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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Mar 01. 2020

닉 케이브 사용 설명서

정동과 우울의 싱어-송라이터, 폭력적 고독의 근원을 향하는 여정

  모래 먼지가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황야에서, 늦은 새벽 술에 취한 가스등만이 껌뻑이는 멜버른과 베를린의 지하 클럽으로, 담배 연기 속에서 불확실한 사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상 파울로와 영국으로... 평생을 우울과 함께 방황해 온 음유 시인 닉 케이브. 그는 음악, 시와 소설, 극본과 연기 따위의 온갖 것들을 매질(媒質) 삼아 자기의 정동을 배설했고, 르상티망(욕망의 좌절로 인한 원한 감정)과의 한 판 승부를 벌였다. 폭력적 고독의 근원을 찾아 떠났던 그의 발자취는, 이제 숱하디 숱한 안타까운 청춘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 글은 닉 케이브의 음악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을 위해,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며 닉 케이브의 문법을 다뤄보는 '닉 케이브 사용 설명서'다.


들어가며: 닉 케이브는 누구인가
"고딕의 대부." - 모조 매거진.
"닉 케이브는 우리 시대 사랑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이다." - 소설가 윌 셀프.
"닉 케이브는 분명 영원히 살 것이다. 악마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밴드 '버스데이 파티'와 함께 고물 창고에서 뛰쳐나온 이후로, 그는 루시퍼의 로큰롤 남자 친구 역할을 하며 당당하게 걸어왔다." - 롤링 스톤스.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닉 케이브. 그는 시인과 소설가로, 그리고 배우와 극작가로 활동했지만,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밴드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리더로 무대에 선 싱어송라이터 닉 케이브다. 1979년 멜버른의 인디 씬에서 광기에 찬 포스트 펑크 밴드 '더 보이즈 넥스트 도어'와 '더 버스데이 파티'로 데뷔한 그는,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를 결성한 뒤 예술가들의 성지 베를린으로 건너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닉 케이브의 음악은 허무하고 짙은 흑백의 우울을 전시하는 고딕 록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다른 고딕 록 밴드들과 닉 케이브의 음악은 다소 상이하다. 가령 고딕 록의 전형을 확립한 바우하우스와 수지 앤 더 밴시스는, 펑크 록의 단순성을 계승하되 과격함을 정제하고 힘을 빼서 무기력해진 조이 디비전의 스타일과 유사하다. 한 편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영국의 고딕 밴드 더 큐어는, 신시사이저를 비롯한 전자 악기를 활용해 고딕 록에 팝적인 감각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고딕 록의 형식에 당시 유행하던 신스 팝과 뉴 웨이브 음악의 아련한 향취를 묻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우울을 연출한 셈이다.


  그러나 닉 케이브의 스타일은 바우하우스 풍의 전형적인 고딕 펑크도, 혹은 더 큐어 풍의 다크웨이브도 아니다. 닉 케이브에게 영향을 준 것은 걸걸하고도 장중한 블루스 음악, 50년대의 로큰롤과 로커빌리, 그리고 과격함을 잃지 않은 초기의 펑크 음악이다. 닉 케이브는 새벽의 슬픔을 무겁게 노래하는 블루스 싱어송라이터 톰 웨이츠와, 광기로 무대를 장악하는 펑크 로커 이기 팝의 가운데에 서 있다. 이러한 음악적 기반 위에서, 닉 케이브는 절제될 수 없는 충동을 과격하고 정동적인 방식을 통해 토해낸다.


  닉 케이브의 음악은 사랑과 미움, 종교와 죽음에 관한 발라드다. 그의 가사는 (기독교적) 죄와 벌에 관한 뒤틀린 알레고리들, 좌절된 관계와 욕망들에 대한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절절하게 뿜어져 나오는 그의 굵고 짙은 바리톤 보컬은, 마침내 아픔을 아름다운 것으로 빚어내고야 만다. 그는 뭐랄까, 잿빛 도시를 배회하는, 주인 없는 개 같은 싱어송라이터다.


1973~1983: '더 보이즈 넥스트 도어'와 '더 버스데이 파티' 시절, 콜필드 고등학교의 풋내기 사이코들
밴드 '더 버스데이 파티(The Birthday Party)' 시절.

