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날아온 퀴어 록 스타, 그의 페르소나들과 아방가르드적 삶
많은 이들은 데이비드 보위를 글램 록 스타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살아오고 또 지향하던 예술가적 삶은, 단순히 '록 스타'라는 이미지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무대 위의 자신을 가수가 아닌 '연기자'로 여겼던 보위는, 다채롭고 급진적인 하위 문화와 키치들을 포착해 입체적인 '페르소나'와 이미지의 형태로 조합하고 재전유하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대중과 매개했다. 이 글은 데이비드 보위의 예술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을 위해, 그의 생애를 따라가보며 보위의 문법을 다루어 보는 '데이비드 보위 사용 설명서'다.
들어가며: 데이비드 보위는 누구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스타." - 롤링 스톤.
"20세기 대중음악, 예술, 문화에서 최고의 커리어 중 하나." - 데일리 텔레그래프.
"제가 여기서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루하지는 않을 거란 걸 약속드리죠!" - 데이비드 보위.
20세기 대중문화와 예술 시장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예술가 데이비드 보위. 대중은 그를 언제나 변화를 추구했던 카멜레온 같은 뮤지션으로, 천재적 감각을 지닌 배우이자 패션 아이콘으로, 그리고 사회적 실천에 주저하지 않았던 지성으로 기억하고 있다. 공상과학적 세계관이 선사하는 신비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 위에서 피어나는 고독과 경계인적 혼란 따위의 이미지들이 경합하는 보위의 음악은, 그가 처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알렸던 196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일관된 파장을 선사해 왔다.
믹 재거 그리고 마크 볼란과 같은 영국의 록 스타들이 처음으로 등장하던 시기, 그들을 동경하며 대중음악산업에 발을 내디뎠던 젊은 소년 데이비드 존스. 단촐한 기타와 밴드 사운드를 중심으로 당대의 로큰롤 음악을 흉내내며 꿈을 키워갔던 이 풋내기는, 텍사스의 개척자 제임스 보위로부터 빌려온 이름 '데이비드 보위'라는 이름으로 무대 위에 서며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는 예술가로 성장해 간다. 하위문화로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해오던 거의 모든 실험 음악들의 징후를 포착하고, 이 흐름에 개입하며 주류화하는 데 공헌한 데이비드 보위. 그는 아방가르드 포크부터 글램 록, 솔(소울)과 디스코, 뉴 웨이브, 일렉트로니카, 인더스트리얼, 재즈와 얼터너티브에 이르는 폭넓은 장르들을 자기의 문법으로 삼아 왔다. 시대의 반문화로 표상되던 숱한 록 스타들이 하나의 제도가 되며 진보를 멈추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가는 사이에도, 보위는 임종 직전까지 아방가르드와 미래적 예술의 상에 관해 치열히 고민해 왔다.
1947~1967: 데이비드 존스, 데이비드 보위가 되다
1947년 런던의 브릭스턴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존스. 리틀 리처드와 척 베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최초의 로큰롤 스타들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그는, 특이하게도 예술 교육과 학생들의 창의적 잠재력을 중요시하던 브롬리 기술 고등학교(Bromley Technical High School)에서 디자인, 음악 따위를 공부하며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을 키워 갔다. 이 무렵 존스는 훗날 거물 기타리스트로 성장하는 피터 프램턴과 같이 학교를 다니며 그의 아버지인 예술 교사 오웬 프램턴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이복 형 테리 번스로부터 소개 받은 재즈 음악들을 열심히 연구하기도 했다. 한편 테리 번스는 조현병을 앓고 있었는데, 존스는 그와 함께 생활하며 인간의 다면적인 자아에 관한 깊은 고민을 이어갔고 이는 훗날 그가 시도하는 다양한 '페르소나'들의 토대가 된다. 여담이지만 그의 상징이 된 '오드 아이'도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 때문에 가지게 된 것인데, 동급생 조지 언더우드와 연애와 관련된 문제로 주먹다짐을 하던 존스가 잘못하다 눈을 다쳐버리고 만 것. 하지만 언더우드는 곧 존스와 화해하게 되었고, 이후 데이비드 존스가 보위라는 이름으로 대중음악시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앨범 커버 디자인을 도와주기도 했다.
1962년, 데이비드 존스는 15살의 나이에 콘라드라는 스쿨 밴드에 몸 담으며 뮤지션으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던 존스는 곧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은 팝 스타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해버렸다. 이후 이런 저런 무명 밴드를 전전하던 존스는 어렵사리 매니지먼트 계약을 따내고 자신의 데뷔곡인 "Liza Jane"을 발매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이 시기의 데이비드 존스는 50년대에 유행하던 리듬 앤 블루스나 로큰롤 음악의 클리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스스로도 이를 불만족스럽게 여겼다.
심지어 데이비드 존스는 당대의 팝 아이돌 몽키스의 멤버였던 데이비 존스와 이름이 겹치는 바람에 대중이 혼란스러워 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고, 1966년부터는 결국 텍사스의 개척자였던 제임스 보위의 이름을 빌려 '데이비드 보위'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 이 무렵 보위는 영국의 거대 음반사 데카를 통해 자신의 첫 데뷔 앨범 <David Bowie>(1967)를 발매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나 결과는 실패였다. 비틀즈가 <Rubber Soul>(1965)이나 <Revolver>(1966)같은 앨범들을 통해 유행시키던 바로크 팝과 사이키델릭 문법을 복제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 것.
1967~1970: "Space Oddity", 위대한 여정의 시작
계속되는 무명 생활에 낙담하던 보위는, 무용가이자 배우로 당시 보위의 애인이었던 린제이 켐프의 영향을 받았고, 한동안 마임과 아방가르드 희극에 매료되어 연기 공부에 매진했다. 음악을 쉬고 있던 도중에도 티 렉스의 마크 볼란 같은 뮤지션들과 꾸준히 교류하던 보위는, 대안적 예술 생산을 지향하는 사회 운동 '아트 랩(Arts Lab)'에 투신하며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스스로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갔다. 아무래도, 보위는 이 시기 뮤지션과 아티스트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며 다시금 창작욕을 불태울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 편으로, 이 시기 보위는 새롭게 만난 연인 안젤라(앤지) 바넷과 비독점 관계를 전제로 결혼하며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우주 여행을 다룬 스탠리 큐브릭의 공상 과학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가 흥행하고 미국이 달에 우주선을 쏘아 보내는 아폴로 11호 계획을 준비하며 지구 바깥의 세계에 관한 인류의 호기심과 갈망이 피어 오르던 시기, 데이비드 보위는 이러한 인상들에 영향 받은 포크 송 "Space Oddity"(1969)를 쓰게 된다.
"Space Oddity"는 데이비드 보위가 처음으로 자신의 창작 역량을 만천하에 보여준 순간이었다. 어쿠스틱 기타 한 대와 보위의 목소리로만 쓰여진 포크 송의 단촐하고 서정적인 토대 위에 명멸하는 오케스트레이션과 전자 악기의 색채를 덧입히며 구축된 몽환은, 당대에 오직 보위만이 선보일 수 있는 문법이었다. 벅차오르는 설렘 속에 우주 여행을 시작한 비행사 '톰 소령'이, 광활한 암흑의 우주 공간 속에서 세상과 단절되며 경험하는 고독을 노래하는 서사 역시도 그러했다.
"Space Oddity"는 발매 직후 영국 차트 5위를 차지했지만, 이 곡이 실린 포크 성향의 2집 앨범 <David Bowie>(1969)는 여전히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앨범은 히피 문화에서 다루는 사랑과 평화에 관한 고찰을 담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하드 록 열풍에 밀려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곡의 독창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영국 작가-작곡가 학회(British Academy of Songwriters, Composers and Authors)에서는 이보르 노벨로 상을 이 곡에 수여했고, 이 시기 보위가 시도했던 음악은 앞으로 그가 선보일 실험적인 포크 음악의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한 편, "Space Oddity"는 보위가 유명해진 이후에도 꾸준히 재발매되어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편 마크 볼란, 그리고 아트 랩 운동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술가들을 만나던 보위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게 될 베이시스트이자 천재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 그리고 기타리스트 믹 론슨을 만나게 된다. 이들을 통해 새로운 밴드 사운드를 실험할 수 있게 된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이 기존에 해 오던 몽환적인 포크 위에 하드 록의 묵직한 질감을 결합한 3집 <The Man Who Sold the World>(1970)를 선보인다. 조현병과 편집증, 환각과 같은 정신증을 통해 경험한 혼란을 노래하는 이 앨범도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맛보지는 못했지만, 이후 보위가 정립해 나갈 창작 방식인 '페르소나'들의 구축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한 편으로 이 앨범은 후배 록 뮤지션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가령 타이틀 곡 "The Man Who Sold the World"는 이후 너바나가 즐겨 부르며 더욱 유명해졌다.
