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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Dec 26. 2021

2021년 올해의 앨범들


  2021년이 이렇게 쏜살같이, 그것도 2021년이라기보다는 마치 “포스트-2019의 장기적 연장선상”같은 느낌으로 흘러갈 줄 몰랐다. 한 해를 연옥과도 같은 시간으로 만든 건 역시나 훨씬 전에 끝날 것 같았던 팬데믹 때문이겠지만, 그로부터 탈출해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도 이렇게 다사다난할 줄이야. 이건 음악을 듣고 만드는 입장에서도, 그리고 대중음악산업 전체로 봐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작년 초부터는 소규모 클럽 공연장에서 스타디움과 페스티벌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서도 공연을 하기도 보기도 어려웠다. 올해 여름부터는 대규모 공연 문화들을 복원하려는 노력들이 있었고 롤라팔루자와 같은 페스티벌들은 어렵사리 문을 열었지만, 이면에는 트래비스 스캇의 애스트로월드 공연 참사(공연의 과열된 분위기 속 관중 통제에 실패해 10명의 압사자와 수 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와 같은 비극들이 있었고 이는 “이전과 같은 공연 문화가 성찰 없이 지속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을 남겼다.


  공연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 속, 대중음악산업의 다른 한 축인 음반시장 역시도 소비자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는 못한 것 같다. 거물급 뮤지션들의 릴리즈들이 쏟아졌지만 그것들은 이름값에 걸맞은. 찬사보다는 논란 혹은 의문을 던진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올해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카녜의 “Donda”(2021, GOOD)와 드레이크의 “Certified Lover Boys”(2021, OVO) 두 앨범이 모두 여러 이슈들로 곤욕을 치르게 되었던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넘게 여러 사건사고와 논란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거기에 시달리고 ‘야누스적 천재’라는 상에 잡아먹혀가던 카녜는 “Donda”에서 이를 갈고 나왔고 진중하고 무거운 애티튜드와 번뜩이는 순간들을 보여주며 “The Life of Pablo”(2016, GOOD) 이후 가장 카녜답게 익스페리멘털한 음악을 했다. 하지만 “Donda”의 카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카녜가 아니었다. “Yeezus”(2013, Def Jam)나 “The Life of Pablo” 시기까지, 새 앨범을 낼 때마다 자신의 이전 디스코그라피 그리고 이전의 힙합 음악과는 차원이 다른 혁신을 선보였던 카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속 들쭉날쭉하고 정돈되지 못하고 어떤 지점에서는 시간을 질질 끌기까지 하는 프로듀싱은 이 앨범이 좋은 앨범인지 나쁜 앨범인지 판단하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Donda”는 증오 선동을 부추기는 뮤지션(다 베이비)과 성폭력 가해자(마릴린 맨슨)에게 크레딧을 주며 젠더폭력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중음악시장이 “Donda”를 소비하지 말아야 할 결정적일 이유를 제공했다 한편. “Certified Lover Boy”는 모두가 PBR&B에 익숙해진 2010년대 후반부터는 지루하고 진부해지기 시작한 드레이크의 내리막길에 부채질을 했다.


  이 외에도 여러 굵직했던 릴리즈들이 있었으나 무엇 하나 시장이나 씬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인디 포크의 대명사 수프얀 스티븐스는 자신이 내놓았던 숱한 명반들과 비해 재미 없는 앨범을 만들었다. “Norman Fucking Rockwell!”(2019, Polydor)에서 역량의 정점을 보여줬던 라나 델 레이의 올해 앨범들은 멜랑콜리한 낭만주의를 이어가는 선에서 무리하지 않고 딱 ‘적당’했다. 아델은 6년 만에 옛 스탠더드 팝의 감성을 가리키는, 로드는 4년 만에 따뜻한 인디 포크를 선보이는 새 정규 앨범을 내놓았지만 팬들은 오랜 시간 기다린 것 치고는 뜨뜻미지근한 결과물에 실망하지 않았을까. 한편 이제는 우리 시대의 아티스트가 된 테일러 스위프트는 옛 앨범들을 멋지게 재녹음해 내놓았고 라디오헤드는 21세기 대중음악문법의 판도를 영원히 바꿔놓은 그들의 앨범 “Kid A”(2000, Parlophone)와 후속작 “Amnesiac”(2001, Parlophone)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컴필레이션 “Kid A Mnesia”(2021, XL)를 공개했지만 이것들은 엄밀히 말해 새 앨범은 아니니 논외로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재미 없는 한 해는 아니었다. 숨겨진 보석들이 있었고, 멋진 앨범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올해에도 세상의 빛을 봤다. 올해 내가 가장 만족하며 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30장의 앨범들을 꼽아봤다.


30. “Welfare Jazz”, Viagra Boys (YEAR0001)


  비아그라 보이스는 스웨덴 출신의 포스트 펑크 밴드다. 이들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2015년 결성되어 18년에 첫 정규 앨범을 냈는데, 그 무렵 알고리즘을 타고 내 유투브 피드에 들어온 이들의 라이브 영상을 괴상한 밴드 이름 때문에 눌러봤다가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내 기대를 샀던 이들의 두 번째 정규앨범 “Welfare Jazz”가 발매된 것은 지난 1월. 비아그라 보이스의 장점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시기의 하이프가 사그라들자 그 시기 평단이 요구하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에 대한 고정관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아그라 보이스는 예컨대 스트록스를 따라하지도 더 내셔널을 따라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LCD 사운드시스템이 떠오르는 지점은 있다.) “Welfare Jazz”에서 이들은 70년대 포스트 펑크의 옅은 정취를 살짝 입힌 채, 급진적이면서도 만듦새 좋은, 동시에 직선적인 힘을 가진 3-4분 안쪽의 리프 중심 트랙들을 만들었다. 신스와 브라스가 베이스와 오버드라이브 기타의 일관된 리프 전개 위에서 제 역할을 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고, 탄탄하지만 무엇 하나 과하지 않은 인스트루멘털이 펼쳐진다. 특히 이 일관성이라는 지점, 앨범 전체를 들쭉날쭉하지 않고 쭉 이어지게 만드는 작, 편곡과 프로듀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9. “G_d’s Pees AT STATE’S END!”, Godspeed You! Black Emperor (Constellation)


  사람들이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에게 기대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10분에서 20분을 넘나드는 트랙 속에 철저히 기획된 서사와 그 속에 형해화된 채 콜라주된 언어×이미지들이 주는 영화적인 감상, 다른 포스트 록 밴드들보다도 헤비하게 잡혀 메탈처럼 들릴 정도의 디스토션 기타 톤이 때로는 스트링 사운드와 함께 수 분동안 차곡차곡 쌓이다가 터질 때에 뿜어져 나오는 어떤 황홀감 같은 것들. 2000년대 초 해체했던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는 2012년 “'Allelujah! Don't Bend! Ascend!”(2012, Constellation)라는 희대의 명반으로 돌아오며 폭발하는 헤비니스를 선보인 이후로도 두 장의 앨범을 더 냈다. 하지만 이것들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가 잘 하던, 예전에 했던 것들을 또다시 하는 과거 명반들의 연장선상에 불과했다.