  

  닉 케이브 음악 커리어의 시작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닉 케이브는 멜버른의 콜필드 고등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에 다니던,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풋내기 소년이었다. 공교롭게도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학교에서, 그는 음악적 지향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찾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후 닉 케이브와 반 평생을 함께 하는 기타리스트 믹 하비다. 이들이 학창 시절을 보내던 70년대 초는, 루 리드, 이기 팝, 데이빗 보위 따위의 아티스트들이 펑크 록과 아방가르드 음악의 원형을 만들어가고 있던 때다. 자연스레 이들의 실험에 영향을 받았던 콜필드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스쿨 밴드를 결성해 선배들의 음악을 모방하며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워 간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6년 즈음, 펑크 록은 단순 무식하고도 과격한 상황주의 운동으로 꽃을 피워가기 시작한다. 미국의 라몬즈, 영국의 섹스 피스톨즈와 더 클래시 따위의 밴드들이 이러한 흐름의 주역이었다. 이 무렵 닉 케이브와 친구들은 '더 보이즈 넥스트 도어'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멜버른의 인디 씬에서 펑크 록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패티 스미스의 "Gloria"(원곡은 밴 모리슨의 것이다)나 라몬즈의 "Blitzkrieg Bop" 같은 펑크 록의 고전들, 그리고 몇 개의 자작곡을 연주했다.


  이후 이들의 스타일은 펑크에 대한 단순한 모방으로 벗어나 독창적인 모습을 갖춰가는데, 닉 케이브는 자기의 음악적 관심사였던 로커빌리와 블루스, 재즈 따위를 적극적으로 인용하기 시작했다. 음악적 기초를 쌓아가던 1979년 이들은 첫 정규 앨범을 내고 밴드의 이름을 '더 버스데이 파티'로 바꾸었는데, 버스데이 파티의 괴상망측한 음악은 멜버른의 인디 씬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초기의 펑크 록이라는 토대는 점차 미니멀리즘이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글램 록에 영향받아 제멋대로 뻗친 머리와 제멋대로인 화장을 한 닉 케이브는 미니멀리즘의 토대 위에서 광기에 찬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시 이들의 스타일은 사이코빌리라는 장르의 원시적 형태로 평가받는데, 사이코빌리란 엘비스 프레슬리 류의 50년대 로커빌리 음악에 펑크의 과격함을 융합하고, 신경증적 괴성과 광기에 찬 퍼포먼스로 관중을 겁주는 다분히 컬트적인 장르다. 닉 케이브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초점 없는 시선으로 관중들을 바라보고, 흐느적거리다 소리를 지르고, 어떤 노랫말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며 내뱉고, 때로는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처럼 공연 도중 자해를 했다. 무대 위의 닉 케이브는 스크린 속의 빈센트 프라이스보다 흉측하고 무서웠다. 멜버른 인디 씬의 리스너들은 버스데이 파티의 퍼포먼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만, 대중은 이들의 음악을 결코 환영하지 않았다.


더 버스데이 파티의 "Junkyard" 라이브.


  닉 케이브는 더 보이즈 넥스트 도어와 버스데이 파티로 4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지만, 그는 좁디좁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중과 평단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닉 케이브는 결국 기약도 미래도 없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밴드 활동을 그만두고, 1982년 새로운 '씬'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믹 하비와 함께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된다.


1983~1985: 베를린으로의 이주와 <From Her to Eternity>,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시작
베를린에서 공연하는 닉 케이브.


  멜버른에서 베를린으로 떠나온 닉 케이브와 믹 하비. 버스데이 파티는 고딕 펑크와 사이코빌리 마니아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지만, 밴드는 1983년 여름 결국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 무렵 닉 케이브는 자기만의 음악에 관한 청사진을 그려가며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를 결성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믹 하비, 기타리스트 로우랜드 하워드와 같은 버스데이 파티 시절의 동료들도 몇몇 끼어 있었는가 하면, 닉 케이브가 교류하던 베를린의 무명 인더스트리얼 밴드 아인스튀어첸데 노이바우텐의 멤버 블릭사 바르겔드와 같은 의외의 인물들도 있었다. 인더스트리얼은 전자 악기를 통해 전위적이고 파괴적인 실험을 이어나가는 장르인데, 베를린에 도착하여 인더스트리얼을 처음 접한 닉 케이브는 여기에서 여러 실험적 영감을 받은 듯하다.