1970~1972: <Hunky Dory>와 키치의 미학, 보위식 아방가르드 포크의 정점
보위는 <The Man Who Sold the World>의 계약 문제로 이런 저런 다툼에 시달리며 지쳐가고 있었다. 이 시기 그는 미국,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대안적 예술생산의 공간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맨해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성 생산품들의 이미지를 복제해 전시하는 새롭고 해체적인 방식의 회화를 시도하던 앤디 워홀, 그리고 그와의 교류와 후원 속에서 단순성과 소음의 배합을 통한 실험 음악을 추구해가던 초기 펑크 운동들이 보위의 눈에 들어왔다. 미술에 질렸던 앤디 워홀이 영화 산업과 대중음악산업에 관심을 돌리며 발굴해 낸 뉴욕의 아방가르드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야수와도 같은 정동적이고도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좌중을 압도했던 프로토(초기) 펑크 밴드 스투지스와 MC5가 대표적이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유 시인 루 리드가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횡단하고 이를 전시하는 방식, 그리고 스투지스의 리더 이기 팝이 관중을 날 것의 카리스마로 조롱하고 압도하는 광경에 감명을 받았다. 이들을 통해 얻은 결론은 자명했다. 무대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며 청각을 매질로만 대중과 소통하는 공간이 아니다. 무대는 청각, 시각, 공감각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흩날리는 이미지들의 전시장이며, 그러한 이미지들의 조각조각들을 설득력 있게 아우르는 하나의 '배역'으로 구성해내고 이를 보여주는 것이 무대 위의 예술가다. 이 무렵부터, 데이비드 보위는 무대 위에서 하나의 서사를 가진 연극적 자아, 즉 '페르소나'를 어떻게 만들어 갈 지에 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71년 초 미국으로 홍보 투어를 다녀온 데이비드 보위는, 앤디 워홀, 밥 딜런, 루 리드와 이기 팝을 직접 만나보고서 이러한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이윽고 보위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구상하며 이것의 서사를 구성할 곡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데이비드 보위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루 리드의 실험법에 특히나 매료되어 있었다. 보위는 포크 록의 따뜻하고 단순한 작곡과 악기 구성 위에 시문학을 결합하는가 하면(이는 밥 딜런이 시도했던 것과도 유사하다), 이것들 위에서 난데 없는 소음들을 경합시키는 루 리드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그는 여기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시한 바로크 팝의 다채로운 감각과 공간감을 더해 가며 앨범 <Hunky Dory>(1971)를 완성했다. 이전까지 여러 음반사를 전전하며 고생했던 데이비드 보위가,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음반사 RCA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앨범이었다.
우주에 관한 공상과학적 상상,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적 상상, 전위적 문화예술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 찬 <Hunky Dory>는 이후 데이비드 보위가 정립할 페르소나 '지기 스타더스트'의 징후를 보여 주었다. 이후 끊임없이 변모하게 될 보위의 자아를 암시하는 듯한 오프닝 트랙 "Changes", 오컬트 신봉자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니체의 초인에게서 받은 모티프를 비틀즈 풍으로 정갈하게 풀어낸 피아노 팝 "Oh! You Pretty Things", 인류가 상상한 화성에서의 삶을 노래하며, 이후 '화성에서 날아온 록 스타'라는 설정의 페르소나 '지기 스타더스트'의 등장을 예견하는 "Life on Mars?", 앨범 작업 중에 태어난 아들 던컨 존스에게 바치는 곡 "Kooks", 그리고 미국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인상을 노래한 "Andy Warhol"(그러나 앤디 워홀은 자신에게 바쳐진 이 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과 "Song for Bob Dylan"까지... <Hunky Dory>는 보위의 생동하며 재기 넘치는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앨범은 발매 직후에는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이후 보위가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성공하며 그의 명작으로 재조명을 받게 된다.
한 편으로 <Hunky Dory>는 무명으로 잊힐 뻔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의 스타일을 처음으로 재조명한 음반이기도 했는데, 보위는 단순히 음악을 통해 루 리드를 언급하고 모방하는 것을 넘어, 앤디 워홀과의 결별 이후 몰락의 늪에 빠져 고향으로 낙향한 루 리드의 재기를 도와주기도 했다. 루 리드는 데이비드 보위와 그의 기타리스트 믹 론슨의 프로듀싱을 통해 1972년 솔로 데뷔 앨범 <Transformer>를 발매하게 되는데, 앨범 제작을 책임진 보위의 입김이 강력히 들어간 <Transformer>는 <Hunky Dory>와 유사한 포크 스타일 위에 루 리드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입힌 글램 록 앨범이었다. 루 리드는 보위의 든든한 후원 속에 앨범과 "Walk on the Wild Side", "Perfect Day" 같은 곡들을 흥행시키며 대중음악시장으로의 화려한 복귀를 알릴 수 있었다.
1972~1974: '지기 스타더스트', 섹슈얼리티에 관한 성찰과 관능미로 무장한 보위의 첫 번째 페르소나
시간이 지나며, 보위는 "Space Oddity"나 "Life on Mars?"를 통해 보여주었던 우주에 관한 공상과학적 상상들을 어떠한 서사와 이를 관통하는 '인격'으로 구축해보자는 욕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 고민 속에서 보위는 자신의 첫 번째 페르소나, '지기 스타더스트'를 완성한다. 그리고 '지기 스타더스트'의 일대기를 풀어낸 록 오페라,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1972)의 작업에 착수한다.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는 일종의 연극, 혹은 오페라의 형식을 따라가며 가공의 인물 '지기 스타더스트'의 삶을 묘사한다. 지기 스타더스트는 안드로진 바이섹슈얼 록 스타다. 화성에서 태어난 지기 스타더스트는, 세계의 멸망을 막는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밴드 '스파이더 포럼 마스'와 함께 지구로 날아오게 된다. 열정적인 공연을 통해 지구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 지기 스타더스트는, 마치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시민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설파하고 다닌다. 그러던 지기는, 자신이 얻은 명성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안드로진 바이섹슈얼이라는 설정의 페르소나 지기 스타더스트는, 비가시화되고 탄압 받던 당대의 퀴어 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왔다. 사회적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안드로진 지기는, 고정된 성 역할로부터 이탈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분장 '드랙'을 거의 최초로 주류 문화시장에 선보였다. 붉은 장발 가발과 화려한 화장, 중성적인 코스튬을 통해 구축된 생경하면서도 화려한 지기의 캐릭터, 기타와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등의 충격적인 퍼포먼스는 대중에게 논쟁적 충격을 선사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보수적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던 지기 스타더스트의 공연은, 전위적 퍼포먼스를 앞세우는 장르 글램 록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고, 이후 <Ziggy Stardust>는 마크 볼란이 이끌던 밴드 티 렉스의 2집 <Electric Warrior>(1971)과 함께 글램 록의 물꼬를 턴 선구자적인 앨범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지기 스타더스트의 이미지는, 이후 글램 록 스타의 삶을 다룬 영화 <벨벳 골드마인>(1988)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가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자아를 통해 선보인 음악은 대중에게 파격을 선사했고, 이를 통해 그는 생전 처음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앨범의 싱글 "Starman"은 영국 차트 10위, 미국 빌보드 차트 65위라는 성적을 기록했고, 앨범은 영국 차트 5위라는 성적을 얻어내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으로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의 서사를 관통하는 곡 "Ziggy Stardust", 여성 참정권 운동의 급진적 인상을 가져와 이를 섹슈얼리티에 관한 전위적 고민으로 재전유하는 "Suffragette City", 그리고 "Moonage Daydream" 같은 곡들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보위는, '미국을 정복하러 연주 여행을 떠난 지기 스타더스트와 스파이더스 포럼 마스'라는 컨셉으로 앨범 <Aladdin Sane>(1973)과 커버 곡들을 녹음한 앨범 <Pin Ups>(1973)을 발매한다.