  물론 올해 발매된 신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근래 세 장의 앨범 중에서는 가장 훌륭하고, 이들이 마침내 수렁을 빠져나와 빛을 향해 전진한다는 인상을 준다. 사소한 변화들도 있다. 앞선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들렸던 앰비언트 경향이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해 호흡이 탄탄해졌다. 결과적으로 스트링을 곁들인 헤비한 리프를 군더더기 없이 차곡차곡 쌓아가는 방법론이 가장 빛났던 앨범, “Lift Your Skinny Fists Like Antennas to Heaven” (2000, Constellation)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28. “Infinite Granite”, Deafheaven (Sargent House)


  아마도 나는 남한에서 가장 성공한 데프헤븐 팬이다. 2019년 내한 공연에서 기타리스트 케리 매코이 바로 앞의 펜스를 잡았던 나는 안 그래도 긴 머리를 마구 휘날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목이 아플 정도로 헤드뱅잉을 했는데, 케리 매코이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웃으며 아이컨택을 하더니만 공연이 끝나니까 나한테 헐레벌떡 달려와서 공연 셋리스트를 선물로 주는 게 아닌가. 아무튼 그런 팬의 입장에서, 올해 파문을 일으켰던 데프헤븐 음악의 중대한 변화를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기는 힘들었다.


  데프헤븐이 메인스트림으로 가져온 포스트 메탈이라는 화두는 2010년대 메탈 씬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포스트 메탈이라고 명명되던 다른 밴드들이 90년대나 2000년대부터 존재했으나 이들은 프로그레시브, 둠, 슬러지처럼 데프헤븐과는 다른 층위의 뿌리에서 출발한 음악을 했으며 거대한 유행이 되지도 못했다. 이전의 포스트 메탈 밴드들이 이시스처럼 프로그레시브와 포스트 록적 방법론에 더욱 천착해 메탈의 구조를 다변화하거나 아니면 선(Sunn O))))처럼 앰비언트, 노이즈, 드론의 형해화된 방법론을 가져와 메탈의 구조 자체를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메탈을 이탈하는 메탈을 했다면, 데프헤븐은 사악한 익스트림 창법, 단순한 리프, 지글거리는 로우 파이 질감의 기타 톤, 절규하는 정서로 대표되는 블랙메탈을 슈게이징과 드림 팝이라는 정반대의 모순된 텍스쳐로 풀어내는 방식을 통해 블랙메탈을 둘러싼 관념을 이탈했다. 이처럼 블랙메탈의 검은색 위에 서정과 몽환의 파스텔 톤을 덧입히는 소위 ‘블랙게이즈’라는 방식은 프랑스의 알세스트가 훨씬 전부터 하던 것이지만, 데프헤븐은 2013년도의 “Sunbather”(Deathwish Inc.)를 통해 이걸 빌보드로 들고 들어갔다.


  하지만 데프헤븐이 레이블까지 옮겨가며 만든 새 앨범 “Infinite Granite”는 아예 메탈이 아니다. 이는 요컨대 메탈을 이탈하는 메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메탈을 관두겠다는 일종의 전향 선언이다. 새 앨범에서 보컬 조지 클라크는 스크리밍을 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있고, 클린 톤이나 얼터너티브 풍의 게인 톤의 기타 리프들이 이전의 메탈 리프들을 대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라이드 같은 영국 슈게이즈 밴드들을 연상케 하는 앨범이 완성되었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처럼 노이즈 메이킹을 앞세우는 부류의 슈게이즈 밴드들과는 또 결이 다르다.


  메탈 씬을 통해 유입된 데프헤븐 팬들에게 새 앨범은 분명 당혹스러운 사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앨범이 형편없는 괴작 같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작 “Ordinary Corrupt Human Love”(2018, Anti-), 같은 데에서는 공간계 이펙터들이 천재적으로 활용되어 빚어진 유리알처럼 투명한 클린 톤 기타 사운드가 군데군데 배치되어 앨범의 강점으로 작용했는데, 신작에서는 그러한 톤 메이킹이 음악의 중심이 되어 여름 햇살을 연상시키는 서정을 극대화했다. 새 앨범은 애플 뮤직의 과장된 홍보 문구처럼 “데프헤븐만의 장르를 완성”하지는 않지만, 90년대 슈게이즈 그리고 이후 뉴-게이즈 음악들이 선사하던 낭만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앨범의 피날레라 할 만한 마지막 트랙 ‘Mombasa’에서는 앨범 처음부터 쭉 끌고오던 달곰씁쓸한 멜랑콜리를 이전 데프헤븐을 연상시키는 스크리밍 보컬과 헤비한 사운드로 터트리며, 데프헤븐의 오랜 지지자들에 대한 팬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27. “SOUR”, Olivia Rodrigo (Geffen)

  

  데뷔 싱글 ‘drivers license’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첫 정규 앨범 “SOUR”는 그를 빌리 아일리시를 이어 10대의 우울을 팬들과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는 멜랑콜리 팝 스타로 만들어 놓았다. 2003년 생으로 올해 만 열 여덟살인 뮤지션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팬데믹의 적막 속 삶이 뒤흔들리는 틴에이지의 끝자락을 건너가며 느끼는 감정들을 노래한다.


  앨범에는 여러 선배 싱어-송라이터들의 자취가 짙다. 무덤덤하게 진술하는가 하면 때로는 코러스 텍스쳐를 겹겹이 쌓고 인상적인 팔세토에까지 다다르는 보컬, 그리고 일렉트로닉과 어쿠스틱을 적절히 넘나드는 사운드 배치는 로드나 빌리 아일리시를 떠오르게 한다. 테일러 스위프트를 연상시키는 달곰씁쓸하고 시원섭섭한 우울감은 앨범의 곳곳을 떠돌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이 앨범이 소환해내는 2000년대 초 팝 펑크 유행과 에이브릴 라빈에 대한 향수다. 첫 트랙 ‘brutal’에서부터 파티 분위기의 기타 리프 위를 달리며 “열 일곱살은 이제 지겹다, 내 빌어먹을 틴에이지 드림은 어디 갔냐”고 천진난만하게 중얼거리는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짙은 마스카라에 길게 내린 앞머리를 탈색하고 후드 티를 걸친 채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이모 키드들의 시대로 타임 머신을 타고 날아간다. 이제는 8-90년대 생들의 문화적 전유물들마저 레트로 페티시즘의 매력적인 이미지로 기획될 수 있게 되었다.



26. “Eternal Hails……”, Darkthrone (Peacevill Records)

  

  다크스론은 흔히 노르웨이 발 2세대 블랙 메탈의 맹주로 기억된다. 90년대의 다크스론은 소위 “unholy trilogy”(불경의 3연작)라고 불리는 세 장의 앨범을 통해 블랙메탈의 정석적 문법을 정립했다. 하지만 지금의 다크스론과 그 때의 다크스론은 다른 밴드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블랙 메탈 2세대”라는 협소한 장르적 경계를 극복하고 자기들이 규정했던 틀을 스스로 부수어낟가며 새로운 메탈의 청사진을 그리는 음악을 하고 있다.