  이 무렵 그는 뒤틀린 욕망과 폭력으로서의 사랑에 관한 가사를 쓰며, 이를 어떤 형식 위에서 오롯이 전시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토대로 삼기에 가장 좋은 것은, 미니멀리즘에 기초한 흑백의 단순성과 무기력을 드러내는 조이 디비전 풍의 포스트 펑크였다. 포스트 펑크라는 캔버스 위에 색을 입힌 것은, 인더스트리얼에 영향받은 기타 노이즈(소음)들이다. 블루스나 로커빌리보다는 베를린의 포스트 펑크와 전위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이 시기 닉 케이브의 지향은, 밴드의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From Her to Eternity>(1984)로 이어진다.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앨범 <From Her to Eternity>의 동명 수록곡. 썸네일 이미지는 앨범의 커버.


  앨범의 이름은 1953년 영화화된 제임스 존스의 소설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에 영향받아, "그녀에서 영원까지(From Her to Eternity)"로 지어졌다. 프로이트적 환원을 통해 사랑 따위의 감정을 욕망으로 정의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대상에게 투사하는 이 무렵의 닉 케이브는, 마초적 남성상에 과도하게 이입해 있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닉 케이브의 혼란스러운 관점이 이후 초연한 반폭력의 시선으로 전화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앨범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던 베를린의 새로운 전위 음악들에 경도되며 음악적 고민을 이어간, 버스데이 파티와 이후의 닉 케이브 커리어 사이에 선 젊은 닉의 과도기적 면모가 엿보인다. 마치 새로운 집 베를린에서 고통스러운 과거와의 단절을 꿈꾸는 듯, 이 시기의 닉 케이브는 고유의 문법이었던 로커빌리와 블루스에서 가장 멀리 이탈해 있었다.


1985~1986: 과도기의 닉 케이브, 로큰롤에 대한 뒤틀린 헌사
1985년 발매된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2집 앨범, <The Firstborn Is Dead>.


  베를린에서 새롭게 접한 전위 음악에 경도되어 로큰롤과 블루스로부터 벗어난 포스트 펑크 음악을 펼쳤던 닉 케이브.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자산은 역시나 미국 남부의 로커빌리와 블루스 음악이었다. 포스트 펑크 실험을 통해 성공적 솔로 데뷔를 이룬 닉 케이브의 눈 앞에는, 베를린에서 새로이 접한 포스트 펑크와 아방가르드, 그리고 닉 케이브 자신의 로커빌리와 블루스적 뿌리 사이에서 고유의 음악적 정체성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펼쳐졌다.


  어린 시절의 닉 케이브는 로큰롤과 블루스를 들으며 여러 록 스타들과 블루스맨들을 우상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종에 따라 나뉘어 소비되던 흑인들의 블루스와 백인들의 컨트리를 융합시킨 최초의 록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있었다. 닉 케이브는 미국 남부의 블루스와 로큰롤 문화, 그리고 로큰롤의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았던 엘비스 프레슬리에 '미쳐 있었다'. <From Her to Eternity>의 성공적인 포스트 펑크 실험 이후, 닉 케이브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로큰롤-블루스 문화를 포스트 펑크의 문법으로 재해석해보자는 구상을 시작한다.


  베를린 한자 스튜디오에서의 작업 끝에 1985년 발매된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2집 앨범 <The Firstborn Is Dead(첫째는 죽었다!)>는, 출산 도중 사망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앨범의 콘셉트는 영웅담과도 같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설화들을 닉 케이브 특유의 간담 서늘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풀어내는 것으로 정해졌다.


<The Firstborn Is Dead>의 수록곡 "Tupelo"의 뮤직 비디오.


  가령 이 앨범의 수록곡 "Tupelo"는, 미국 남부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엘비스의 고향 마을 투펠로에 관한 노래다. 이 곡은 블루스맨 존 리 후커의 곡 "Tupelo"의 영향을 받았는데, 존 리 후커의 "Tupelo"는 투펠로에서 벌어지는 홍수에 관한 것이다. 닉 케이브의 "Tupelo"는 존 리 후커의 콘셉트를 가져오며, 동시에 을씨년스러운 투펠로에서 탄생하는 엘비스와 나사렛의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겹쳐 보이고 있다.