미국 투어 도중에 <Aladdin Sane>을 작업한 보위는, 전작의 경향을 이어가며 흥행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The Jean Genie", "Drive-In Saturday" 같은 수록곡들이 미국 라디오의 전파를 탔고, 앨범은 첫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차트 17위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시기 고된 투어 일정을 따라가던 보위는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가공의 페르소나와 스스로의 자아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지기라는 자아에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해가던 보위는 자신과 지기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기감을 느낀 보위는, 1973년 런던의 해머스미스 오데온 공연에서 갑작스런 지기의 은퇴와 죽음, 그리고 밴드 스파이더스 포럼 마스의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믹 론슨을 비롯한 밴드의 멤버들조차 미리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74년 보위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뉴욕에 잠시 머물던 보위는 곧 LA에 정착하는데, 밴드가 해체되고 믹 론슨을 비롯한 동료들이 떠난 이 시기의 보위는 음악 작업을 거의 혼자서 수행해야만 했다. 당시 그는 조지 오웰의 작품 <1984>가 선사하는 세기말적,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매료되어 있었고, 소설을 토대로 록 오페라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유족의 반발로 성사될 수 없었다. 결국 보위는 <1984>가 지시하는 인상과 이미지들을 적당히 차용해오는 선에서, 세기말적 세계를 살아가는 페르소나 '할로윈 잭'을 구상하고 새로운 글램 록 앨범 <Diamond Dogs>(1974)를 작업했다. 한편 이 시기의 보위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들의 교회 음악과 재즈 음악으로부터 기원하여 블루스 리듬 위에서 노래하는 소울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도 앨범을 작업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서사에서 드러나는 과도한 비장미와 불필요하게 동원된 여러 사족들 때문에 당대 평단의 저평가를 받았음에도, 앨범은 지기 시절의 상업적 성공을 이어갔다. 성별 이분법에 대한 도전을 암시하는 싱글 "Rebel Rebel"을 앞세운 앨범은 영국과 캐나다 차트에서 정상에 올랐고,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도 5위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한편 디스코와 소울 풍의 사운드, 전자 음악의 텍스쳐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1984"와 "Rock n' Roll with Me" 같은 곡들의 경우에는, 앞으로 보위가 시도할 새로운 음악들의 징후를 암시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앨범 발매 이후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는 거대한 투어 공연 'Diamond Dogs Tour'를 시작했다. 무대는 각종 연극적 장치를 동원하여 화려하게 꾸며졌는데, 공연 한 번을 진행하는데 27만 달러의 비용(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140만 달러)을 치루었다고도 한다. 관중은 근사한 퍼포먼스를 앞세운 보위의 무대에 환호했고 투어는 겉보기에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보위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코카인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한 편으로 이전에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를 연기하며 겪었던 디스포리아는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발전했다. 언론은 보위의 사생활과 섹슈얼리티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를 둘러싼 여러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롤링 스톤스의 1973년 곡 "Angie"가, 사실은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가 자신과 불륜 관계에 있었던 앤지 보위를 그리워하며 쓴 곡이다, 혹은 보위가 루 리드 아니면 믹 재거와 연인 관계다... 이 혼란한 시기에 펼쳐진 공연들의 실황은 <David Live>(1974)라는 이름의 앨범으로 발매되었는데, 훗날 보위는 이 시절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무너져 있던 자신을 회상하며, 라이브 앨범의 제목이 "데이비드 보위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오로지 이론 속에서만 살아있습니다"가 되었어야 한다는 사캐즘적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1974~1976: 플라스틱 소울과 '씬 화이트 듀크', 불안과 고독 속에 무너지는 경계인 보위
보위는 74년도의 투어를 시작하기 직전, 솔(소울)과 훵크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작업하던 뉴욕 출신의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알로마를 우연히 만난 바 있었다. 카를로스 알로마는 보위에게 솔과 R&B 음악들을 소개했고, 이것들에 대한 보위의 관심은 솔 음악의 발상지 미국에서 연주 여행을 돌며 점점 커지게 된다.
1974년 7월, 보위는 미국 투어를 잠깐 쉬며 필라델피아에 머물렀다. 당시까지 미국의 대중음악은 인종적 구분에 따라 '흑인 음악'과 백인 위주의 팝 음악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는데, 필라델피아에서는 이 경계를 교차하려는 실험이 시그마 스튜디오라는 곳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마치 일본의 시티 팝이 그랬던 것처럼, 솔과 R&B 음악들에 현악기 등을 동원한 부드러운 색채를 입혀, 도회적 분위기 위에서 듣기 쉬운 음악을 만들어가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솔 음악 특유의 색채를 옅게 만들었다는 의미의 멸칭 '플라스틱 솔', 혹은 '필라델피아 솔'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는데, 필라델피아에 머물며 시그마 스튜디오에 방문한 보위는 플라스틱 솔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윽고 그는, 시그마 스튜디오에서 플라스틱 솔의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앨범 <Young Americans>(1975)를 작업하기에 이른다. 보위 이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던 백인 뮤지션은, 조 카커나 라이쳐스 브라더스와 같은 일부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토니 비스콘티와 카를로스 알로마, R&B 가수 루서 밴드로스 그리고 (그 비틀즈의!) 존 레논의 참여 속에 완성된 앨범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보위와 함께 작업한 존 레논은, 보위가 해오던 글램 록에 대해 "립스틱을 발랐지만 여전히 로큰롤이다"라는 평가를 남겼다나.) 영국에서는 급격하게 변한 보위의 스타일 때문에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존 레논과 공동으로 작곡한 앨범의 싱글 "Fame"은 미국에서 첫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으로 인종 문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은 곡 "Young Americans"도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고, 보위는 영화 <맘마 미아!>(2008)에 출연한 것으로도 유명한 미국의 팝 디바 셰어의 쇼 프로그램에서 앨범의 수록곡들을 그와 함께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 편 이 시기 미국에서 유명세를 얻으며 그래미 시상식의 '최우수 여성 R&B 퍼포먼스' 상 시상자로 나선 보위는, "신사, 숙녀, 그리고 이반 여러분..." 이라는 급진적인 인삿말로, 여전히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횡단하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솔 음악에 영향 받은 공연들로 'Diamond Dogs Tour'의 남은 공연들을 마무리 한 보위는, 자신의 집 LA로 돌아왔다. 이 시기 보위는 더이상 화려한 코스튬을 입거나 가발을 쓰지 않았고, 단정하게 정리된 오렌지 색 머리에 정장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 보위는 자신의 새로운 페르소나, '씬 화이트 듀크'의 등장을 선언했다. 이 페르소나는 이 시기 보위가 주연으로 참여했던 니콜라스 뢰그의 컬트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1976)의 캐릭터 타미와 많은 것들을 공유한다.
가뭄으로 물이 사라진 행성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던 외계인 타미는, 물을 구해 와 행성을 구원하는 임무를 가지고 지구에 떨어진다. 타미는 그가 살던 첨단 문명의 기술들을 이용해 지구에서 떼돈을 번다. 그러나 자본주의 퇴폐문화에 찌들게 된 타미는,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자신의 사업과 재산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다. 타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할 수도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타미의 처지는 당시 보위가 경험하던 일종의 '소외'와도 유사했다. 보위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정작 개인으로서의 '데이비드 존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정신증과 코카인 중독에 시달렸고, 식사는 우유와 피망, 그리고 말보로 담배로 대신했다. 또한 그는, 사회의 성 규범이 요구하는 정상성을 박탈당하는 데서 기인하는 디스포리아를 겪고 있었다. 짐짓 근사하지만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삶이었다. 이 시기 마약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니었던 보위는, 여러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카리스마'와 나치즘, 파시즘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아들 사이에서 구축된 페르소나 '씬 화이트 듀크'는, '듀크(공작)'라는 이름 처럼 귀족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싸구려 카바레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 아니 광대다. 그는 소외적 상황 속에서 삶을 잃어버린 채,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로써 냉소만을 반복했다. 한 편 훗날의 보위는, 씬 화이트 듀크의 서사를 확립시킨 곡 "Station to Station"을 언급하며 이것이 "미국에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유럽인의 이야기"라 밝힌 바 있다.
데이비드 보위는 LA에 머물며 10집 앨범 <Station to Station>(1976)을 작업했다. 이 시기 보위는 전자악기를 동원하여 이런 저런 실험을 벌이던 독일 음악 크라우트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영향 탓인지 <Station to Station>에서는 이전의 보위가 시도했던 소울의 색채와 전자음악의 색채가 경합을 이룬다. 예컨대 앨범의 타이틀 곡 "Station to Station"나, 이기 팝이 환각에 취한 채 보위의 집에 머물다가 텔레비전에서 튀어나온 귀신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쓰인 "TVC15"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장대하고 변칙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하지만 "Stay"에서는 훵크 음악의 그루브를 차용한 기타 사운드가 전적으로 드러나고, 앨범의 리드 싱글 "Golden Years"나 "Wild Is the Wind"는 보위의 전작 <Young Americans>의 연장선상에 있다.
솔에서 실험적인 전자 음악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발매된 과도기적 성격의 앨범 <Station to Station>은 다채로운 음악적 색채를 뽐내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카를로스 알로마, 그리고 이후에 영국의 신화적인 프로그레시브 밴드 킹 크림슨에 합류하는 기타리스트 에이드리언 벨류와 함께 한 'Isolar - 1976 Tour'에서, 씬 화이트 듀크로 분한 보위는 카리스마를 뽐내며 무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정작 코카인과 암페타민에 찌들어 있던 보위는 <Station to Station>을 작업하던 시절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했고, 이 시기 보위는 삶의 진창 속에 빠져 있었다. 보위는 지옥과도 같은 삶의 배경, 환락에 젖은 도시 LA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데이비드 보위는 요양을 위해, 마약 중독으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창작을 시작하기 위해 유럽으로 홀연듯 사라졌다.