  이들은 2007년에 “NWOBHM”(2007, Peacevill Records)이라는 이름의 EP를 낸 적이 있다. 이 EP 제목은 NWOBHM이라는 약자가 원래 가리키는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이 아니라 다크스론이 새롭게 고안해 낸 “new wave of black heavy metal”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다크스론이 근래에 선보이는 음악들을 묘사하기에 몹시나 적합한 호명인 것 같다. 예컨대 평단은 20년 전 램 오브 갓의 음악에 “뉴 웨이브”라는 수사를 붙이며(이들은 “NWOAHM”, 즉 “new wave of American heavy metal”이라는 이름표를 얻게 되었다)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밴드 하나가 성공한 것과는 별개로 그러한 조류의 음악이 “뉴 웨이브”라 불릴 만큼 획기적이거나, 아니면 지금까지의 씬에 주도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다크스론의 음악이야말로 오히려 “뉴 웨이브”다. 그들의 이번 앨범 “Eternal Hails……”는 전작 “Old Star”(2019, Peacevill Records)와 함께 다크스론 류 신장르의 가장 매력적인 예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Eternal Hails……”는 고전적인 메탈 장르로의 리바이벌이지만 리바이벌이 아니다. 이건 가히 “레트로-아방가르드”라고 할 만 하다. 여기에서 다크스론은 블랙 사바스부터 80년대까지 유통되던 옛 메탈들의 고전적인 원칙, 리프, 구조들의 정형을 재발굴해 거기에 블랙 메탈 텍스쳐를 덧입혔다. 슬러지나 둠 메탈을 떠올리게 할 만큼 늦춰진 호흡과 모터헤드를 연상시키는 펑크/로큰롤 기반의 단순한 리프들은 “Eternal Hails….”를 블랙 메탈의 색채가 남아있지만 사악함보다는 투박함의 미학이 앞세워진 블랙 메탈 앨범으로, 요컨대 “블랙큰드 헤비 메탈” 앨범으로 만든다. 블랙게이즈만 포스트 블랙 메탈로 엮지 말고, 이런 앨범을 포스트 블랙 메탈 담론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5. “ALPHA”, CL (Very Cherry)


  트랩이나 얼터너티브 R&B 같은 근래 팝 시장의 유행은 익숙하지만 이걸 CL의 음악으로 들으면 또 새롭다. 뷰욕을 연상케 하는 인상적인 앨범 재킷의 “ALPHA”는, 2NE1 멤버들을 사실상 방치하던 YG와의 계약을 해지한 CL이 ‘베리 체리’라는 셀프 매니지먼트 레이블로 야심차게 내놓은 첫 솔로 정규 앨범이다. 올해로 연차가 12년인, 심지어 독보적인 재능의 뮤지션 CL의 커리어 속에 솔로 정규 앨범이 한 장도 없었다는 사실이 참 놀랍고, 한 편으로 CL의 정규 앨범을 기획하지 않은 양아치같은 양현석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이전에도 CL의 캐릭터는 독보적이었다. ‘기획’으로 환원되는 케이 팝 시장에서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이미지와 압도와 카리스마의 미학을 드러내며 “우먼 임파워먼트”적 상에 부합하는 뮤지션의 상을 구축해 가는 역설이 CL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CL의 강점은 이번 솔로 데뷔 앨범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 같다.  


  작사와 작곡 그리고 프로듀싱과 관련해, 바우어같은 트랩 DJ에서부터 팝 스타 앤-마리, 타블로와 소코도모같은 국내 랩 뮤지션들과 킴브라(고티에와 ‘Somebody That I Used to Know’를 부른 그 킴브라가 맞다!)같은 인디 싱어송라이터까지 종잡을 수 없는 수십 명의 인물이 각 트랙들의 크레딧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트랙들은 여러 뮤지션들의 개성에 잠식당하거나 중심을 잃고 산만해지지 않고, 오히려 치밀한 설계와 검수 그리고 통제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앨범 전체의 일관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앨범 전체의 그림을 그린 CL의 사운드에 대한 강력한 지향이 드러난다. 존 말코비치의 내레이션으로 앨범의 문을 여는 첫 트랙 ‘SPICY’나 ‘Chuck’에서는 CL이 전투적인 트랩 사운드와 어울리는 래퍼라는 사실이, 그리고 ‘Xai’ 같은 트랙들에서는 CL이 일렉트로닉 프로듀싱에 최적화된, PBR&B 시대를 위해 태어난 보컬리스트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CL은 상업적 결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이번 앨범에서 싱글컷을 하지 않았다는데, 앨범의 완성도가 들쭉날쭉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고르게 좋기에 CL의 이러한 판단은 옳은 것 같다.



24. “kick iiiii”, Arca (XL)


  아르카의 새 앨범을 기대했지만 한꺼번에 “KiCk i”(2020, XL)에 뒤따르는 연작들을 네 장으로 우르르 발매할 줄은 몰랐다. 아르카가 작업물을 너무 열심히 생산해내는 바람에, 그걸 한꺼번에 들으며 따라가는 데에 체력이 꽤나 필요했다. 다 듣고 보니, 각 앨범 별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장르적 컨셉을 통해 드러나는, 여러 장르음악에 걸쳐 있는 아르카의 방대한 야망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게 너무 과해서 산만해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르카의 비범한 재능이 퇴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개인적으로 아르카의 천재성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그의 2017년도 셀프 타이틀 앨범으로 꼽는데, 한 편으로 이는 아르카가 자신의 고통을 가장 처절하게 토해내는 순간이었다. 혼란스럽게 떠돌고 방황하고 분절하는 디스포리아의 늪에서, 아르카는 육체와의 불화, 세계와의 불화를 끊이지 않는 불협화음의 충돌과 음습하다 명멸하는 앰비언트 전자악기들의 공허로 증언해내며 21세기를 통틀어 가장 숭고한 전자음악을 만들었다. 이는 요컨대 아르카의 수난곡이었다.


  이후 아르카의 앨범들은 “Arca”(2017, XL)와는 다른 방향성을 보여줬는데, 이는 아르카가 스스로의 디스포리아를 극복해가고 프라이드와 자신감을 찾아가는 데에 따른 것이었다. 작년의 첫 앨범 이후로 올해에 쭉 이어진 아르카의 연작들은 이러한 경향 위에 있다. 하지만 연작의 마지막 장인 “kick iiiii”는 “Arca”의 미학이었던 고통의 증언을 통한 숭고미에 그나마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다. 아르카는 자신의 연작 프로젝트를, 앰비언트를 위시한 현대 음악을 의식하며 미니멀하고, 차분하고, 덤덤하게 풀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23. “King’s Disease II”, Nas (Mass Appeal)


  아무래도 나스가 적어도 10년에 한 번은 좋은 앨범을 낸다는 속설이 맞나 보다. 90년대의 “Illmatic”(1994, Columbia)과 2000년대의 “Stillmatic”(2001, Ill Will) 그리고 2010년대의 “Life Is Good”(2012, Def Jam)에 이어 나스의 새로운 10년을 대표할 만한 앨범이 나왔다.  