  <The Firstborn Is Dead>는 로큰롤의 탄생을 닉 케이브의 광기와 포스트 펑크로 노래하는 로큰롤의 신약 성경이었다. 로큰롤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닉 케이브 음악 고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식은, 이듬해에 발매된 3집 앨범 <Kicking Against the Pricks>를 통해 극대화된다. 이 앨범은 닉 케이브가 존경하던 로큰롤과 블루스 뮤지션들, 가령 존 리 후커와 조니 캐쉬, 지미 헨드릭스와 루 리드 등의 노래들을 닉 케이브 특유의 연극적, 위악적 감각과 포스트 펑크 문법으로 다시 부른 것이었다.


1986~1989: 닉 케이브식 고딕의 완성, 그리고 <베를린 천사의 시>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 출연한 닉 케이브와 그의 밴드.

  

  포스트 펑크와 아방가르드의 실험, 그리고 로큰롤과 블루스적 뿌리 사이에서 음악적 고민을 이어가던 닉 케이브는, 그 둘 사이에서 찾은 타협점을 기반으로 전진하는 자신 고유의 문법을 점차 완성해나가게 된다. 1986년에 발매된 4집 앨범 <Your Funeral... My Trial>에서 닉 케이브는 오르간, 피아노와 같은 다채로운 악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포스트 펑크의 전위적 감각과 사이코빌리의 광기를 잃지 않되 블루스의 고독이 오롯이 녹아든 장중한 고딕 발라드를 선보였다.


<Your Funeral... My Trial>의 수록곡 "The Carny"


  이 무렵 베를린의 언더그라운드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가던 닉 케이브는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눈에 띄게 되는데, 덕분에 그는 1987년 빔 벤더스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출연하게 된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베를린 시민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을 관망하지만 결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던 천사가, 천사에서 인간으로 '적강'하며 사람으로서의 삶과 감정, 그리고 사랑을 찾아가는 로드 무비다. 어느 비련한 서커스 댄서 주변을 배회하며 그와 사랑에 빠진 천사는, 사람이 되어 진정한 삶을 되찾고 연인과 대면하게 된다. 이 둘이 만나는 공간이,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공연장이다. 닉 케이브는 "The Carny"와 "From Her to Eternity"를 부르며, 이들의 재회를 강렬하게 장식한다. 빔 벤더스와 닉 케이브의 팬으로 이들을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인 박정대가 시집 『그녀에서 영원까지』를 낸 것은, 아무래도 <베를린 천사의 시>의 이 장면에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From Her to Eternity"를 선보이는 닉 케이브. "그녀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라 주저하지만 노래를 부른다.


  이 무렵 연기를 비롯, 첫 시집 『King Ink』(1988, 이 제목은 버스데이 파티 시절의 노래에서 가져온 것이다)와 첫 영화 극본을 선보이며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우던 닉 케이브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완성해간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출연 이후 영화에서 얻은 이미지들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5집 앨범 <Tender Prey>(1988)는, 닉 케이브의 고민과 창작적 역량이 집중되어 완성된 형태의 고딕 미학으로 드러난 그의 최고작이다. 오케스트라와 여러 악기를 동원해 장중하게 구축한 숭고미, 기독교적 알레고리들의 활용, 성과 속을 넘나드는 인간을 묘사하며 풀어놓는 폭력과 정동에 관한 성찰, 그리고 포스트 펑크와 블루스 문법 사이의 완벽한 균형이 이 앨범을 빛나게 한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오롯한 형태로 구축된 닉 케이브의 고딕 미학은, 우리 감정의 기저에서 스토커처럼 불편하게 배회하는 사악한 흑백의 이미지를 통해 폭력적 고독의 근원을 고발한다.


  이 앨범의 첫 번째 트랙 "The Mercy Seat"은 닉 케이브 서사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다. 전기 의자에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의 이야기를 천국에서의 심판에 빗대며 나아가는 이 노래는, 자기의 원죄와 주어진 벌을 향해 담대하게 전진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기 확신의 부재로 인해 방황하다 무너지는 자아를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The Mercy Seat"의 뮤직 비디오.


1989~1996: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끝없는 여정
브라질 시절의 닉 케이브.


