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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이 반동!

브리티시 록과 계급의식

by 김로자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제레미 코빈을 공산주의자 미치광이라 비난하며, 노동당과 영국의 차기 정권을 코빈에게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오아시스를 재결합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좌파이면서도 로큰롤 리스너인 나에게는 참 슬프고 화나는 일이지만, 사실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갤러거 형제의 오아시스는 계급협조주의적 로큰롤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획이었고, 이들은 이미 블레어의 중요한 선전 도구로서 활용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브리티시 모던 록이 가지는 몰계급성의 중요한 근거를, 오아시스로부터 출발하여 톺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아시스는 브릿팝 웨이브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브릿팝이라 불릴 만한 음악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스웨이드였겠지만, 이를 정립하고 대중들에게 보급한 것은 오아시스였다. 80년대에 영국적 록 음악을 다져나가던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가 해체하거나 몰락한 이후 브릿팝의 물결이 몰아치기 전까지, 영국의 록 키드들은 대개 시애틀 그런지를 소비했다. 이는 ‘미국에서 수입된 외래 음악’임과 동시에, 니힐리즘과 르상티망의 정서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오아시스의 “Live Forever”가 그런지의 우울에 대한 반동으로써 내걸었던 낙관주의의 정서는 가히 획기적이었을 것이다. 아일랜드 이민자이자 맨체스터 노동계급의 자녀들이었던 이들이, 영국 노동계급에게 주었던 희망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리라. 청자들에게 영국인과 노동계급으로서의 동질성을 호소하던 오아시스는 금세 이들의 대변자로서 상징화된다.


오아시스의 이러한 지위를 각인시키고 공고히 한 사건은, 흔히 '브릿팝 전쟁 (Battle of Britpop)’이라 불리는 90년대 중반 블러와 오아시스의 대결이다. 1994년에 데뷔작 <Definitely Maybe>로 일약 브릿팝 스타가 된 오아시스와 <Leisure>와 <Parklife>를 통해 브릿팝의 맹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밴드 블러가 비슷한 시기에 새 앨범을 발매하면서, 당시 이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오아시스가 전형적인 노동계급의 대변자로서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던 반면, 블러는 런던 중산층 엘리트의 자제들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의 새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와 <The Great Escape>는 1995년도에 연달아 발매되며 차트에서 대결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노동계급 리스너들과 대중은 결국 오아시스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러나 대중의 워너비가 된 오아시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타블로이드의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악동이자 영국 최후의 록 스타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2015BritpopMainGettyNME190815.hero_.jpg 영국 대중음악을 주로 다루는 평론지 NME의 사진 자료. 블러와 오아시스의 대결구도를 그려내고 있다.


오아시스는 자기들의 계급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성장했으나, 스미스의 기획이었던 이른바 “영국성”을 지향하는 음악을 했다. 그리고 오아시스와 브릿팝은 비틀즈로부터 출발해 스미스를 거쳤던 영국 대중음악의 총체적 조망이자 재발견이었다. 그래서인가, 이는 결국 블레어 정부가 민중을 설득하기 위해 활용하던 일종의 내셔널리즘 선전 ‘쿨 브리타니아 운동’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Morrissey_2_1379680144_crop_550x550.jpg 밴드 스미스의 보컬 모리시. 그는 지독한 인종주의자로, 영국으로 수입되는 흑인음악을 혐오했다. 그는 이것의 대안으로 대중음악의 영국적 문법을 확립하는 데 천착했다.


‘제 3의 길’이라는 테제를 앞세워 신자유주의 기조에 투항하고 노동계급을 배반한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1차 대전을 앞둔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러했듯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노동계급을 포섭하는데 골몰했던 듯하다. 쿨 브리타니아 운동은 세계의 문화와 예술을 장악하는 영국인들의 저력을 내세워 애국심을 고취하고, 대중을 노동계급이 아닌 영국인으로서 단결토록 하는 프로파간다였다.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는 이에 찬동하고 블레어의 친구임을 자처하며(이 글의 커버 이미지처럼, 노엘 갤러거는 블레어와 함께 악수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민중의 실존하는 고통과는 점점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블레어 정부가 쿨 브리타니아 운동을 구호로 채택한 1997년은, 당시 오아시스의 신보 <Be Here Now>가 평단과 대중의 혹평에 시달리고 브릿팝을 지양하는 스피리추얼라이즈드와 라디오헤드의 앨범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와 <OK Computer>가 성공하며, 브릿팝의 몰락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오아시스 이후의 브리티시 록이 갖는 메시지도 오아시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가령 21세기 브리티시 인디 록의 문을 연 프란츠 퍼디난드의 경우, 스스로의 음악을 “신나게 파티하며 여자들과 놀기 위한(...)” 음악으로 규정한다. 또다른 영국 인디 록의 맹주 악틱 몽키스 역시 이와 유사한 기조 위에서 음악을 한다. 이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척 베리와 같은 반항적인 로큰롤의 개척자들이 시대의 탄압으로 군대나 감옥에 끌려간 뒤 잠깐동안 등장했던, 생각 없이 “놀자!”나 외치는 이른바 ‘예-예 족’ 음악가들의 행보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YlbMxYW.jpg 영국의 인디 밴드 악틱 몽키스. 최근 신보 <Tranquility Base Hotel & Casino>에서 이들은 부르주아적/댄디즘적 아우라를 구현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렇다면 이전의 브리티시 록은 어땠을까? 전통적인 영국 록 음악에서, 계급의식은 좌파 엘리트들의 거대하고 전위적인 기획과 노동계급 당사자들의 단순성에 기초한 기획이 대결하는 양상을 통해 드러났다. 핑크 플로이드를 위시한 공룡 밴드들로 대표되는 전자는 형식적 전위에 천착하는 반골들이라 대중을 향한 호소력을 잃었고, 펑크 록으로 대표되는 후자는 자본주의 음악 시장에서 제도화되어 안착한 이후 새로운 지위에 취해 노동계급과 멀어져왔다. 한 때 더 클래시와 같은 밴드들이 대중의 즉자적인 분노에 호소하면서도 주장과 형식의 측면에서 진보해가는 음악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브리티시 록은 결국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1101020304_400.jpg 세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밴드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밴드가 된 U2. 수천 달러짜리 선글라스를 쓰고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위선은 오늘날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저러한 두 조류 사이의 분절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가령 전자의 경향을 계승하는 라디오헤드의 경우,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좌파 엘리트의 아방가르드적 기획이라 할 법하다. 라디오헤드는 환경주의자, 아나키스트, 마르크시스트들의 테제들을 자기들의 주장과 실천으로 뒤섞고, 이를 모호성에 기초한 음악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이들은 분명 앞으로 걸어가고 있지만 대중을 설득하는 것과는 더더욱 멀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들은 록 콘서트에 선 프랑스 관념 철학자들인 셈이다. 후자의 경우 의도는 무너지고 단순성의 외투만 남아, 더더욱 쓸모없는 음악으로 전락하고 있다. 즉자적 저항을 메시지로 삼는 미국의 네오 펑크 밴드들보다도 한참을 뒤쳐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쨌든 대중음악은 대중음악이고, 자본주의 음악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인데. 왜 이들의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은 이렇게 헤집어지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왜긴 왜야, 오아시스가 노동계급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다가, 이것 ‘마저’ 물화하여 상품으로 전락시킨 반동 놈의 새끼들이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데에서도 정체성 정치가 어떻게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어가시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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