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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Jan 25. 2020

일본의 좌파 정당운동, 동병상련의 운동사

일본 좌파정당 운동사에 관한 개괄

빠른 근대화와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를 거치며,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나라 일본, 그러나 요즈음 일본의 정치 구도 내에서 좌파 정당들의 영향력은 미미하기만 하다. 일본의 좌파 정당운동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몰락해갔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를 살펴보는 것은, 반면교사와 같은 맥락에서 남한의 좌파정당 활동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은 유서 깊은 좌파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성장을 기반으로 좌파 대중정당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패전 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공산당이 활동의 자유를 얻었고 전쟁 전 혁신정당 흐름이 결집해 사회당을 출범시켰다. 우파 정치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있었으므로, 좌파정치세력은 대안적 흐름으로 크게 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비록 냉전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며 이들의 행보에는 제동이 걸렸으나. 그럼에도 사회당 중심의 일본 좌파는 일본의 정치 구도 내에서 주요한 축을 차지해왔다.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은 물론이고, 1950~60년대에는 (60년대 말 그 유명한 ‘전학공투회의’의 결성으로 이어지는) 좌파 학생운동이 크게 활약했다. 이들을 통해 좌파 청년 세대와 노동자 단위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었다.


  문제는 좌파 조직들의 부족화와 고립적 조직운동관에 있었다. 우선 사회당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이하 ‘총평’)의 ‘배타적 지지’에 의존해왔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조직노동자들의 몰표를 받기는 했지만, 당 자체의 기반은 취약했다. 총평이 선거 때마다 조직과 재정을 책임져주므로 굳이 당의 기반을 굳이 확장해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노동조합조직-총평과 정치조직-사회당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고 양자 사이의 관계가 그다지 유기적이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조직 노동자들은 선거 때마다 사회당에 표를 몰아주기는 했으나 그것이 입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노동조합 집단입당제도가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조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총평의 간부들 뿐이었다. 한편 사회당의 골간을 장악한 정파 ‘사회주의협회’는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교조적 마르크스이론을 토대로 한 선전만 되풀이했는데, 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좌파 청년들에게도 대중에게도 별다른 매력은 없었다. 결국 재생산 구조를 닦아 두지 못한 사회당은 침체를 맞이하는데,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일본 노동조합운동이 산별 체제 대신 기업별 노조 체제를 수용한 일이었다. 노동조합운동이 대기업 중심의 기업 노조 중심으로 꾸려지고, 외부의 숱한 중소기업들에서 만들어진 노동조합들은 고립된 위치에서 운동과 연결되지 못한 채 미조직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한편 공산당 역시 고립적 성격이 강했다. 공산당은 ‘인민적 의회주의’ 테제 하에 대중정치의 길을 모색하고, 일간지 <아카하타>를 중심으로 독자적 조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전위정당론에 입각한 운동관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것이 정파 간 갈등을 야기해 폭력 사태로까지 번지기도 한다. 


  1980년대 자민당은 시장지상주의적 긴축 정책을 단행하며 노동계를 손보기 시작했다. 1987년 국철 사유화 조치가 대표적인데, 이는 총평의 핵심인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같은 해에는 우경화된 민간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총연맹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맹)가 출범했는데, 총평은 2년 후 렌고에 흡수 통합되었다. 노동조합에 의존해 온 사회당은, 렌고의 노선에 따라 우경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당의 우경화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사회당은 자구 노력을 벌여, 시민운동 출신의 여성 정치인 도이 다카코를 대표로 내세우고 의회에서 득표율 20%를 넘겨 선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당의 약진에 따라 소수 우파 정당들이 지지율을 잃으며 자민당과 유착하기 시작했고, 이 흐름 속에서 렌고는 ‘빅 텐트’론을 펼쳐 ‘사회민주주의-리버럴 세력의 총결집’을 주장하고 사회당의 해체와 중도정당의 건설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보수 계열 신당들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93년 7월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당의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이탈이 일어났다. 렌고 노조 지도부들은 사회당이 너무 왼쪽에 있다며 보수 신당들을 지지했고, 사회당이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바꾸는 동안 당 내 좌파들은 탈당해 신사회당을 차렸다. 이 시기 사민당이 포함된 비자민당 연립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는데, 보수당과의 공동 집권은 당 내 정체성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대중적 좌파 구심을 상실케 했다.


  사회당은 붕괴했고, 사민당도 이후에 구성된 ‘사민-리버럴’ 정당 민주당도 애매한 위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일본 좌파 정치의 생태는 초토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산당의 선전이다. 공산당은 자민당보다도 많은 지역의원을 확보하며, 골간에서 대중운동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좌파 내에서 사회당-공산당-신좌파 (학생운동) 사이의 반목과 분열이 너무 심했던 터라,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일본 사회 내에서 좌파적 여론을 수렴해갈 것인지는 아직도 커다란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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