  빔 벤더스 영화에의 출연과 <Tender Prey>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에게 자기의 이름을 각인시킨 닉 케이브는, 브라질 출신의 저널리스트 비비안 카네이로와 갑작스러운 사랑에 빠져 상 파울로로 홀연듯 이주한다. 지난 시절 좌절된 충동에 대한 원한 감정과 절망을 쥐어 짜내는 음악을 하며 소진되었던 닉 케이브는, 새로이 도착한 브라질에서 건강한 자아의 회복을 모색하며 아픔 너머의 사랑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브라질에 도착한 뒤 느낀 여유로운 열대의 분위기는, 닉 케이브가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감정들이 결합하던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좀 더 담담하고 우울하지 않은 창작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브라질에서의 경험은 90년대 초에 발매된 네 장의 앨범, <The Good Son>(1990), <Henry's Dream>(1992), 라이브 앨범 <Live Seeds>(1993), 그리고 중기 닉 케이브의 최고작 <Let Love In>(1994)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이 앨범들에서는, 이전보다는 힘을 빼고 완급을 조절하며 성숙해진 음악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닉 케이브는 남은 커리어를 함께할 중요한 동료들인 워렌 엘리스, 콘웨이 새비지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한다.


통곡에 관한 성찰과 극복을 노래한 <The Good Son>의 수록곡 "The Weeping Song". 블릭사 에르겔드와의 듀엣곡이다.


브라질의 풍경과 사랑에 관한 고민들을 담은, <Let Love In>의 수록곡 "Do You Love Me?".


  이 시기 닉 케이브는 상업적으로도 성공 가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닉 케이브의 사랑은 그의 정동적 성격 탓인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는 실연과 환멸을 맛보며 브라질을 떠나 영국으로 향한다. 영국에서 닉 케이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사랑이었는데, 바로 영국의 전설적인 인디 포크-얼터너티브 싱어송라이터 PJ 하비와의 로맨스였다. 1996년, PJ 하비와 닉 케이브는 짧지만 격정적이었던, 그리고 서로에게 많은 상흔을 남긴 4개월 간의 결혼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나온 닉 케이브의 앨범이 바로 <Murder Ballads>다.


<Murder Ballads>의 수록곡 "Henry Lee". PJ 하비와 함께 했다.


닉 케이브의 음악 인생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했던 <Murder Ballads>의 싱글 "Where the Wild Roses Grow". 팝 디바 카일리 미노그와 함께 했다.


  80년대의 닉 케이브는 광기와 충동적 기질로 가득 찬 음악을 했고, 그래서 대중을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이 시기 닉 케이브의 음악에서는 이를 성숙히 털어내고 무덤덤해진 스타일이 눈에 띈다. <Murder Ballads>에서 닉 케이브는 과거와는 다르게 재즈와 블루스에 의존한 이지 리스닝(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재즈 풍의 팝 음악) 류의 발라드를 선보였고, 그래서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Murder Ballads>가 낭만적이고 달곰씁쓸한 로맨스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에 급급하기만 한 앨범은 아니었는데, 가령 "Henry Lee"의 뮤직 비디오는 아련한 사랑에 빠진 PJ 하비와 닉 케이브의 서로를 향한 시선을 보여주지만 이들은 이와 동시에 바람 난 애인 '헨리 리'를 나이프로 끔찍하게 살해한 여인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두 가지의 상이한 이미지가 표류하다 결국은 접점을 찾는 지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관계의 필멸성은 물론이고, 닉 케이브와 PJ 하비의 로맨스가 맞이할 파국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1996~2012: 아픔 너머로 나아가며
불혹을 맞이한 97년의 닉 케이브.


  비비안 카네이로 그리고 PJ 하비와의 결별은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던 닉 케이브를 다시금 끝없는 고독의 밑바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한동안 심각한 알콜 중독과 헤로인 중독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자기의 이별들을, 자신의 걸어온 삶의 궤적을 반추해야만 했다.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과거를 딛고 남은 생을 향해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닉 케이브는 쳇바퀴와도 같은 파국적 관계들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PJ 하비와의 이별을 돌아보는 자전적 앨범 <The Boatman's Call>이 완성된다.


<The Boatman's Call>의 첫 번째 트랙이자 싱글, "Into My Arms"의 뮤직 비디오.