1976~1979: '베를린 트릴로지', 회복을 갈망하며 아방가르드로 나아가다
LA를 떠난 데이비드 보위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스위스였다. 그러나 언론의 관심은 그를 스위스까지 쫓아왔고, 여기에서도 마약 중독 증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위는 밴드 스투지스의 해체 이후 방황하던 친구 이기 팝과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1976년 말, 서베를린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보위에 대한 목격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보위와 이기 팝은, 집을 바로 구하지 못해 잠시동안 에드거 프로스라는 인물의 집에 머물렀다. 에드거 프로스는 크라우트록이라는 장르의 선구자 격인 밴드 탠저린 드림의 리더였는데, 이는 당시 대중에게 새롭게 소개된 만능 전자악기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실험 음악이었다. 이와 교류하던 보위는 전자악기가 선보일 수 있는 창작 문법의 확장성을 진지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크라프트베르크, 애쉬 라 템펠, 노이!, 그리고 캔과 같은 크라우트록 밴드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 에드거 프로스는 보위의 요양을 도우며, 그에게 서베를린의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여기에서 활동하는 전위적인 뮤지션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보위와 이기 팝은 곧 아파트를 마련해 동거를 시작했고, 음악 작업을 진행할 스튜디오도 구했다. '한자'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는 베를린 장벽 바로 근처에 있었고, 이는 보위로 하여금 냉전 체제의 비인간성과 모순을 끊임없이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보위는 작업실에 자신의 오랜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 그리고 실험적인 글램 록 밴드 록시 뮤직 출신의 영국인 뮤지션 브라이언 이노를 초청했다. 브라이언 이노는 록시 뮤직의 리더 브라이언 페리와의 갈등 속에 밴드를 탈퇴한 뒤 전자 음악의 가능성에 집중하며 솔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Discreet Music>(1975) 그리고 이후에 발매되는 <Ambient 1: Music for Airports>(1978)와 같은 혁신적인 작품들을 통해, 공명하는 전자음들의 미니멀리즘적 배치를 통해 텅 빈 공간을 구축해가는 전위 음악 '앰비언트'의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Discreet Music>을 인상깊게 들은 바 있었고, 이노의 혁신적 감각을 자신의 새 음악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크라우트 록 밴드 하모니아와 작업하던 브라이언 이노는, 이를 금방 마무리하고 보위의 스튜디오에 합류한다.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토니 비스콘티, 브라이언 이노라는 아방가르드 음악의 드림 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보위가 한자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작업한 것은, 이기 팝의 솔로 데뷔 앨범 <The Idiot>(1977)이었다. 펑크 록의 단순성 위에 전자 음악의 불협화음을 교차시키는 실험적인 로큰롤 앨범은, 비록 보위가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완성한 앨범 <Low>(1977)보다 몇 달 늦게 발매되었지만 작업은 먼저 이루어졌기에 보위가 앞으로 펼치는 아방가르드 음악들의 징후로 여겨지기도 한다.
LA에 비해 차분하고 조용했던 도시 서베를린에 정착하여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시작한 보위는, 마약 중독의 늪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보위가 작곡을 구상하는 방식도 이전과는 상이하게 변해갔다. 보위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객관적인 위치해서 조망하고, 이를 서사로 풀어가기 시작했다. 다소 정동적이고 내화된 형태를 보였던 보위의 작곡과 스토리텔링은, 추상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보위는 이기 팝의 <The Idiot>의 작업을 끝낸 뒤, 자신의 새 앨범 <Low>도 순식간에 완성해버렸다. 녹음은 1976년 11월에 끝났지만 앨범은 1977년 1월에 되어서야 발매될 수 있었는데, 이는 이전과도 너무나 달라진 보위의 새로운 음악 스타일에 음반사가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보위의 음반사 RCA는 보위가 <Young Americans> 같은 대중적인 앨범들을 계속 만들어주기 바라며 새 앨범의 발매를 거절했지만, 이에 맞서는 보위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그렇게 보위의 11집 <Low>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새 앨범은 왜 발매를 거절당했는지 이해가 될 만큼이나 급진적이고 생경한 음악을 담고 있었다. 앨범의 전반부에서는 과거의 보위를 연상시키는 로큰롤의 색채 위에 전자 악기의 색채를 가볍게 입힌 음악들이 펼쳐졌지만, 후반부에서는 어둡고 공허한 공간 위에 명멸하는 신시사이저의 불협화음을 배치한 앰비언트 연주곡들이 등장했다. "Warzawa"에서 "Art Decade", "Weeping Well"과 "Subterraneans"로 19분 간 이어지는 아방가르드 음악들의 향연은, 로큰롤에 익숙하던 대중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이는 이후 등장할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효시와도 같았다.
보위는 <Low>를 통해 크라우트록과 앰비언트, 아방가르드의 문법으로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보위의 새로운 스타일이 이전의 보위가 해오던 음악들과 모순적으로 충돌하거나 그의 정체성을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보위는 <Low>가 단순한 장르음악 앨범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보위는 전자음악의 실험법을 토대로 가져갔지만, 이것 위에 자신이 지금까지 해오던 로큰롤과 솔의 색채들, 보위 특유의 감각들을 덧입히며 <Low>를 단순한 전자 음악 작품이 아닌 자신만의 음악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이는 <Young Americans> 혹은 <Station to Station>이 가지던 신나는 그루브 위에 공명하는 기계의 소음을 덧입힌 연주곡 "Speed of Life", 그리고 보위의 로큰롤 스타일과 전자음악의 스타일이 경합하는 "Breaking Glass", "Be My Wife" 같은 곡들에서 잘 드러난다. 마치 20년 쯤 뒤의 라디오헤드가 앨범 <Kid A>(2000)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전자 음악들과 포스트록의 문법을 자기들만의 음악으로 재정립했던 것처럼, 보위도 새로운 것을 '보위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줄 아는 예술가였다. 보위가 이 놀라운 앨범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 당황한 평단의 반응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양분되었다. 그러나 이후, <Low>는 보위의 아방가르드 감각이 정점에 달한 역작으로, 또 여타 선구자적인 크라우트 록 뮤지션들과 함께 전자음악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한 편으로 보위의 실험에 감명을 받은 현대 음악의 거장 필립 글래스는, <Low>를 비롯한 보위의 베를린 시절 앨범들을 토대로 교향곡을 쓰기도 했다.
<Low>에서 번뜩이는 실험 정신을 보여준 데이비드 보위는, 이와 비슷한 콘셉트로 다음 앨범의 작업에 착수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나라를 총칼로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을 마주하며 지내던 데이비드 보위는, 냉전의 시대정신을 자신의 새 음악에 담고 싶어했다. 한 편으로 보위의 새 앨범을 함께 작업할 기타리스트를 찾던 브라이언 이노는, 당시 뉴욕에 머물던 킹 크림슨의 리더 로버트 프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노는 "화끈한 로큰롤 기타를 연주해보고 싶지 않느냐"는 제안을 했고, 한동안 음악을 쉬었던 프립은 이에 흥미를 느껴 보위의 베를린 세션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보위의 12집 앨범, <"Heroes">(1977)의 청사진이 그려졌다.
여느날처럼 한자 스튜디오에 머물며 곡을 쓰고 있던 보위는, 창 밖의 베를린 장벽 앞에서 사랑스럽게 서로를 마주하고 키스하는 연인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연인은 보위의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와 그의 애인이었던 포크 가수 메리 홉킨이었다고 한다.) 냉전이 선사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와 긴장이 사랑의 힘 앞에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보위는 여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얻었다. 자신의 음악이 냉전이라는 시대정신을 직시하고자 한다면, 이는 결국 대립과 증오의 힘을 사랑과 인류애로 넘어서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터였다. 그렇게 보위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 될 ""Heroes""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고, 단 하루만이라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노래였다.