  “King’s Disease II”에서는 붐뱁의 기준을 제시했던 어둡고도 여유로운 특유의 바이브가 근작들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번에는 나스가 대개 그랬던 것처럼 형편 없는 비트 초이스로 자신의 장점들을 무색하게 만들지 않았다. “thug poet”(갱스터 시인)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나스 최대의 강점은 서사와 스토리텔링일 것이다. “King’s Disease II”에서는 중도적이고, 편안하고, 차분해진 비트 초이스 위에서 서사라는 나스의 강점이 난잡하거나 촌스러운 비트에 방해받지 않고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드러난다. 이는 나스가 무리하게 유행을 따라잡기보다는 “잘하던 것이나 잘 하자”는 애티튜드로 자신의 붐뱁 뿌리 위에 트랩 양념이 옅게 든 트랙들을 적당주의적인 선에서 살살 활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편으로 선물같은 것은, 이번 앨범에서 한동안 목소리를 듣기 힘들었던 로린 힐과 EPMD를 피처링으로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는 것.



22. “Happier Than Ever”, Billie Eilish (Darkroom)


  사실 빌리 아일리시의 2집은 올해 내가 가장 걱정하던 릴리즈였다. 이 걱정은 다 빌리 아일리시의 데뷔 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2019, Darkroom) 때문이었다. 물론 1집은 동시대에 가장 매력적인 팝 앨범 중 하나다. 하지만 그가 데뷔 이전 싱글들에서 선보였던 글리치와 키치적 아방가르드의 미학은, 여기에서 메인스트림 지향 속에 완전히 표백됐다. 그리고 이 앨범은 빌리 아일리시를 뮤지션이라기보다는 밀레니얼의 우울을 짊어진 거대한 상징처럼 만들어버렸다. 데뷔 앨범의 성공 이후 이를 이어가지 못하고 ‘소포모어 징크스’에 빠져 몰락한 뮤지션이 한 둘이 아닌데, 과연 앨범 한 장으로 졸지에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빌리 아일리시는 “다음에도 이런 성공적인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려가 많았다.


  그리고 결국 2집 “Happier Than Ever”가 발매되었다. 시대를 풍미할 앨범은 아니다. 하지만 신드롬이 아닌 앞으로 기나긴 커리어를 이어갈 뮤지션으로서 연착륙할 계기가 되어주기에는 충분하고, 빌리 아일리시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앨범이었다. 힘을 빼는 법을 배우고 난 뒤의 결과물.


  어두운 흑색을 테마로 잡았던 1집과는 다르게, 이번 앨범은 밝은 황금색을 테마로 잡았다. ‘Oxytocin’이나 ‘Therefore I Am’ 같은 트랙들의 텍스쳐에서는 전작의 유산이 확연히 느껴지지만, 여하튼 전체적으로는 이에 맞게 장르적 지향에서도 확연한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일렉트로닉 요소에 천착하는 경향이 전작보다 줄어들었고, 어쿠스틱 사운드가 군데군데에서 빈자리를 대체했다. 스탠더드 팝과 보컬 재즈 그리고 다운템포의 영향을 받아 전체적으로 덤덤하고, 차분하고, 미니멀한 분위기의 앨범이 완성되었다. 이런 간결함은 빌리 아일리시의 보컬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그가 그렇게 노래하는 것은, 하이프에 연연하지 않고 홀로 서는 것이다. 이제 빌리 아일리시는 천천히 나이 들 준비를 하고(‘Getting Older’), 미래를 기대하고(‘my future’),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한다(‘Happier Than Ever’).


21. “As Days Get Dark”, Arab Strap (Rock Action)

  

  2006년 해체 선언을 했던 스코틀랜드의 새드코어 듀오 아랍 스트랩의 16년만의 복귀작. 아랍 스트랩은 원래 먹먹한 스코틀랜드 날씨처럼 기분부전증적인 음악을 하기로 유명했는데 오랜만의 새 앨범에서도 이러한 감각은 어디 가지 않았다. 단조롭고 메마른 드럼 머신 비트 위에서 빈 공간을 겨우 채우는 무채색의 기타 사운드와 덤덤히 웅얼거리는 스포큰 워드는 우울한 90년대 영국 트립 합 음악에서 인디 포크트로니카까지 다양한 장르적 레퍼런스들을 연상시키며 느적느적 표류하고 있다. 트랙 ‘Bluebird’의 “날 사랑하지 마, 네 사랑이 필요해”라는 찌질한 가사야말로 앨범의 감성을 대변한다. 데뷔 이래로 인디 레이블 케미컬 언더그라운드에서 앨범을 발매하던 아랍 스트랩은, 이번에는 동향 포스트 록 밴드 모과이의 레이블 록 액션으로 적을 옮겼다.



20. “Celestial Blues”, King Woman (Relapse)

  

  “Celestial Blues”는 슈게이징과 드림 팝, 고딕과 둠을 아우르는 포스트 메탈 뮤지션 크리스티나 에스판디아리의 밴드 킹 우먼이 과거 데프헤븐의 프로듀서였던 잭 셜리와 함께 내놓은 정규 2집 앨범이다. 여기에서 에스판디아리는 어린 시절 복음주의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며 경험했던 억압과 통제, 폭력을 날 것의 끔찍함으로 드러낸다.


  숨 막히는 처연함과 공허함, 절규 속에 폭발하는 우울을 선사하는 “Celestial Blues”는 가히 올해 최고의 메탈 앨범 중 하나다. 벨기에의 블랙게이즈 밴드 오스브레이커를 연상시키는 짙은 잔향의 보컬은 삭막한 앰비언트적 배경 위에서 정처 없이 방황한다. 코드 오렌지 류 하드코어 펑크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강렬한 리프들은 간간히 이빨을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일련의 긴장감과 헤비니스를 앨범의 첫 트랙에서 마지막까지 탄탄하게 끌고 간다. 특유의 템포 위에서 적절한 때에 감정을 터트리는 완급 조절은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19. “The Nearer the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 Damon Albarn (Transgressive)

  

  데이먼 알반의 신보는 아무래도 이제는 나이 든 옛 거장 데이먼 알반의 신보라는 이유로 형식적인 찬사를 가장한 저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블러와 고릴라즈로 영국 대중음악사의 한 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데이먼 알반은 지난 8월 고릴라즈 명의의 EP “Meanwhile”을 통해서도 낡지 않고 진보하는 얼터너티브 힙합-일렉트로닉 감각을 보여줬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발매한 두 번째 정규 앨범 “The Nearer the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에서 선보인 앰비언트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진정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데이먼 알반은 원래 이 작품을 툰드라 섬 아이슬란드의 자연에 영감 받은 짧은 교향곡으로 기획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팬데믹 이후 집에서 빈둥대는(?) 시간이 길어지자, 알반은 프로젝트를 40분 짜리 정규 앨범 단위로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공명하는 앰비언트 전자음으로 미니멀하게 시작해 잔잔한 파도 소리로 마무리되는 앨범의 첫 트랙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시규어 로스다. 이후로 전개되는 트랙들은 “데이먼 알반이 이렇게 넓은 시야를 가진 뮤지션이었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곳곳의 앰비언트 텍스쳐는 보위의 “Low”(1977, RCA) B 사이드 트랙들을 떠오르게 한다. 퓨전-아방가르드 재즈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Combustion’, 조니 마의 최근 작업들 혹은 전성기 고릴라즈의 차분하고도 댄서블한 감각을 가진 ‘Royal Moring Blue’ 등, 소소한 개성을 보여주는 트랙들도 재미있다.