  <The Boatman's Call>에서 닉 케이브는 작위적이고 거추장스러운 음악적 장식들을 모조리 배제한다. 여기에서 닉 케이브는 포스트 펑크와 완전히 결별하고 피아노와 바리톤 보컬 중심의 단출하고 묵직한 블루스를 구사하는데, 이는 마치 <Closing Time>(1973)을 위시한 톰 웨이츠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킨다.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격정적 감정을 절제하고 쓸쓸하고 담담하게 노래하는 닉 케이브의 스타일은 이후의 앨범들로 이어지는데, 2000년대 초반에 발매된 세 장의 앨범들, <No More Shell We Part>(2001), <Nocturama>(2003) 그리고 <Abattoir Blues/The Lyre of Orphenus>(2004)는 음악을 통한 자기 치유를 도모하고자 했던 닉 케이브의 욕망을 잘 드러낸다. 이 시기의 닉 케이브는 꽤나 자기 복제적인 음악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성도 높은 작가주의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닉 케이브가 회복기에 결성한 밴드 그라인더맨. 그의 오랜 동료 워렌 앨리스(제일 왼쪽)와 함께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생의 상처들을 천천히 극복해 간 닉 케이브. 회복기를 가지던 그는 새로운 연인 수지 빅을 만나 결혼하며 공동체와 연대로서의 가족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한 편으로 그는 워렌 앨리스와 함께 영화 음악을 작업하기도 하고, 밴드 그라인더맨을 결성해 원초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개러지 록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라인더맨에서 가볍게 시작했던 단순한 개러지 록 스타일은, 닉 케이브의 14집 앨범 <Dig, Lazarus, Dig!!!>(2008)의 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한 편으로 이 시기에 그는 영국의 브라이튼에 머무르며 소설 『버니 먼로의 죽음』(2009)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가족을 무너트린 난봉꾼이자 영악한 세일즈맨으로 모두에게 신뢰받지 못하지만 아들에게만은 영웅이고자 했던 버니 먼로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Dig, Lazarus, Dig!!!>의 타이틀 트랙 뮤직 비디오. 2000년대 말의 닉 케이브는 이상한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2012~present: 초연한 노인이 된 닉 케이브의 현재
2019년의 닉 케이브, <Ghosteen>을 작업하며.

  

  오랜 세월 삶의 시련을 이겨내며, 자기 객관화를 통해 생의 과오를 돌아보고 건강한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된 닉 케이브. 환갑을 넘긴 그는 이제 그 숱한 상실과 고통들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이를 메타적 위치에서 관망하고,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들을 위로한다. 닉 케이브가 발매한 세 장의 연작 앨범, <Push the Sky Away>(2013), <Skeleton Tree>(2016), 그리고 그의 현재를 상징하는 명반 <Ghosteen>(2019)에서는 초연해진 노인 닉 케이브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닉 케이브 음악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죽음과도 같은 절대적 계기로 인해 관계를 잃고 혼자되는 사람들과의 연대, 공감으로서의 슬픔, 그리고 상실 너머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닉 케이브는 현악기들과 앰비언트 전자악기들로 서정을 빚어내고, 그 위에 자기의 처연한 목소리를 얹어 장중하고도 명상적인 공간감을 만들어 간다.


19년 10월에 공개된 닉 케이브의 앨범 <Ghosteen> 글로벌 프리미어. 앨범 전체를 들을 수 있다.


  <Skeleton Tree> 앨범 작업에 매진하던 2015년, 닉 케이브는 사고로 자신의 아들을 잃는 비극적 경험을 하게 된다. 2018년에는 닉 케이브의 오랜 음악적 동지였던 콘웨이 새비지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닉 케이브는 더 이상 하나의 개인으로서 비극에 매몰되지 않고자 했고, 상실을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이고도 공통된 경험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부모와 아이들, 그리고 표류하는 영혼들의 이름을 담담히, 그리고 이다지도 먹먹하게 호명한다. 인류의 모든 시련은 호명될 수 없음으로부터 출발하기에, 어쩌면 호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연대가 될 수 있다.


<Skeleton Tree>의 오프닝 트랙, “Jesus Alone”.


왜 나는 닉 케이브를 사랑하는가


  나는 닉 케이브를 끔찍이도 증오하고 또 사랑한다. 강박적이고 폭력적인 우울과 고립 속에서 뒤틀린 자의식을 가지게 된 그는, 언뜻 보기에 지독히도 불쾌하고 역겨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아 있고 또 전진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의 르상티망을 처절한 표현을 통해 해소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일 테다. 음악으로, 영화로, 또 문학으로... 마치 비트 문학처럼 아픔을 마시고 토해내는 삶의 반복 속에서, 고통에 대한 닉 케이브의 인식은 개인적인 것에서 점차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되어갔고, 이제 그는 자기 치유의 경험을 토대로 타인의 고통에 연대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모든 우울한 예술가들에게도 어떠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음을 본다. 나는 그래서, 닉 케이브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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