베를린에서 작업한 보위의 두 번째 앨범, <"Heroes">는 1977년 10월 발매되었다. 앨범은 <Low>와 유사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령 앨범의 전반부가 "Beauty and the Beast"나 "Joe the Lion"처럼 밝고 대중적인 로큰롤 곡들을 담고 있었다면, 후반부에서는 "Sense of Doubt", "Neuköln"처럼 어둡고 장엄한 앰비언트 음악이 펼쳐졌다. 보위는 앨범 곳곳에 자기에게 영향을 준 크라우트록 뮤지션들에 대한 오마주를 담았다. 가령 앨범명 <"Heroes">는 크라우트록 밴드 노이!의 곡 "Hero"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앨범 후반부에 등장하는 연주곡 "V-2 Schneider"는 밴드 크라프트베르크의 뮤지션 플로리안 슈나이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냉전의 시대정신을 직시했던 발라드 ""Heroes""의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앨범은 당대 평단에게 보위의 베를린 시절 앨범들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음반사 RCA는 당시 새롭게 유행하던 장르 뉴 웨이브를 의식하며, "구닥다리 음악들이 있습니다. 뉴 웨이브라는 음악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데이비드 보위가 있습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만들었다. 뉴 웨이브는 이전까지 유행하던 로큰롤 음악을 극복하는 새로운 경향으로 등장했는데, 펑크 록의 단순성 위에 신시사이저 음악, 월드 뮤직같은 다채로운 장르들의 색채를 입히는 실험법을 내세웠다. 그런데 보위는 음반사 RCA의 주장처럼, 이러한 혁신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모 평론가의 말처럼, 데이비드 보위는 "뉴 웨이브의 뉴 웨이브"였다.
보위는 앨범의 홍보를 위해 'Isolar II World Tour'라는 이름의 연주 여행을 기획했다. 그는 카를로스 알로마 그리고 에이드리언 벨류와 같은 걸출한 세션들과 함께 12개국의 70개 도시를 돌며, 거의 100만에 달하는 관중들을 만났다. 이 무렵 보위는 마약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고, 자신이 코카인에 취하지 않고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이 시절의 훌륭한 공연들은 1978년 <Stage>라는 이름의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된다.
월드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978년에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프로코피예프가 어린이들을 위해 작곡한 교향곡 <피터와 늑대>(1936)를 녹음하는 데에 나레이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보위. 바쁘게 달려온 그는 베를린을 떠났지만, 베를린에서 구축했던 실험음악의 세계관을 세 장의 연결성 있는 앨범들, 즉 '트릴로지'의 형태로 완결해내고 싶어 했다. 보위의 전위적 실험들을 마무리지을 '베를린 트릴로지'의 세 번째 앨범은, 1979년 발매된 보위의 13집 앨범 <Lodger>였다.
보위는 에이드리언 벨류, 브라이언 이노, 토니 비스콘티와 함께 스위스와 뉴욕을 오가며 <Lodger>를 작업했다. 브라이언 이노는 앨범을 작업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우회 전략'이라는 것을 활용했는데, 이는 114장의 카드에 예술가가 작업 중에 부딪히는 문제에 관한 해법들을 적어두고, 그때그때 카드를 뽑아 거기에 적힌 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위와 세션들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다채로운 앨범을 완성해 낼 수 있었다.
급진적인 전자음악을 선보였던 <Low> 그리고 <"Heroes">와 달리, <Lodger>는 기타와 드럼을 토대로, 대중에게 친숙한 로큰롤 사운드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앨범에는 보위만의 실험적 시각과 특색이 조화롭게 녹아들어있다. <"Heroes">를 작업할 때부터 제3세계의 민속 음악들에 관심을 가지던 보위는 이미 이 앨범의 수록곡 "The Secret Life of Arabia"에서 중동 민속 음악에 영향 받은 편곡을 선보인 바 있었는데, <Lodger>에서는 로큰롤 위에 실험적으로 적용된 월드 뮤직의 면모가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African Night Flight"에서는 아프리카 민속 음악에서 사용하던 복잡한 타악기 편성, 즉 '폴리리듬'이 활용되었고, "Yassassin (Turkirish for: Long Live)"에서는 터키 전통 음악의 문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뉴 웨이브와 디스코의 영향을 받은 "D.J.", 신나는 로큰롤 곡 "Boys Keep Swinging"과 "Look Back in Anger", 발라드 "Fantastic Voyage"같은 곡들은 전통적인 보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앨범은 당대에는 시원찮은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부진했지만, 여러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브릿 팝 밴드 블러는 1997년 곡 "M.O.R"에 "Boys Keep Swinging"과 "Fantastic Voyage"의 코드 진행을 차용했고, 오아시스는 그들의 대표곡 "Don't Look Back in Anger"의 제목을 보위의 "Look Back in Anger"에서 따왔다.
1979~1982: 데이비드 보위, 뉴 로맨틱 문화의 최전선에 서다
베를린 시절의 보위는 마약 중독을 이겨내며 본인의 창작 역량과 아방가르드적 감각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가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의 보위는 방송 출연도 거의 없었는데, 행위예술가 클라우스 노미의 속임수(?)에 빠져 <SNL>에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텔레비전에서 보위를 거의 볼 수 없었다. 한 편으로 아내 안젤라 바넷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보위는, 1979년 말 결국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러한 과거들을 뒤로 하고 런던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보위는, 대중에게 어필할 새로운 음악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보위는 런던의 '블리츠'라는 클럽을 우연히 방문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뉴 로맨틱'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는 뮤지션들을 목격했다. 뉴 로맨틱 문화는 1970년 말 영국의 버밍엄과 런던의 지하 클럽들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글램 록에서 선보였던 화려하고 근사한 코스튬과 화장들, 고루한 양성 체계를 무너트리며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자유롭게 횡단하는 퀴어 문화, 그리고 신시사이저를 중심으로 댄서블하고 신나는 음악을 선보이는 신스 팝과 뉴웨이브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요컨대 뉴 로맨틱 문화는 과거 보위가 했던 실험 음악들의 급진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중에의 호소력 역시도 잃지 않고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아직 지하에서만 알음알음 유행하고 있던 뉴 로맨틱 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올 결심을 한다.
토니 비스콘티, 로버트 프립,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 그리고 기타 신시사이저라는 악기를 다루는 뮤지션 척 해머와 함께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작업에 매진한 보위는, 1980년 14집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뉴 로맨틱의 예술적 감각과 통통 튀는 신스 팝 비트가 선사하는 대중성을 겸비한 <Scary Monsters>는, 영국 차트에서 1위를 달성하고 미국에서도 선전하며 보위가 '팝 스타'라는 지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했다. 앨범의 리드 싱글 "Ashes to Ashes"도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에 등극했다. 척 해머가 기타 신시사이저의 소리들을 겹겹이 쌓아가며 완성한 이 곡은, "Space Oddity" 이후로 행방불명된 톰 소령의 후일담과 회한을 다룬다. 뉴 로맨틱 특유의 파스텔 톤 분위기를 구축하기 위해, "Ashes to Ashes"의 뮤직 비디오에는 당대 대중음악의 뮤직 비디오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다.
앨범의 상업적 성공에도 보위는 투어를 돌지 않았는데, 이는 아무래도 당시의 보위가 브로드웨이 연극 <엘리펀트 맨>(1980, 이는 같은 해에 데이비드 린치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에 참여하는 등의 바쁜 일상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팝 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갔고, 1981년에는 밴드 퀸과 함께 부른 "Under Pressure"가 세계적인 유행을 타기도 했다.
1982~1988: 데이비드 보위라는 아이콘
대중음악시장의 보수성과 금기에 도전하며 혁신을 거듭해 온 보위는, 어느덧 자신이 투쟁했던 대중음악시장의 중심에 선 거물이 되어 있었다. 보위는 RCA와의 계약을 끝내고 새로운 음반사 EMI와 계약을 했는데, EMI는 보위를 '사기' 위해 그에게 1750만 달러(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449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였다. 디스코와 뉴 웨이브 열풍이 세계를 휩쓸었던 80년대 초, 데이비드 보위는 이러한 유행의 최전선에 선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보위는 그의 오랜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와 여전히 일을 같이 했지만, 한편으로 디스코 유행의 감각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프로듀서 나일 로저스를 초빙했다. 나일 로저스는 디스코와 훵크 음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밴드 시크의 기타리스트였다. 그리고 보위는, 1982년 스위스 몽트뢰 음악 축제에서 우연히 만났던 텍사스 출신의 천재 블루스 기타리스트 스티비 레이 본을 기용했다. 함께한 이들은 보위가 과거에 흥행시켰던 <Young Americans>의 스타일을 토대로 두고, 뉴 로맨틱과 뉴 웨이브 음악이 가지고 있던 낭만적 인상과 디스코 음악이 가진 역동성을 뒤섞은 음악을 만들어 갔다. 보위는 이 시절 자신의 음악을 돌아보며, '필 콜린스 같은 음악을 했던 때'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필 콜린스는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밴드 제네시스의 드러머였으나, 이후 솔을 기반으로 한 팝과 발라드를 유행시키며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거대한 뮤지션이 된 인물이다.)
