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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Feb 11. 2020

기생충, 계급의식, 스펙터클의 사회 유감

영화 <기생충>을 둘러싼, 메타-영화적 장면들

<기생충>을 둘러싼 말, 말, 말. 어쩌면 <기생충>보다는 이를 둘러싼 우화적 상황들이 하나의 영화가 아닐까. 기생충, 계급의식, 스펙터클의 사회 모두 유감이다.

  

  다들 지켜본 것처럼, 봉준호와 <기생충>은 마틴 스콜세지와 쿠엔틴 타란티노를 쳐부수고 오스카를 정복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오스카 중계를 지켜보며 가장 이상하고 의미심장한 감정을 느꼈던 대목은, 지난 한 해 세상을 떠난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빌리 아일리시의 공연에서 안나 카리나와 아녜스 바르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던 바로 그 때다. 전년도에 영화상 수상을 놓친 <로마>의 복수를 하러 돌아온 할리우드 바깥의 오락영화 <기생충>이 인종 다양성의 외피를 두른 채 로컬 영화제에서 해적질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사이, 들뢰즈 말마따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 임을 예견했던 두 여성-누벨 바그 영화인의 죽음이 스쳐 지나가다니.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기생충>을 둘러싸고 이를 소비하는 방식을 통해 이 영화는 비로소 메타-우화이자 메타-영화가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봉준호가 아현동으로 쳐들어가 반지하집의 거주자들을 내쫓은 뒤 배우들에게 거주자를 연기하게 하는 장면. 언론과 대중들 사이에서 봉준호와 <기생충>이 내셔널리즘적 맥락으로 치켜세워지는 장면. 좌파들은 <기생충>의 계급성을 비평하려는 사이에 보수 정당의 대표는 <기생충>의 성취를 축하하며 영화를 한 번 더 보겠다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장면. 서울시가 <기생충>에서 드러난 가난을 전시하는 관광 코스를 개발하는 장면. 이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영화를 구성하며 봉준호의 의도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오스카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가장 고도로 집적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종편 방송사의 중계를 통해 <기생충>의 교환 가치가 가장 단적으로 선전되는 순간과, 마치 상황주의자들처럼 스펙터클의 세계 바깥으로 벗어나는 스펙터클 생산을 지향하던 누벨 바그 주역들이 퇴장하는 순간이 이토록 절묘하게 교차하다니! 어쩌면 이는 MTV에 기 드보르의 권총 자살을 생중계해주는 것에 버금갈지 모른다.


  이 메타-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재미있었던 지점 중 하나는, 거대 자본 CJ를 등에 업은 <기생충>이 가난을 정형화된 포르노그라피처럼 소비한다는 비평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자기들이 생각하는 가난의 정형화된 상을 전제한 뒤, <기생충>에서 드러나는 가난은 봉준호가 이러한 상을 늘어트리거나 축소시켜 자기가 생각하는 가난의 이념형에 맞게 조작해낸 것이라 화를 낸다. 하지만 보편적-총체적 상으로서의 가난이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개개인의 가난 경험들이 기계적으로 하나의 서사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나는 10년이 넘는 어린 시절을 반지하에서 생활했지만, 내 생활상은 <기생충>에서 드러난 그것이나 이의 비판자들이 이야기하는 전형 그 어디에도 정확히 들어맞지 않은 채 표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의 가난 스펙터클과 이를 불쾌해하는 이들의 정형화된 가난 경험이라는 이미지가 경합하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가난 경험의 상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개인들은 어떻게 이를 체화하게 되었는지, 기실 그 과정은 봉준호가 가난을 스펙터클한 체험으로 구성해낸 것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에 불과하지 않은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겠다. 본질적으로 스펙터클에 포위된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생활세계에서 이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의 이미지가 된 가난을 이미지화하지 않고 다루는 (영화) 예술과 알레고리는 성립 가능하지 않다. <기생충>이 가난 포르노그라피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한다면 정말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모든 체험이 포르노그라피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또 재현된다는 데에 있다. (덧붙이자면 애초에 <괴물>, <설국열차>에서 <옥자>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봉준호의 문법은 리얼리즘이 아니었고, 그것들은 알레고리를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진 우화이자 오락 영화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은, 왜 모든 인식 가능한 것들은 이미지의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가이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문제로, 이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기저의 메커니즘이 물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가난의 상을 가지고 <기생충>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들 중에서 이 문제에 관해 대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본 적이 드물다. 대부분이 언뜻 진보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만 눈 앞에 펼쳐지면 만족할 것 같은 이들이었다. 기 드보르의 죽음 이후로 진정 대항 스펙터클에 기초한 예술을 생산해내는 건 가능한지에 대해, 아득한 고민이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세상은 이미 영화가 되었다. 갈루아즈 담배나 피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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