18. “New Long Leg”, Dry Cleaning (4AD)


  브리티시 인디 록의 명가 4AD가 발굴한 신예 포스트 펑크 밴드 드라이 클리닝은 조이 디비전과 수지 앤 더 밴시스의 시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같은 데뷔 앨범을 만들어 냈다. 첫 트랙 ‘Scratchcard Lanyard”에서부터 쭉 깔리는 단조롭고 두꺼운 베이스 라인과 8비트 드럼은 이들의 본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조이 디비전 시절의 버나드 섬너가 재림한 것 같은 기타 리프와 솔로들까지 들으면 “이거다!” 하는 확신이 생긴다. 톤 메이킹은 스미스 시절 조니 마가 특히 “Meat Is Murder”(1985, Rough Trade)같은 데에서 근사하게 보여준 징글쟁글함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인 투로 일관되게 흘러가는 스포큰 워드도 완성도가 높다. 다만 아쉬운 지점은, 잿빛 포스트 펑크 사운드의 복원을 향한 일관된 집중력이 어떤 데에서는 단조로움으로도 들릴 수 있겠다는 것.



17. “Empire of Love”, Violet Cold

  

  아제르바이잔 출신 뮤지션 에민 굴리예프의 포스트 메탈 프로젝트 바이올렛 콜드는 지난 몇 년 간 밴드캠프 등을 통해 블랙게이즈/포스트 메탈 씬에서 손꼽힐 정도로 선도적인 사운드의 앨범을 만들었지만, 이번 앨범 “Empire of Love”야말로 여러 의미에서 바이올렛 콜드의 “게임 체인저”라 할 만 하다. 자켓과 트랙 리스트로 앨범을 처음 접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앨범의 전례 없는 정치성이다. 씬의 여러 밴드들이 으레 그렇듯 이전의 바이올렛 콜드 디스코그라피가 추상적인 주제의식에 머물러 있었다면, 프라이드 플래그와 월성기를 합성한 커버 아트 그리고 ‘Pride’, ‘We Met During the Revolution’, ‘Shegnificant’, ‘Working Class’ 같은 제목의 곡들에서는 이 앨범이 갖는 매니페스토(선언)적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에민 굴리예프는 단순히 정체성 정치의 위치를 되풀이하는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몸을 가르는 젠더와 권력의 정치학, 그리고 계급의 정치학이 구획하는 차이와 경계를 넘나들며 타자를 만나고, 인식하고, 피억압자들의 연대를 구축하며 동지적 관계맺음이 주는 감정을 설득력 있는 서사로 드러내는 데에 집중한다.


  앨범의 상호교차성과 급진성은 단순히 정치적 지점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앨범이 수용하고 내뱉는 장르적 문법의 측면 역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슈게이징과 드림 팝 혹은 포스트 록이 갖는 몽환으로 블랙 메탈에 파스텔 톤을 덧입히는 것은 이제 포스트 블랙 메탈 방법론의 기본이 되었고, 여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가나 스피리추얼을 결합하거나(스웨덴의 질 앤 아도어), 신경증과 절망적 우울을 묘사하는 데 천착하는 블랙 메탈의 하위 장르 DSBM(depressive suicidal black metal)을 포스트 블랙 메탈의 방법론으로 재해석하는(고스트 배스 등) 여러 간장르적 실험이 벌어졌지만, “Empire of Love”는 이전의 실험들보다도 훨씬 비전형적이고 다채롭다.


  여러 포스트 블랙 메탈 밴드들이 블랙 메탈의 사악한 분위기를 몽환과 서정의 정서로 대체하는 와중에도 일종의 멜랑콜리함을 놓지 못했다면, 연대의 환희와 아름다움을 논하기 위해 태어난 앨범 “Empire of Love”는 앨범을 듣는 내내 희망과 행복감을 선사하는 블랙 메탈 사운드를 선사한다. 예컨대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트랙 ‘Cradle’을 재생했을 때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오는 것은 밴조를 비롯한 민속 악기들로 빚어지는 목가적인 컨트리 사운드다. 때때로 적당히 오토튠 된 클린 보컬과 익스트림 창법의 균형감 있는 배치는 앨범에서 우울과 절규의 감상을 완전히 걷어낼 수 있게 했고, 메이저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타 리프나 프레이즈는 때때로 젠트의 질주감과 테크니컬함을 연상시키며 청량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리버브의 잔향이 촉촉히 묻어난 톤 메이킹도 칭찬할 지점이다.



16. “Cavalcade”, black midi (Rough Trade)

  

  블랙 미디의 데뷔 앨범은 가히 획기적이었다. “Schlagenheim”(2019, Rough Trade)은 노이즈와 재즈 퓨전의 유산들을 흡수하고 탄탄한 연주력을 토대로 쌓아 빚어진, 정신 없고 시끄럽고 허를 찌르는 매스 록 앨범이었고, 브릿 팝의 명가 러프 트레이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운드를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번 2집 앨범 “Cavalcade”는 1집이 주었던 충격파를 이어간다. 1집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비트는 맛을 보여준다.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브라스 활용이나 모달의 활용 같은 아방가르드-재즈적 접근도 재미있다. 블랙 미디는 이번 앨범에서 21세기에 과거의 특정 장르를 지시하는 용어로서의 ‘프로그레시브’나 매니아들을 위해 이를 되풀이하는 포큐파인 트리 풍의 ‘포스트 프로그레시브’를 넘어, 이름 그대로 동시대에서부터 앞으로 전진하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15. “KicK iii”, Arca (XL)

  

  앞서 짚은 것처럼 아르카의 다섯 장 짜리 “KiCk” 연작들, 정확히는 올해에 발매된 네 장의 앨범들은 각 장마다 명확하게 다른 장르적 지향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KiCk” 프랜차이즈의 세 번째 장은 연작들 중에서 가장 IDM(intelligent dance music)다운 앨범이다.


  여기에서 아르카는 인더스트리얼의 왜곡된 텍스쳐나 드럼 앤 베이스의 강박을 연상시키는 타악의 앙상한 토대 위에 많은 것을 덧입히지 않는다. 다만 노이즈와 글리치들을 배치하고 활용해 어떤 ‘질감’을 얻어낼 것인지에 신경 쓸 뿐이다. 다섯 연작 중에서 가장 형해화된 형태의, 구조가 무너진 형태의 음악을 선보이는 것도 이 앨범이다. 그나마 마지막 트랙인 ‘Joya’를 제외하면(이건 네 번째 앨범에 실리는 게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앨범은 헐떡이는 신경증적 리듬들을 늘어놓고 소음으로 일그러트리는 해체주의적 전자음악의 미학에 도달하는 데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



14. “Donda”, Kanye West (GOOD)

  

  앞서 “Donda”에 관한 불만들을 그렇게 쏟아놓고서는 올해의 앨범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이율배반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카녜빠(?)인가보다. 나는 위에서 이야기했던 이 앨범의 ‘번뜩이는 순간들’에 희망을 걸고 싶다.


