해… 그런 혁명 좆이나 까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영광은 혁명에서의 살육에 대한 겁니다. 여기에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자기네 집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자기네 가족과 아이들로부터 떼어내는 혁명에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조국을 위해 명예롭게 헌신하여 훈장을 받은 이들의 행진에 폭탄을 던지는 혁명에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중략) 우리 조국의 국민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습니다.” – 보노, 미국 투어 다큐멘터리 영화 <래틀 앤드 험Rattle and Hum>(1988)에서 “Sunday Bloody Sunday”를 공연하던 도중의 연설
"가죽과 끈과 사슬에 묶인 채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겠지
다시 한 번 일어난 혁명이여!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테야, 입 밖으로 혁명을 내뱉지 않을테야
나는 저 들끓는 구호들을 꿰뚫어볼 수 있고, 당신은 내가 혁명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그리고 우리는 제복과 휘장을 사랑한다네
우리는 나부끼는 깃발도 사랑한다네
하지만 나는 동지들을 지옥에 살게 두지 않겠어
우리가 서로와 투쟁하는 지옥
우리가 스스로와 투쟁하는 지옥 말이야…"
"성난 말들은 싸움을 멈출 수 없고
두 개의 틀린 답은 옳음으로 전화할 수 없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심장
신이시여, 피를 흘리게 하소서!..." – <War>의 수록곡, “Like a Song…”의 가사 중 일부 발췌
이들은 IRA를 필두로 펼쳐지는 아일랜드(특히, 북아일랜드)의 반체제 투쟁 속에서, 피가 낭자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좌파 운동에 대한 어떤 환멸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정작 이러한 르상티망적 감정은 아일랜드의 민중이 목도한 진짜 현실에 대하여는 눈을 감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왜 아일랜드의 민중은 피를 흘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일랜드의 반제 투쟁 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탓인가, 아니면 아일랜드의 민중을 억압하는 다른 누군가의 탓인가? 저항을 그만두면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는 건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민중의 역사를 간략히 들여다보자. 아일랜드는 원래 영국 땅에 살던 켈트인들이, 지금의 독일 땅에서 이주해 온 앵글로-색슨인들의 침략을 피해 도착한 땅이다. 하지만 이후 잉글랜드에 단일 왕국이 들어서고 정치 체제가 안정된 뒤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어 장장 400년에 가까운 지배를 받았다. 문제는 아일랜드를 정복한 잉글랜드의 왕이 헨리 8세였다는 것인데, 헨리 8세는 종교 개혁 시기에 자기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가톨릭을 박차고 나와(이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먼저 파문 당한 것이기는 하다) 잉글랜드 왕과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 중심의 새 종교인 성공회를 새로 만든 인물이다. 이런 사건이 있은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종교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일상처럼 벌어지고는 했다 (물론 왕이 가톨릭교도일 때에는 성공회 교도들이 숙청당하는, 거꾸로 뒤집힌 일들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종교 문제는 식민지 아일랜드 내의 헤게모니 지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가 식민지가 된 이후, 잉글랜드 본국에서는 성공회교도 잉글랜드인들을 아일랜드에 적극적으로 이주시켰다. 아일랜드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물론 신교도 잉글랜드인들이었다. 마치 식민지 조선에서 생활하던 일본인들처럼. 아일랜드의 공장과 자본을 장악한 것도,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것도, 경찰 권력을 장악한 것도 잉글랜드계 성공회 신자들이었다. 성공회가 아닌 구교를 믿었던 아일랜드 원주민들은, 성공회 교도 잉글랜드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자기들의 빈민촌 게토에 모여 살아가야만 했다. 아일랜드를 덮쳤던 가난과 기근의 굴레를 오롯이 감당한 것도, 아일랜드의 피지배 계급이었던 구교도 원주민들이었다. 민족과 종교에 따른 철저한 계급 분리는, 아일랜드의 민중을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고 있어도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하는’ 지옥 속에 던져 놓고 말았다. 민중의 다수가 사실상 사회의 성원으로 기능할 수 없는 이러한 예속 상태에서, 계급 투쟁과 반제 투쟁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 되며 역사성을 획득한다.
