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은 부르주아적 구성물!

펫 샵 보이즈를 들으며, 로맨스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by 김로자
우리는 지금껏 연애, 사랑, 로맨스에 대해 너무나 당연스럽게만 생각해 온 것은 아닐까. 영국의 신스 팝 듀오 펫 샵 보이즈가 2013년에 발표한 곡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에서, 이들은 과연 사랑이 당연하고 절대적인 감정인가에 대해 노래한다.


사랑이 뭐예요?


언젠가부터 사랑은 시대의 보편을 담지하는 개념처럼 여겨져 왔다. 그래서인지, 이는 시대의 지성들과 예술가들이 의문을 갖고 도전하는 주요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플라톤에서부터 프로이트를 거쳐 푸코에 이르기까지, 담론으로서의 사랑은 본질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이한 관념 사이에서 경합하고 논쟁을 촉발시키는 화두였던 셈이다.

사랑이라는 문제에 가장 먼저 천착했던 건 정신분석학자들이었다. 물론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전개되는 오늘날에는 정신분석학이 사이비 학문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부르주아 문화가 꽃을 피우며 욕망과 정동이 들끓던 19세기 말의 빈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욕망에 이끌린 ‘소비의 주체’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해갔던 세기말 빈의 시민들은 성과 사랑의 이데올로기마저 물화된 대상으로 다루기를 원했는데, 전근대적 윤리 관념은 이러한 담론을 그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억압하기에만 급급했다. 빈의 ‘탕아’들에게는 성과 사랑의 이데올로기를,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해줄 규범과 사유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류를 타고 등장한 프로이트는, 조야하게 도식화하자면 “의식은 ‘성(sex)’의 산물”이라는 테제가 될 견해를 역설했다.

세기말 빈이 가지고 있던 사랑과 정동의 표상, 클림트의 "키스 (The Kiss)".

어딘가 유물론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환원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위와 같은 견해는, 맑스주의 이론이 등장하고 이것이 프랑스 구조주의나 기존의 정신분석학 이론과 뒤섞이며 새롭게 발전해 갔다. 맑스가 지성사에 제공한 가장 커다란 기여는, 이분법적 경계 너머에서 화해하지 못했던 관념과 실재를 하나의 총체로 재구성해냈다는 것일 테다.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의식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물적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고 제약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의식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들이 행하는 실천들을 추동한다. 의식이 사회의 객관적, 실재적 조건들의 변혁을 지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만연한 생각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임금 노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여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정치경제적 구조로부터 기인한 이데올로기다. 가령 사람들에게 자기가 일구어야 할 토지가 있는 농경 사회에서라면, 취직할 필요도 돈을 벌 필요도 없을 테니까. 이처럼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생각들은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사회적 조건들을 바꿔 버리기도 한다. 공장에서 쥐꼬리만 한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생기자 이들이 공장을 차지하고 사회적 부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해야 한다며 등장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곳곳에서 자본주의 세상을 뒤엎는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만약 이처럼 사랑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지는 관념이자 활동이라면, 즉 사랑이 이데올로기라면, 이 역시도 맑스적 도식과 운동법칙을 통해 규정해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여기, 흥미로운 노래 제목이 있다.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 ‘사랑은 부르주아적 구성물!’이라는 얘기다.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의 공식 음원.


사랑이 사랑이지, 부르주아적 구성물이라니 대관절 무슨 소리일까 싶다. 그런데 사랑이 그저 자연스러운, 본성적인 감정일 뿐이라면, 여기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규범들도 자연스럽고 본성적인 것일까. 아래의 질문들을 곱씹으며 생각해보자.

"사랑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 벌어지는, 강력한 애정과 끌림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교류한다는 숱한 관계들, 그러니까 세상에 널리고 널린 여러 연애들을 들여다보자. 여성과 남성 개인의 결합이 ‘정상적’인 연애로 여겨지지만,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여남 간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연애를 매개하는 사랑이라는 것 역시 너무나 불확실하다. 연애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요컨대 사랑이라는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 다른 욕망(가령 그저 외롭기 때문이라던가) 때문에 연애를 할 수도 있고, 혹은 연애로 규정되지는 않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가령 당신이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혹은 친구를 사랑한다면, 왜 그 관계는 연애가 될 수 없는가?

“연애에 임하는 이들은 하나의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애정과 끌림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연애는 이러한 감정을 서로가 확인하고 동의한 끝에 구성되는 관계다. 그렇다면, 연애에 임하는 당사자들이 동의했을 때에, 그러한 관계는 왜 굳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애인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연애 관계를 형성했을 때에 질투와 분노를 느끼는가? 어떤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것은 당사자들의 자유이고, 타인이 여기에 개입하는 것은 폭력일 텐데 말이다.