  와이오밍 프로젝트와 그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카녜에게 있어 그가 2009년에 경험했던 것보다도 근본적으로 심각한 위기임에 틀림 없다. 어머니 돈다 웨스트의 죽음과 파혼, 그리고 테일러 스위프트가 서 있는 시상식 무대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본인이 자초한 온갖 구설수들을, 10년 전의 카녜는 놀라운 집중력과 철저한 계획 그리고 천재성으로 빚어진 21세기의 클래식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2010, Def Jam)를 내놓는 정면 돌파와 자기 증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카녜를 둘러싼 외적 상황이 그를 수렁으로 몰아갔을지언정 창작적 역량 자체는 오히려 만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의 위기는 10년 전의 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상품으로서의 ‘천재성’을 구축하기 위한 장치로 자기의 양극성 장애를 ‘과시’하고, 이것으로 기행과 타자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고, 이로 인해 동료 존 레전드에서부터 아내 킴 카다시안에 이르는 주변의 지지자들까지 잃어버린 카녜는, 이제 근작들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 그 지긋지긋한 ‘천재성’마저 고갈되었다는 의문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신경한 기획과 자기변명으로 가득 찬 20분 짜리 “ye”(2018, GOOD), 그리고 순전히 자기만족만을 위한 듯한 이후의 가스펠 앨범들에 만족하는 팬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이러한 시기, 발매 일정의 숱한 번복과 온갖 루머들, 그리고 프로듀서 릭 루빈의 긴급한 도움 속에 어렵사리 세상의 빛을 본 “Donda”. 결국 앨범 커버도 없이 발매된 이번 앨범은 확실히 근래에 그가 만들었던 음악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물론 카녜에게서 더 이상 “Yeezus”(2013, Def Jam) 같은 혁신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오랜만에 진지한 태도로 작업실에 돌아온 카녜는, 어머니에 대한 헌사를 두 시간 반 분량의 방대한 작품으로 준비하며 흑백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여전히 가스펠이지만, “The Life of Pablo”(2016, GOOD)로 가스펠-프로그레시브 힙합의 서사시적 상을 처음 드러낼 때의 야심이 있는 가스펠이고,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의 맥시멀리즘에서 “Yeezus”의 텍스쳐까지, 카녜의 팬들이 그를 사랑했던 지점들을 군데군데에서 보여주는 가스펠이다. 앨범의 트랙 ‘Come to Life’나 ‘No Child Left Behind’에 다다르면, 과거 그가 ‘Ultralight Beam’에서 선사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층위의 영적 황홀감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onda”의 결함들은 여전히 이 앨범을 청취하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분명히 “Donda”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이상 듣기 몹시 힘든 앨범이다. 특히 후반부의 ‘pt. 2’ 트랙들은 정말 쓸데 없는 사족이다. 어머니를 기억하다가 갑자기 중간중간 자기과시의 샛길로 새는 것도 이상하다. 한 때는 힙합 씬의 호모포비아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카녜가, 이 앨범에서는 공연장의 관중들에게 “에이즈 및 성병 환자, 게이, 문란한 여성을 제외하고 손 들어라”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는 다 베이비와 숱한 여성 학대와 성폭력 가해 혐의의 한 가운데에 있는 마릴린 맨슨에게 일자리를 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인디펜던트 지는 젠더폭력에 대한 반대와 거부를 명확히 하는 퍼포먼스의 일종으로서 이 앨범에 0점을 줬고, 비록 “Donda”를 올해의 앨범 중 한 장으로 꼽기는 했지만 인디펜던트 지의 그런 선택에는 동의와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13. “Black Metal 2”, Dean Blunt (Rough Trade)

  

  “Black Metal 2”는 딘 블런트라는 영국 출신 아트 팝 뮤지션이 내놓은 앨범인데, 여러모로 특이한 지점이 많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짧은 러닝 타임이다. 우선은 EP가 아니고 정규 앨범이라는데 30분은 커녕 20분을 겨우 넘긴다. 10개의 트랙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의 길이도 대부분 1분에서 2분 안팎이다. 앨범을 한 바퀴 돌리고 보면, 결과적으로 각 트랙들은 하나의 트랙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모여서 앨범 전체를 하나의 곡으로 만든다. 다른 하나는 이 앨범이 여러 장르음악들을 종횡무진하며 들고 오는 레퍼런스들이다. 이 앨범에서는 샘플리델리아 힙합, 얼터너티브 R&B, 포티스헤드를 위시한 영국 트립 합과 다운템포, 케이트 부시의 “Hounds of Love”(1985, EMI)를 연상케 하는 오케스트라 활용, 드림 팝의 몽글몽글한 기타 톤과 나른한 보컬을 한꺼번에 듣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름처럼 블랙 메탈 앨범은 아니다. 조쉬 하미의 이글스 오브 데스 메탈이 데스 메탈 밴드가 아닌 것처럼. (?)



12. “Heaux Tales”, Jazmine Sullivan (RCA)


  올해 초에 발매된  R&B EP  장에  평단이 마구 들썩였고, 우리의 피치포크 미디어는  앨범도 아닌 EP 감히 올해 최고의 앨범에 선정했다. 온갖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상을 휩쓴 것은 물론. 이런 현상에는  이유가 있고, “Heaux Tales” 분명 하이프에 부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이 EP를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1998, Ruffhouse)과 비교하며 재즈민 설리번을 “로린 힐의 재림”이라고 평가했다는데 이러한 수사는 “Heaux Tales”의 성격과 스타일을 묘사하는 데 어울리는 것 같다. 탁월한 보컬과 정합적인 서사로 가장 위대한 힙합 솔 컨셉트 앨범이 된 “Miseducation…”과 “Heaux Tales”는 여러모로 닮아 있다. “Heaux Tales”는 일단 EP의 형식으로 나왔지만 30분이라는 정규 앨범에 손색 없는 러닝 타임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풀어 간다. 여기에서 재즈민 설리번은 “여성”, “흑인”, 곧 “흑인 여성”인 자신이 어떻게 자기 확신을 찾아가는지, 여성을 ‘구획’하는 남성 지배 너머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지를 일관성 있는 서사로 보여주기 위해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한 편 “Heaux Tales”는 완성도 높은 옛 솔 음악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을 한 방에 해소해준다. 확실히 EP의 어쿠스틱한 사운드는 근래의 실험적이고 전자적인 PBR&B 스타일보다는 디안젤로나 로린 힐, 푸지스 풍의 아름다운 90년대 네오 솔 감성 위에 머무르고 있다.



11. “kick iiii”, Arca (XL)

  

  아르카가 야심차게 발매한 “KiCk” 5부작의 네 번째 파트는 얼터너티브 R&B나 M83 류의 슈게이징-신스트로니카, 혹은 (특히 신스의 질감 측면에서) 뷰욕의 근작들을 연상케 하는 몽환적인 멜로디 메이킹에 힘을 준다. 덕분에 연작들 중에서 대중적 접근성이 가장 좋은 앨범이 만들어졌다. 아르카를 트랙 단위로 듣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Esuna’나 ‘Queer’ 같은 트랙들은 싱글 컷을 하기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디스포리아를 프라이드로 전화시키는 ‘Queer’의 가사, “Tears of power, tears of power - I got tears like a queer - Queer power…”는 앨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10. “Glow On”, Turnstile (Roadrunner)