U2는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우리 하나가 되자”라는 구호를 자신의 여러 노래들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Sunday Bloody Sunday”, “New Year’s Day”, “Two Hearts Beat as One” 등등에서… 그러나, 그 하나를 둘로 가르는 장벽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 장벽에 의지해 장벽 너머의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장벽을 사이에 둔 사람들은 하나될 수 없다. 그 장벽을 허물지 않는다면. 하지만 U2는 결코 그러한 진실에 대해서 노래하지 않는다. 결국 U2의 입장은 ‘현상 유지(status quo)’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들에게 비판이 가해져야 마땅할 또 다른 리버럴적 근성은, 이들이 미디어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저항적 이데올로기의 이미지 및 스펙터클을 적극적으로 물화하는 – 자기들의 상품으로 꾸며내어 팔아대는 데에 있다. 가령 U2는 사회적으로 ‘진보적’이라 인정받는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홍보하며, 본인들의 인지도를 쌓아 갔다. 이들은 에티오피아 기근을 해결하기 위한 자선 공연 “라이브 에이드”와 이의 후속 기획 “라이브 에잇(Live 8)”에 참여하고, 수 천 달러짜리 선글라스를 쓴 채 난민촌에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U2의 앨범 속지에는, 언젠가부터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과 아웅산 수치 등에 대한 후원을 호소하는 광고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U2의 팬들이 사회운동에 ‘헌신’하는 U2의 앨범을 팔아주고, U2의 앨범 속지에 적힌 대로 앰네스티와 아웅산 수치에 대해 후원한다고, 혹은 수익의 일부가 사회 운동에 기부되는 U2의 40만원짜리 공연 티켓을 산다고 이들이 사회 변동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행위하는 U2의 팬들은 스스로 사회문제에 공감하는 정치적 주체가 된 듯한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게 전부다. 그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적 ‘주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아프리카의 기근을 위한 자선 공연, 라이브 에이드의 예를 보자. 아프리카 빈곤의 원인은 본질적으로 그들을 식민 지배하던 서구 열강들에 있다. 이들은 식민지에 현지의 수요가 아닌 식민 본국의 수요를 위한 단일 작물 플랜테이션을 구축하여, 자생적 경제 체제의 성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부족 단위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돌아가던 아프리카에 제멋대로 경계를 긋고 나누어, 기존 사회를 해체하고 여러 분쟁의 씨앗을 남겨 두었다. 이러한 체제 모순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서구 열강 출신의 부자 팝 스타들이, 어떠한 선의를 시혜적으로 베풀어 자선 공연을 벌이고 그 수익을 아프리카에 가져다 준다고, 아프리카의 빈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U2를 비롯한 팝 스타들과 그들을 소비하는 서구 대중들의 도덕적 부채감만을 해소해 줄 뿐이다. 라이브 에이드의 수익금이 에티오피아의 군벌들에게 유입되어 지역 분쟁을 악화시키는 데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유주의적·소비주의적 시혜의 씁쓸한 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항의 판매상에게서 산 저항은 결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일랜드 민중의 담지자임을 자처하는 U2는 자유주의의 반동적 물결에 투항한 것이나 다름 없는 음악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들의 메시지와 이미지는, 민족주의와도 강력히 결합하여 작동한다.
민족은 분명 ‘상상된 공동체’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적 실재’로서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 체제가 서구 국민국가 중심의 민족주의를 동원하여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식민지 민중과의 착취 관계를 형성해가는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식민지의 피착취 민중들이 억압적 지배 체제에 맞서게 하는 주요한 이데올로기의 기제로 작동한다. U2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이미지를 많이 활용한 밴드로 알려져 있지만,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들은 기실 어떠한 투쟁의 가능성을 긍정하기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덮어두고 현상을 유지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다.
가령 위에 등장했던 <War> 수록곡들의 메시지들, “우리는 하나될 수 있다”에서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한다’의 당위성은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테제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간절한 호소 하나로 한 민족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청산하고 총부리를 내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처럼 보인다. 계급 모순과 얽히고설킨 아일랜드의 민족 모순은,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가 되어 한번에 잘라낼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계급의 장벽이 아일랜드의 두 계급을 서로의 게토로 몰아 넣는 한, 이들이 총을 거둔다고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단순히 민족성에 호소하는 U2의 접근은 나이브하기만 하다.
그런데 U2의 민족 관점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바로 이들의 미국에 대한 관점이다. U2는 오늘날 제국주의의 심장부로서 미국에 대해, 주변부 피착취 국가의 인민이 가진 증오와 냉소를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이 소비하고 생산하는 로큰롤 문화의 발상지인 미국을 동경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가 감정은 이들의 과도기적 실험작이었던 4집 <The Unforgettable Fire>(1984)에서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블루스·가스펠 문화의 세례를 받은 <The Joshua Tree>에 이르기까지 너르게 드러난다. 가령 <The Unforgettable Fire>에 수록된 동명의 타이틀 곡에서는 “이 도시의 불빛은 황금과 은처럼 빛나지만, 밤을 뚫고 나온 당신의 눈은 석탄과도 같이 어둡다”며 화려한 미국적 도시 속 소외된 삶을 묘사하지만, 같은 앨범의 다른 곡은 미국의 로큰롤 문화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헌정하는 “Elvis Presley and America”라던가… <The Joshua Tree>에서는 미국 제국주의를 묘사하는 “Bullet the Blue Sky”라는 곡과, ‘하느님 나라’와 미국을 동일시하며 “그녀(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미국의 알레고리가 될)는 자유다”라는 메타포를 동원하는 “In God’s Country”가 함께 실려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미국 투어를 다룬 전기 영화 <래틀 앤드 험>에서 이는 멤버들의 여러 멘트들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아쉬운 지점은, 이 U2의 디스코그라피 속에서 이러한 양가감정이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결론을 향해 전진해 가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 또한 U2 특유의 나이브함 때문인지, 아니면 U2가 이미 미국 시장의 수혜를 입어 배부른 록스타가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구도 위에 선 상이한 계급 성원들에게 ‘한 민족’임을 내세워 섣부른 화해를 종용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들의 종착지는 ‘신’으로 귀결된다. U2는 ‘운동권’ 밴드이기 이전에 크리스천 밴드고, 보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이를 강조한 바 있다. 2집 <October>에 실린 초기작 “Gloria”에서부터, 가스펠에 영향받은 <The Joshua Tree>의 여러 곡들(“In God’s Country”나 “I’m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같은 곡들), 그리고 근작으로 오면 11집의 “Yahweh”나 “Love and Peace or Else”에 이르기까지, U2는 언제나 “결국 평화는 총부리를 내리고 주님의 품에 귀의할 때에 찾아온다”는 메시지로 프로파간다를 마무리 짓는다. 종교가 역사적으로 계급 적대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해왔음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U2의 음악은, 자유주의(개혁주의), 민족주의, 기독교 정신의 반동적 삼중주에 불과한 셈이다. 음악산업이 자본주의 문화시장의 첨병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문제적인 음악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필자가 유독 U2에 날을 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저항’의 스펙타클을 차용하여 저항적이지 않은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도둑이기 때문이다. 행동과 실천을 대체하는 소비는, 그렇지 않은 소비보다도 더 악질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