그렇게 완성된 보위의 15집 앨범 <Let's Dance>(1983)는, 한편으로는 뻔한 음악을 선보였지만 대중의 취향에 다가가는데는 성공하며 공전의 흥행을 기록했다. 앨범은 영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스티비 레이 본이 기타를 연주한 신나는 타이틀 곡 "Let's Dance"는, 빌보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싱글 차트 맨 꼭대기에 올랐다. 이전에 이기 팝과 보위가 함께 작업했던 앨범 <The Idiot>에 실린 바 있는 "China Girl"(그러나 이 곡은 '옐로 피버'와 동양인 여성에 대한 대상화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Modern Love" 역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Let's Dance"의 가사에서 이름을 따 온 앨범의 홍보 투어, 'Serious Moonlight Tour'도 대성공이었다. 앨범은 그래미 올해의 앨범 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하필이면 같은 해에 마이클 잭슨의 <Thriller>가 발매되는 바람에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위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발언과 실천들이 갖는 사회적인 힘도 무거워지게 되었다. 한때 코카인에 취한 채 파시즘을 두둔하던 보위(이에 격분한 동료 뮤지션들은,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을 중심으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RAR)'이라는 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를 반성하며 나아간 그는, 이제 자신의 영향력을 선한 곳에 쓰고자 했다. 그는 MTV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동료 흑인 뮤지션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힘 쓰기도 했고, 1985년에는 에티오피아의 대기근으로 인한 난민 사태를 해결하고자 개최된 자선 공연 라이브 에이드의 무대에 서기도 했다. 보위는 기금 모금을 돕기 위해, 믹 재거와 함께 "Dancing in the Street"라는 곡을 발매해 수익을 라이브 에이드에 후원하기도 했다. 2년 뒤인 1987년에는 베를린 장벽 앞에서 ""Heroes""를 공연하기도 했는데, 동베를린에까지 울려 퍼진 평화의 노래는, 베를린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장벽을 무너트리는 데에 중요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독일의 통일 이후, 정부는 보위에게 공식적인 감사를 표했다고.
그러나 보위의 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보위가 <Let's Dance>에 뒤이어 발매한 앨범 <Tonight>(1984)과 <Never Let Me Down>(1987)은 <Let's Dance>의 스타일을 지리멸렬하게 답습하며 혹평 세례를 받았다. 한편으로 보위가 출연한 영화 <Absolute Beginner>(1986) 역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실험적인 무대 장치를 동원한 1986년의 'Glass Spider Tour'도, 보위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보위는 어느덧 40대 중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1988~1992: 틴 머신, 초심으로 돌아간 밴드맨 보위
평단의 혹평과 이에 따른 상업적 부진에 보위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팝 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수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결국 보위는 자신의 뿌리였던 로큰롤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기타와 드럼 소리만이 경합하는 단순성의 개러지 록, 직선적인 하드 록 사운드를 통해 재기를 노렸다. 그런데 로큰롤 음악의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밴드'. 1988년 데이비드 보위는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새로운 밴드 틴 머신을 결성했다. 미국의 코미디언 수피 세일즈의 자제들이었던 베이시스트 토니 폭스 세일즈와 드러머 헌트 세일즈, 그리고 기타리스트 리브 가브리엘스가 보위와 함께 의기투합했다. 음악적 구상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세션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과거와는 달리, 틴 머신은 각 멤버들의 아이디어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나누어졌다. 데이비드 보위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함께 했던 기타리스트 케빈 암스트롱도 작업을 도왔다. 그렇게 밴드 틴 머신의 데뷔 앨범 <Tin Machine>이 완성되어 1989년 발매되었고, 우익 이데올로기와 인종주의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을 가하는 곡 "Under the God"이 싱글로 나왔다. 그러나 하드 록은 이제 철 지난 음악이었고, <Tin Machine>은 평단에서도 시장에서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1990년 소말리아 출신의 수퍼모델 이만과 결혼한 보위는 전작과 유사한 경향의 2집 앨범 <Tin Machine II>(1991)를 내놓지만, 이는 전작보다도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미 너무나 성공해버린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는, 새롭게 시작하는 밴드에 조화로이 어울릴 수 없었다. 틴 머신은 결국 1992년 해체 수순을 밟는다.
1992~1998: 데이비드 보위, 세기말의 불안을 직시하다
어느덧 20세기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던 보위의 커리어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90년대 초는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자본주의 체제가 전 지구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시점이었다.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 불확실성이 선사하는 불안은 당대의 문화예술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왜곡된 전자음을 배치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전시하며 파괴적 정동을 선보인 인더스트리얼 음악, 저음의 베이스를 중심으로 몽환과 우울의 세계를 지시하는 인스트루멘틀(연주곡)로 구성된 전자 음악 트립 합 따위가 이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냉소와 절망, 혼란에 사로잡힌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다. 데이비드 린치와 같은 영화 감독들은, 서사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이미지의 파편들을 흩뿌리는 포스트모던적 영화 실험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2년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을 마친 데이비드 보위는, 이만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틴 머신의 해체 이후 앞으로의 진로에 관해 고민하던 그는, 새롭게 주류 문화로 올라선 힙합, 그리고 몽환적인 애시드 재즈를 팝 음악의 토대 위에 적절히 뒤섞은 앨범 <Black Tie White Noise>(1993)를 발매했다. "Jump They Say", "Black Tie White Noise"와 같은 곡들이 싱글로 나왔고, 보위는 즐겁게 작업한 새 결과물들에 만족했다. 그러나 새 앨범에서 보위다운 혁신적 면모와 매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중과 평단은 '이제 보위가 후배들을 어설프게 따라하게 되었다'며 실망했다. 그러나 같은 해 그가 제작에 참여한 BBC 드라마 <The Buddha of Suburbia>의 OST는 실험적인 쿨 재즈 위에 앰비언트의 감각이 뒤섞인 꽤나 진보적인 결과물이었고, 이는 보위가 90년대에 계속해 나갈 전자 음악 실험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한편 보위는 데이비드 린치가 자신이 제작한 드라마 시리즈를 토대로 제작한 영화 <트윈 픽스>(1992)의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는데, 서사의 정합성을 완결성 있게 구축해가던 근대 예술의 방식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오로지 어떤 인상들만이 혼란스럽게 표류하도록 한 린치의 영화예술론 역시도 보위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 같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보위는 신세대 뮤지션들의 실험법들에 점차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새로운 창작적 영감들을 얻기도 했다. 그는 특히 나인 인치 네일스가 선보이는 인더스트리얼의 산란하는 인상들, 리듬 악기들만을 미니멀리즘적으로 배치한 채 질주하는 전자 음악 '드럼 앤 베이스'가 가진 날것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보위 역시도 세기말이라는 불안한 세계 속에 던져진 한 사람의 시민이었고, 이런 음악들은 그가 가진 분열적인 감정들을 가장 빼어나게 보여줄 수 있었다. 보위는 실험적 전자 음악의 거장이었던 그의 오랜 동료 브라이언 이노를 불러 새로운 앨범을 함께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보위의 19집 앨범 <1. Outside>(1995)는, 번뜩이는 상상력이 빚어낸 놀라운 세계관을 보여주며 그를 다시금 현재로 소환해냈다.
<1. Outside>는 혼란스레 종횡하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스토리텔링으로 채워진 콘셉트 앨범이다. 앨범은 동봉된 보위의 단편 소설 <네이선 아들러의 일기, 혹은 베이비 그레이스 블루의 예술 의식 살인사건: 비선형 고딕 드라마>의 서사를 따라 흘러간다. 서사의 배경은 디스토피아적으로 뒤틀린 1999년. 이 세계에서는 살인과 네크로필리아적 행위가 지하 예술계의 새로운 유행으로 유통되고, 정부는 이를 '예술 범죄'라 명명하며 위원회를 조직해 통제하려고 한다. 주인공 네이선 아들러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을 검열하는 사업을 벌이던 인물. 그는 14세의 소녀가 희생된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 사건은 런던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공시성을 가지고 세계의 다른 곳곳에서 동시에 흔적을 남긴다. 캐나다의 온타리오, 미국의 뉴저지, 영국의 런던과 옥스포드가 하나의 공간으로 뒤섞이다가도 분열된다. 지각하게 되는 인상들 중,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시뮬라크르에 포위당한 상황이다. 보위는 <Diamond Dogs>에서 조지 오웰을 인용하며 선보였던 종말론적 세계관을, 다시 한 번, 더욱 진보된 형태로 대중에게 선보이게 된다.