  전통의 메탈 레이블 로드러너에서 조금은 특이하게도 팝적 감각으로 무장한 희대의 포스트 하드코어 명반이 나왔다. 앳-더 드라이브 인의 “Relationship of Command”(2000, Grand Royal) 이후 가장 흥미로운 포스트 하드코어 앨범으로까지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흔한 멜로딕 하드코어, 혹은 이모코어 앨범들과 구분되는 “Glow On”의 충격은, 캐치함과 팝적 감각 그리고 펑크의 본능이 무엇 하나 죽지 않은 채 놀라운 균형 속에 제 색깔을 낸다는 데에 있다. 발라드 트랙 ‘Alien Love Call’ 같은 데에서 특히 부각되는 드림 팝-슈게이징 톤 메이킹의 나른한 청량감은 몰아치는 리프들이 주는 흥분과 자유자재로 교차한다. 싱어롱이 가능한 간결하지만 멜로딕한 펑크 풍의 후렴은 선배 하드코어 펑크 밴드 라이즈 어게인스트의 대중적 호소력을 연상시키며 ‘파티장에서도 모쉬 핏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의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올해 “Glow On”과 비슷한 포스트 하드코어 경향 위에서 슈게이즈와 노이즈 실험을 결합하며 신선한 사운드를 들려준 더 암드의 “Ultrapop”(2021, Sargent House)이 균형과 접근성 측면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면, “Glow On”은 상대적으로 익숙하지만 결점 없이 완성도가 높다.



9. “Pray for Haiti”, Mach-Hommy (Griselda)


  뉴 저지 출신의 아이티계 미국인 래퍼 마크 하미가 웨스트사이드 건과 함께 만들어 낸 “Pray for Haiti”는, 웨스트사이드의 전작 “Pray for Paris”(2020, Griselda)와 함께 그들이 설립한 레이블 그리젤다 레코즈 특유의 환각적인 코카인 랩 사운드의 정점을 선보이는 새로운 명반이다. 묵직하지만 단점으로서의 투박함보다는 세련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드럼 샘플링을 중심으로, 동시대 힙합의 유행 따위는 철저히 무시한 채 비릿한 누아르의 맛을 그리며 제 갈길을 가는 붐뱁 인스트루멘틀이 다져지며 “Pray for Haiti”의 사운드적 근간을 구성한다. 마크 하미의 랩과 보컬 톤은 인스트루멘틑과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무게를 유지하며 자기 서사를 진술하고 크리올(아메리카 식민지 원주민과 유럽인들의 혼혈) 정체성에 관해 사유하는데, 이러한 특징은 한 편 상대적으로 피치를 높게 잡는 웨스트사이드 건의 랩이 피처링 된 ‘Murder Czn’이나 ‘Rami’ 같은 트랙들에서는 일종의 대비로 드러나며 소소한 재미를 준다. 완성도 측면에서는 올해 최고의 힙합 앨범으로 고민 없이 꼽을 만한 앨범.



8. “I Don’t Live Here Anymore”, the War on Drugs (Atlantic)

  

  브루스 스프링스틴에서 올해로부터 딱 10년 전 발매된 본 이베어의 2집에 이르기까지, 컨트리와 포크의 정서를 두루 수용하며 만들어진 따뜻한 록 음악의 손길이 건네는 위로가 그리웠다면, 유명세를 차근차근 쌓아 온 워 온 드럭스가 모두의 기대 속에 내놓은 이번 신보는 그 바람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I Don’t Live Here Anymore”는 옛날 허트랜드 록이나 U2의 “The Joshua Tree”(1987, Island)가 선사했던 서툴고 투박한 낭만, 더 내셔널의 앨범들이 가졌던 덤덤하고 따뜻한 호소력, 필 콜린스적 80년대 팝 발라드 정서, 그리고 오늘날 발매되는 인디 록 앨범들의 프로듀싱 완성도와 세련됨까지 갖추고 나온 올해 최고의 록 마스터피스다. 귀에 확 들어오는 집중력을 만들어주는 사운드는 아니다. 하지만 편안함과 포근함을 가지고 통째로 들을 수 있게 설계된, 크리스마스에 모닥불 앞에 둘러 앉아 듣고 싶은 앨범이다.



7. “Hey What”, LOW (Sub Pop)


  얼터너티브 씬에서 시류와 상관 없이 묵묵하고 성실하게 디스코그라피를 쌓아 온 로우에게 꾸준한 지지를 보냈지만, 그들의 올해 신보를 들으면서는 경이로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사족 없이 텍스쳐에만 집중해 얻어낸 앨범의 노이즈 사운드는 내가 음악을 만들면서 항상 구현하고 싶어했던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었고, 노이즈 텍스쳐에 겹쳐진 보컬은 절묘했으며 또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방법론으로만 작업을 마무리한 것도 놀라웠다.  


  기타의 디스토션 사운드를 형해화하여 늘어놓고 딜레이로 글리치가 파도치게 만드는, 결과적으로 리프 단위로 구분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노이즈 인스트루멘틀이 로우 신보의 사운드적 토대이자 정체성이다. 이것은 로우를 대표하는 두 명반 “I Could Live in Hope”(1994, Vernon Yard)와 “Things We Lost in the Fire”(2001, Kranky)가 보여주던 잔잔하고 몽환적인 드림 팝/슬로코어 사운드와는 전혀 다른 지점 위에 서 있다. 그들이 예컨대 전작 “Double Negative”(2018, Sub Pop)에서 이러한 근간 위에 앰비언트 요소를 적절히 배치하며 종종 선보였던 노이즈 사운드가 이번에는 앨범을 극단적으로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Hey What”은 로우의 디스코그라피는 물론, 근래의 얼터너티브 씬에서도 가장 비전형적이고 신선한 음악을 들려준다.



6. “Valentine”, Snail Mail (Matador)

  

  데뷔 앨범 “Lush”(2018, Matador)가 발매되었을 때, 스네일 메일의 린지 조던은 시가렛 애프터 섹스처럼 페티시즘적 태도를 취하지도 진부하지도 않은 자기진술적 드림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었다. 올 해 뒤이어 발매된 2집 “Valentine”은 팬데믹의 고독 속 더욱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나왔다.


  90년대 슈게이징의 로맨티시즘과 오늘날 인디 팝/싱어송라이터 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매력을 빚어내는 것은 스네일 메일이 이전에도 보여주었던 장기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그러한 감각이 한층 더 성장해 아직도 앞날이 밝은 뮤지션 린지 조던의 창창한 장래를 보여준다. ‘Light Blue’처럼 간소한 편성의 포크 트랙에서는 린지 조던의 보컬리스트적 면모와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면모가 동시에 빛난다. ‘Glory’ 같은 트랙에서는 크런치한 리프 메이킹과 몽환적 공간감이 멋지게 어울리는 가운데 린지 조던의 달곰씁쓸한 보컬이 겹쳐지며 페이브먼트에서 슈게이징 밴드들에 이르는 90년대 얼터너티브에 대한 향수를 짙게 자극한다. ‘Ben Franklin’에서 관능적인 베이스 라인 위에 펼쳐지는 신스 사운드는 테임 임팔라의 탁월함을 연상시킨다.