“연애는 대개 결혼으로 이어진다.”
결혼은 왜 연애를 전제로 하고, 연애는 결혼의 이전 단계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오히려 결혼은 연애라는 단계가 소거된 채 이루어지던 건데 말이다. 또 결혼이라는 제도적 결합 없이도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애 관계는 유지될 수 있는데… 오히려 결혼은 연애를, 즉 필멸하고 또 새롭게 뒤바뀌기도 하는 감정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제약하는 게 아닌가.

위처럼 사랑의 ‘조건’들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면, 그 조건들의 원인을 따져 보기 마련이다. 프로이트 시대의 정신분석학은 핵심을 성에서 비롯된 정동으로부터 찾고자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알쏭달쏭하다. 아까 잠깐 이야기했던 펫 샵 보이즈의 곡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가 담은 주장으로부터, 우리는 좀 더 설득력 있는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왜 펫 샵 보이즈는 ‘사랑은 부르주아적 구성물’이라 노래했을까

사랑이, 그리고 연애가 부르주아적 구성물이라는 말은,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초역사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말이다. 가령 오늘날 우리는 대개 일 대 일의 연애 관계를 맺고 이로부터 벗어난 것을 부도덕한 일탈로 치부하지만, 근대 이전의 여러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중국과 인도의 일부 소수민족, 그리고 티베트 등), 혹은 난혼은 사회의 주된 도덕관념 속에서 작동했다. 특히나 야생에서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짧은 수명 때문에 노동력을 잃기 쉬웠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노동력을 ‘재생산’ 해야 했던, 그러니까 아이를 많이 낳아야 했던 고대 사회에서, 가족은 대부분 난혼의 형태로 구성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일 대 일의 연애와 결혼이 전 지구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적어도 산업 혁명 이후, 즉 근대가 도래한 18-19세기부터다. 가족 소유의 토지를 중심으로 사회적 생산이 이루어지던 농경 사회에서는, 하나의 가족 공동체가 최대한 많은 노동력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토지를 소유한 하나의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남성 가부장이 가족 경제를 계획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재생산 수단’을 확보하는 체제, 요컨대 여성 억압적 일부다처제나 축첩제 따위가 생겨났다.

그런데 산업 사회가 되자,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촌락의 농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도시로 흘러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본가 한 명이 노동자 한 명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임금을 주며 일을 시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라버리는 시대였다. 사람 하나하나가 공장의 부품이었고, 따라서 생산성이 떨어지면 부품 하나하나를 그때그때 갈아 끼우는 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임금 노동자가 된 가부장은 자신의 밑에서 일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이 시기의 ‘재생산 노동’은 출산이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보급하는 것, 예컨대 노동자가 먹을 밥을 짓고, 노동자가 입을 옷을 빨래하는 가사 노동을 중심으로 재구축된다. 한편으로 노동자의 노동력이 시장으로 끊임없이 공급되는 상품이 되어 경쟁하는 사회에서, 상품의 가격인 임금은 가장 싸게, 즉 노동자가 생존할 수 있는 최저 비용에 가깝게 맞추어진다. 가부장들은 가사 노동은 한 명의 아내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 자신의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는 대가족은커녕 핵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도 버겁다. 이런 정치경제적 조건 위에서, 사람들은 일 대 일로 연애를 시작하고 일 대 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저 사랑해서 결혼했을 뿐인데, 사랑과 결혼은 여성을 가사 노동의 착취를 통해 유지되는 억압적인 가족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한편으로 가족을 유지하기에는 어려운 수준으로 임금 노동의 가격이 구성되는 상황은 오늘날의 여성들을 노동 시장으로 호출해낸다. 하지만 여전히 낡은 가족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가부장이 내팽개친 ‘집안일’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 되며, 여성은 임금 노동과 비임금 가사 노동의 이중 착취를 마주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득을 보는 건, 노동력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는 자본가들이다. 펫 샵 보이즈가 ‘사랑은 부르주아적 구성물’이라 외친 데에는, 이런 까닭이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당신에게, ‘사랑’이란 낱말이 너무나 당연한 진리였다면

그럼에도, 그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충분한 사유를 거치지 않은 채 우리의 입에서 내뱉어진 낱말에 불과하다면, 사랑이 사실은 내 의지가 아닌 기저의 다른 요인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 아닐까. 신나는 펫 샵 보이즈를 들으며, 우리의 사랑을 되돌아볼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U2와 계급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