앨범은 데이비드 보위가 오랫동안 그려 왔던 캐릭터 톰 소령에게 작별을 고하는 노래 "Hallo Spaceboy", 그리고 "The Heart Filthy Lesson" 같은 곡들을 싱글로 내놓았다. "Hallo Spaceboy"는 저명한 신스 팝-일렉트로니카 듀오 펫 샵 보이즈의 리믹스를 거치기도 했다. 추상적이고 난해한 앨범에 평단과 대중은 당황했지만, 세기말의 예술가들은 이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하다. <파이트 클럽>(1999)으로 유명한 컬트 영화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그의 1995년 영화 <세븐>에 "The Heart Filthy Lesson"을 가져다 썼다. 앨범의 다른 수록곡 "A Small Plot of Land"는, 앤디 워홀과의 교류 속에서 자기의 천재성을 드러낸 거리의 예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의 삶을 다룬 영화 <바스키아>(1996)에 삽입되었다. 줄리앙 슈나벨이 감독한 이 영화에서, 데이비드 보위는 한 때 자신과 여러 복잡다단한 관계로 얽혀 있던 앤디 워홀 역을 맡으며 매력적인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 편으로 산란하는 이미지를 전시하며 데이비드 린치의 포스트모던 미학을 완성한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1997)에서,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며 격동과 불안으로 가득 찬 인더스트리얼 음악들로 OST를 만들던 트렌트 레즈너는, 앨범의 수록곡 “I’m Deranged”를 영화의 메인 테마곡으로 삼았다.
앨범 자체도 충분히 파격적이었지만, 앨범의 투어는 더욱 급진적인 연출을 펼쳐 보였다.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던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와 공동으로 투어를 기획했다. 원 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를 이끌던 뮤지션 트렌트 레즈너는 보위를 동경하며 성장했던 인물로, 그가 선보이는 전자음악에는 '베를린 트릴로지'의 영향이 짙게 묻어 있었다. 키보드를 때려 부수거나 진흙을 뒤집어 쓰는 등의 폭력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했던 나인 인치 네일스는, 자기들의 곡과 인더스트리얼 풍의 과격한 편곡을 거친 보위의 곡들을 투어에서 함께 연주했다. 함께 진행된 보위의 'Outside Tour'와 나인 인치 네일스의 'Dissonance Tour'를 찾은 관객들은 이러한 광경을 생경해 하기도 했는데, 보위의 팬층과 나인 인치 네일스의 팬 층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격정적 흥분과 명멸하는 이미지로 가득 찬 이들의 합동 공연은 혁신적이었다. 특히나 트렌트 레즈너가 색소폰을 맡고 나인 인치 네일스의 세션들이 전자 악기를 맡으며 공명하는 앰비언트적 감각이 한층 짙어진 'Subterreneans'는 공연의 백미였다.
데이비드 보위는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지만, 그의 진보는 멈추지 않았다. 97년 초 보위는 그의 쉰 살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었는데, 여기에는 현재성과 전위성을 가진 당대의 진보적인 뮤지션들이 한데 모여 21세기적 음악의 상을 조망했다. 여기에는 보위의 오랜 동료로 아방가르드와 소음을 활용한 노이즈 음악의 효시였던 루 리드, 그리고 음울한 인상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낭만주의적 하위 문화 고딕 록을 뉴 웨이브 음악으로 풀어내 유행시킨 밴드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가 함께 했다. 소음을 연구하며 기타의 활용법을 재발명해낸 최초의 얼터너티브 밴드 소닉 유스, 그리고 픽시즈의 블랙 프랜시스와 같은 인디 씬의 거목들도 게스트로 참여했다. 90년대 초 그런지 혁명으로 록 음악의 헤게모니를 뒤엎었던 밴드 너바나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과 그의 밴드 푸 파이터즈, 그리고 슈게이징의 몽환적 색채를 그런지에 이식하며 90년대 최고의 밴드가 된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도 보위와 함께 무대에 섰다.
이어서 보위는 <1. Outside>의 인더스트리얼적 경향을 계승하되, 드럼 앤 베이스라는 문법에 집중한 앨범 <Earthling>(1997)의 작업에 착수했다. 여기에서는 드럼 앤 베이스를 토대로 레게와 훵크 그리고 힙합 따위를 뒤섞고 루프를 배치하며 역동성을 부여한 전자 음악 정글,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댄서블한 전자 음악 테크노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보위의 스무 번째 정규 앨범이었던 <Earthling>은 전작보다 직관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갔고, 오랜만의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다. "Little Wonder"와 "Dead Man Walking" 같은 곡들이 라디오 전파를 탔고, 이 두 싱글은 영국 차트 40위권에 연착륙했다. 앨범의 다른 수록곡 "I'm Afraid of Americans"는 트렌트 레즈너의 리믹스를 거치며 폴 버호벤의 영화 <쇼걸>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이는 크게 유행하며 빌보드 차트에 16주 가량을 머물렀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도 재미있는데, 트렌트 레즈너가 시내 곳곳에 등장하며 보위의 뒤를 밟고, 보위는 도망치려 노력하지만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복제되는 '미국인' 트렌트 레즈너의 이미지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이 시기의 보위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97년 초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SNL> 그리고 <투나잇 쇼>와 같은 저명한 토크쇼들에 출연했다. 5월부터 11월까지는 앨범의 홍보를 위한 'Earthling Tour'를 돌기도 했다. BBC의 아동 자선 사업을 후원하기 위해 루 리드의 곡 "Perfect Day"를 커버하며 영국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1998~2011: 원숙한 노장이 된 데이비드 보위, 그리고 갑작스런 잠적
중년의 나이에도 <1. Outside>와 <Earthling>이라는 수작을 발표하며 낡지 않은 아방가르드적 감각을 유감 없이 보여줬던 보위도, 이제는 점점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 보위는 힘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창작에 임했다. 1999년에 발매된 21집 앨범 <Hours>는 팝적이고 편안한, 일렉트로니카의 영향이 배제된 나긋나긋한 음악들을 담고 있었다. 후배들은 이제 원로가 된 보위에게 존경을 보냈고, 당시 떠오르던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플라시보는 자신들의 대표곡 "Without You I'm Nothing"의 싱글 버전을 보위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보위는 여러 라이브 공연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인터넷 홈페이지 '보위넷'을 개설하는 등, 새로운 세대의 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노력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00년이 되었다. 세기말의 예술가들이 불안한 미래로 조망하던 '뉴 밀레니엄'이 도래했다. 이 해에 보위는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음악 축제 글래스톤베리의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섰는데, 30년 전 무명 시절 글래스톤베리에서 공연했던 그가 '금의환향'하는 순간이었다. 한 편으로 그는 동시대의 여러 사회적 이슈들에 목소리를 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티베트 불교 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보위는, 중국의 티베트 강점에 문제제기하고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티베트 하우스'를 후원하는 공연을 열었고, 2001년에는 9.11 테러 추모 콘서트에서 ""Heroes""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창작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위는 2002년 그의 22집 <Heathen>을 발매했는데, 그가 전자 음악을 토대로 벌이던 실험들과 팝적인 감각, 그리고 잿빛의 우울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수작이었다. 다음 해에 발매된 23집 <Reality>도, <Heathen>의 연장선상에서 보위의 완숙미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 앨범에는 "New Killer Star"와 "Pablo Picasso", "Bring Me the Disco King"과 같은 매력적인 곡들이 실려 있었다.
보위는 새 앨범들을 홍보하는 'Heathen Tour'와 'Reality Tour'에서 여전히 정력적인 에너지를 뽐냈고, 팬들과 소통하는 한층 완숙해진 무대 매너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Reality Tour'는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공연 중 어느 팬이 막대 사탕을 던진 게 보위의 눈에 꽂힌 적도 있었고(그래도 보위는 농담으로 웃어넘기며 그 공연을 마무리했다), 무대에 선 보위는 언제부터인가 어깨 신경 쪽에서 이상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체력도 예전보다 유달리 빨리 소진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세션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투어 일정을 계속 소화했지만, 독일 공연 중에는 공연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가슴 통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는 알고보니 심장 마비 증세였고, 보위는 응급 수술을 받는다. 어쩌면 담배와 마약을 남용했었던 보위에게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보위는 남은 투어 일정을 모조리 취소하고 휴식을 가지게 된다.
심장 마비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보위는 대부분의 음악 활동을 그만두었다. 영화 감독이 된 아들 던컨 존스의 프리미어 같은 데에 참여하거나(던컨 존스는 <소스 코드>(2011)와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2016)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다) 동료 뮤지션들의 공연에 초대 손님으로 종종 얼굴을 비춘 것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보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미가 보위에게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2006년, 그는 앨범도 투어도 없이 한동안 쉴 생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아내 이만과 함께 뉴욕 맨해튼을 산보하며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던 데이비드 보위는, 이제 역사가 되어 세월의 저 편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2011~2016: 데이비드 보위, 영원한 별이 되다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켜오던 데이비드 보위.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의 새 앨범 소식이 들려왔다! 보위가 예순 여섯살 생일을 맞이하던 2013년 1월 8일, 10년만의 신곡 "Where Are We Now"가 기습 발매되고 22집 <The Next Day>의 발매가 임박했다는 사실도 공개된 것이다. 사실 보위는 11년도부터 새로운 음악에 관한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었고, 평생을 그와 함께 했던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와 <"Heroes">를 함께 작업했던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을 뉴욕으로 초청해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었다. 중간에 로버트 프립이 자기의 SNS에 실수로 보위와의 협업 사실을 언급하는 글을 남겼었지만, 보위의 공백이 너무나 오래되었던 탓에 아무도 그 글을 믿지 않았었다고.
앨범은 2013년 3월 전 세계에 발매되었고,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차트 정상에 올랐다. 빌보드에서는 밴드 본 조비의 앨범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앨범 아트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안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는 <"Heroes">의 앨범 커버에서 'Heroes'라는 글씨와 보위의 얼굴을 지우고, 그 위에 '내일'이라는 앨범명을 덧씌우는 것으로 정해졌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디디고 선 채 미래를 향해 초연히 나아가려는 보위의 의지가 번뜩였다.
<The Next Day>는 정갈하면서도 보위다운 아트 록 앨범이었다. 밴드 음악의 토대 위에 예술적 색채를 덧입힌 앨범은, 당대의 아트 팝 뮤지션들이 내놓는 결과물들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감각을 보여주었다. 첫 싱글 "Where Are We Now"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보위가 활동하던 70년대 베를린의 거리와 장벽을 보여주는 스크린 위에서 보위의 초상이 '그 오랜 세월을 표류해오던 우리는 이제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Valentine's Day"의 뮤직비디오 속 보위는, 화면 너머에 있는 우리를 분노에 찬 눈으로 응시하며 '반복되는 총기 사고로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왜 아직도 우리는 총을 놓지 못하는가'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마치 한 편의 단편 영화처럼 제작된 "The Stars (Are Out Tonight)"의 뮤직 비디오도 인상적이다. 배우 틸다 스윈튼과 함께 노년의 부부를 연기하는 데이비드 보위는, 어느날 동네로 이사를 온 셀레브리티 커플을 마주하게 된다. 셀레브리티라는 이미지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기들의 인격으로부터 소외된 이 커플은 보위 부부의 삶 주변을 배회하며 이것을 빼앗아오기를 욕망한다. 여기에는 어쩌면, 페르소나들에 잡아먹혀 '데이비드 존스'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과거를 돌아보고자 한 보위의 욕망이 담기지 않았을까.
보위는 10년만에 새 음악을 들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미디어에는 자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앨범 홍보를 위한 투어는 커녕, 일회성의 공연조차도 진행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이 시기에 들어왔던 데이비드 린치의 드라마 <트윈 픽스>의 새 시즌 출연 요청도 고사했다. 기실 그는 <The Next Day>를 내놓은 뒤 자신이 간암을 앓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평생을 예술가로, 스스로를 스펙터클과 이미지의 전시장 삼아 살아왔던 그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데이비드 보위'라는 '서사'는 가장 완벽하게 미적인 형태로 종결되어야만 했다. 보위는 그의 '스완 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위가 간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 보위의 삶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대중들은 커녕 세션들에게도 철저한 비밀로 부쳐졌다. 그렇게, 보위는 그의 유작 <★(Blackstar)>(2016)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마지막이 뻔한 로큰롤 앨범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고, 새로운 음악들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이 시절 그는 래퍼 켄드릭 라마의 혁신적인 힙합 앨범 <To Pimp a Butterfly>(2015)를 들으며, 이 앨범이 애시드 재즈에서 솔, 일렉트로니카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방법론을 뒤섞고 넘나들며 다양한 곳으로부터 온 인상들을 흩뿌리는 방식에 주목했다. 켄드릭 라마는 이러한 작업법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일관된 서사로 구축해낼 수 있었다.
21세기 대중음악의 실험법을 끊임없이 파헤치던 보위는, 젊은 아방가르드 재즈 뮤지션과 작곡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즉흥 연주를 연구하기도 했고, 복잡다단한 구조를 통해 전개되는 전자음악 IDM, 그리고 인스트루멘탈의 파편적 인상들과 힙합을 뒤섞은 실험 음악 듀오 데스 그립스 등을 찾아 듣기도 했다. 점점 악화되는 간암과 싸워가며 2015년 상반기를 쭉 작업실에서 보낸 데이비드 보위는, 마침내 그의 마지막 앨범을 완성해냈다.
앨범의 타이틀 곡이자 첫 번째 싱글이었던 "★(Blackstar)"는 2015년 11월 선공개되었다. 9분 57초에 달하는 이 대곡에서는 금관악기를 동원한 불협화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아방가르드 재즈의 인상과 변칙적인 일렉트로니카의 텍스쳐들이 경합을 벌였다. 톰 소령의 싸늘한 시체를 비추는 뮤직 비디오에서, 보위는 자기에게 여러 '스타'라는 이미지들이 부여되었지만 그 이미지들 중 어떤 것도 '보위'가 될 수는 없었음을 역설한다. 이 곡은 발매 직후 빌보드 차트에 올랐는데, '빌보드 100 싱글 차트에 이름을 올린 음악들 중, 러닝타임이 가장 긴 곡'이라는 타이틀을 경신했다고. (이는 2019년 13년만에 새 앨범을 발매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툴이 발매한 "Fear Inoculum"이라는 싱글을 통해 다시금 바뀌게 되는데, 이 곡은 길이가 10분 23초에 달한다.)
이후 두 번째 싱글 "Lazarus"가 발매되었고, 앨범은 보위의 예순 아홉살 생일인 2016년 1월 8일 세상에 공개되었다. 앨범은 곧 영국과 미국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했다.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대중에게 작별을 고하는 서사는, 혼란스럽게 종횡하는 재즈와 헐떡이는 일렉트로니카 음악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말을 건넨다. 종잡을 수 없는 음악을 담아낸 보위 최후의 역작은, 당대의 다른 아방가르드 뮤지션들보다도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예술적 정점 위에 당당히 올라선 데이비드 보위는, 이틀 뒤 죽음을 맞는다.
보위가 대중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는, "Lazarus"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곡의 제목이기도 한 라자루스, 즉 나사로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성경 속의 인물이다. 나사로는 어느날 중병을 앓게 되었고, 가족들은 예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예수는 놀란 기색도 없이 '그 병은 죽을 병도 아니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후 나사로는 죽어버리지만,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깨운다. 나사로는 그렇게 새 삶을 얻게 된다.
"Lazarus"에서 보위는 자신의 생을 돌아본다. 숱한 상흔과 영광을 경험했던 세월, 왕처럼 살기도 했던 세월을 돌아본다. 이제 보위는 위태롭게 서 있지만, 잃을 것도 없다. 보위는 이제 파랑새가 되어 천국으로 날아간다. 육신은 죽지만, 영원한 생을 얻는다. 뮤직 비디오에서의 보위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뱉어낸 뒤 벽장 속으로 쓸쓸히 퇴장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육신으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상호작용하며,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위의 육체는 죽음을 맞았지만,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뒤집어 놓았던 그의 인상들, 그의 예술들은 영원히 남아 오늘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데이비드 보위는 부활하여 '영원한 검은 별'이 되었다.
마치며: 우리는 보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데이비드 보위를 끔찍이 사랑하고 동경한다. 아니, 사회를 문화세계로 조망한다면, 데이비드 보위 이후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도 데이비드 보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데이비드 보위는 예술가적 삶의 이념형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또 이를 통해 예술가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의 성격을 가장 정합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한 편으로 제도화된 기존 예술 시장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며 반문화로서 일어난 숱한 예술가들이 명성을 얻어가며 제도와 낡은 예술 그 자체가 되어가던 사이에도, 보위는 끊임없이 새로운 전위예술의 방법을 모색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뮤지션이 또 누가 있었나를 생각해봐도, 마일스 데이비스나 라디오헤드와 같은 일부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이들이 없다.
데이비드 보위는 지하에서 새롭게 들끓는 문화 코드를 포착하고, 이를 자기의 문법으로 만들고, 대중에게 이를 근사히 소개하는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안내자'이기도 했다. 그는 새롭게 들끓던 글램 록, 전자 음악, 뉴 로맨틱과 뉴 웨이브, 그리고 포스트모던 예술들을 양지로 끌어올렸다. 한편으로 그는 터부시되던 퀴어 문화를 서구의 주류 미디어에 처음으로 선보이고 새로운 드랙 패션을 개발하는가 하면,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찰을 담은 예술을 통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퀴어라는 인식과 문화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서구 대중음악은 데이비드 보위라는 계기의 전과 후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그는 펑크 록과 아방가르드, 그리고 대안적 록 음악 얼터너티브의 효시라 할 만한 이기 팝과 루 리드를 세계에 소개했다. 오늘날 보편적인 문법으로 자리잡은 일렉트로니카는, 크라우트록과 앰비언트가 보위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며 그 뿌리를 찾게 되었다. 언제나 예술의 전위를 지키고 있었던 보위는, 미래적 예술의 상을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조망해오고는 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그리던 세계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