5. “Carnage”, Nick Cave & Warren Ellis (Goliath)

  

  광기의 닉 케이브가 돌아왔다. 앰비언트 경향에 치중했던 지난 3연작에서 닉 케이브는 고통을 덤덤히 씹어 넘기는 초연한 노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Push the Sky Away”(2013, Bad Seed Ltd.), “Skeleton Tree”(2016, Bad Seeds Ltd.) 그리고 “Ghosteen”(2019, Ghosteen Ltd.)에 이르기까지, 닉 케이브는 아들을 잃는 와중에도 예전처럼 아픔과 정동을 즉자적이고 야수적인 방식으로 내뱉기보다는 그 숱한 상실과 아픔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것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들을 덤덤히 위로하는 어른의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오랜 동료 워렌 엘리스와 공동 명의로 발매한 이번 앨범은, 그렇지만은 않다. 오케스트라와 앰비언트 전자악기의 배치를 결합하는 근작들의 경향을 계승하지만 때때로 80년대의 닉 케이브가 가지고 있던 짐승의 이빨을 드러낸다.


  “Carnage”는 첫 트랙 ‘Hand of God’에서부터 몰아치기 시작한다. 폭풍처럼 자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오케스트레이션은 마치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음악이 취하는 전략처럼 거대한 보편의 성스러움을 구축하고 그것으로 청자를 압도하고 깔아 뭉갠다. 그 속을 뚫고 나오는 닉 케이브의 간만에 날 선 보컬은 사자후를 내뱉으며 감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경외감을 선사한다. 비트 문인들의 서사나 닉 케이브 본인의 소설 속에서 표류하는 팔루스적 주인공들을 연상시키는 ‘Old Time’을 지나, ‘White Elephant’ 쯤에 이르면 “너를 씨발 쏴 죽여버리겠다”는 닉 케이브를 만날 수 있다.


  “Carnage”는 때때로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특유의 성스럽고 고귀한 아우라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번개를 던지는 제우스의 모습과 참회의 먼 길을 떠난 구도자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경박한 모습의 닉 케이브는 등장하지 않는다. 존재의 소중함으로 돌아와 기도하는 마지막 트랙 ‘Balcony Man’이 끝나면, 어느새 우리 눈에는 눈물이 자연스레 고여 있다.

 


4. “Jubilee”, Japanese Breakfast (Dead Oceans)

  

  재패니즈 브랙퍼스트의 디스코그라피에 드디어 화사하고 충만한 봄이 찾아왔다. 다양한 색채의 감정들이 혼재삽화처럼 뒤섞였던 이전의 앨범들을 뛰어넘으며 새로운 곳에 도착한 “Jubilee”는 근래의 그 어떤 인디 록 앨범들보다도 넘치는 생동성을 가지고 있다.


  재패니즈 브랙퍼스트의 두 앨범 “Psychopomp”(2016, Dead Oceans)와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2017, Dead Oceans)에는 서울에서 태어나 필라델피아와 오리건을 넘나들던 미셸 정미 조너의 경계인적 정체성이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물음의 상태로 드리우고 있었다. 그 때까지 한 가지 색으로 환원되지 않았던 재패니즈 브랙퍼스트의 로-파이 음악은 이제 밝고 진한 노란색 물감을 칠한 채 도약하고 있다.


  선공개된 싱글 ‘Be Sweet’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테임 임팔라가 “Currents”(2015, Modular)를 발매했을 때 보여줬던, 이다지도 이념형적인 팝 페티시즘과 유사한 정점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독적인 베이스 리프 위에서 신스 팝을 미래적 감각과 교차하며 선보이는 레트로 아방가르드 트랙은 80년대 뉴 웨이브 클럽 음악의 댄서블함과 슈게이징의 몽환적 잔향 그리고 천진난만함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공개된 앨범은 환희에 찬 행진곡 같다. 하지만 가볍지만은 않다. ‘Posing in Bondage’에서 미셸 조너는 완성도 높은 앰비언트 사운드 위에서BDSM의 수행성을 알레고리로 탁월하게 활용하며 “When the world divides into two people – Those who have felt pain and those who yet to… – And I can’t unsee it, although I would like to – Posing in bondage, I hope you come soon…”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맺음에 대한 놀라운 성찰을 보여주는 진술을 한다. ‘Sit’이나 앨범의 마지막 트랙 ‘Posing for Car’에서는 과거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 만들었던 노이즈와 퍼즈 중심의 슈게이즈 기타 톤을 매력적으로 재활용하고 끝끝내 터트리며 서정적 인스트루멘틀의 깊이를 보여준다.


  재패니스 브랙퍼스트의 앞선 앨범들의 경계인적 혼란에 슬픔을 더했던 것은, 미셸 조너가 음악을 시작하던 시기 공교롭게 경험했던, 어머니가 고향에서 머나먼 곳에서 맞이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미셸 조너는 우리에게 어떤 해방감을 이야기하는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 “CALL ME IF YOU GET LOST”, Tyler, the Creator (Columbia)

  

  올해 힙합 씬의 왕관은 자신이 ‘랩도 잘 하는 래퍼’였다는 사실마저 새삼스레 증명해내며 화려하게 돌아온 타일러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한동안 얼터너티브의 방법론을 경유하며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집중했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이번에는 특유의 빼어난 사운드는 유지한 채 랩을 다시 음악의 중심으로 가져와 힙합 다운 힙합 명반을 만들어냈다.


  본작을 관통하는 것은 타일러의 새 페르소나 ‘타일러 보들레르’다. 빠리를 산책하는 샤를 보들레르의 만보객적 시선을 연상케 하는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새 페르소나는,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라는 본래의 자아와 분리되기보다는 성공한 뮤지션이 되어 여유롭게 세계여행을 하고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을 즐기며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하는 지금의 타일러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길을 잃으면 연락하라”는 앨범 제목부터 앨범 커버를 장식하는 타일러의 여행자 신분증 같은 앨범의 많은 것들은 일관된 미학과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앨범을 가지고 진행한 라이브 공연을 보면, 호텔 수하물 캐리어 따위의 소품들로 연출하는 느긋하고 호화로운 여행의 분위기가 매력적으로 만들어지고 그걸 신나게 연기하는 타일러가 귀엽다(?).


  오토튠도 보컬도 거의 없는 랩 중심의 앨범 설계, 붐뱁의 영향을 받아 어쿠스틱 베이스 드럼과 스네어 중심으로 짜인 묵직한 비트, 신스와 브라스로 색칠되는 때때로 나른하고 환각적인 멜로디들은 복고적 힙합 음악을 재발명의 경지로 끌어 올린 웨스트사이드 건을 떠오르게 한다. 이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또 다른 인물 디제이 드라마가 참여한 오프닝 트랙 ‘SIR BAUDELAIRE’는 웨스트사이드 건의 작년 믹스테잎 “Flygod Is an Awesome God 2”(2020, Griselda)의 두 번째 트랙 ‘Micheal Irvin’을 그냥 통째로 샘플링한 것이다. 사람들의 발을 묶어버린 팬데믹 따위는 쿨하게 개나 줘버리는 트랙 ‘LEMONHEAD’의 당당한 사운드를 구성하는 것은 브라스 리프다. ‘HOT WIND BLOWS’에서는 갑자기 튀어 나온 릴 웨인이 옛날처럼… 아니, 옛날에는 호불호를 갈리게 했던 특유의 얇고 경박한 랩 톤마저 다듬고 나와 빡센 라임을 휙 선보이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CALL ME IF YOU GET YOU LOST”는 여행이 어쩌고 롤스 로이스가 저쩌고 하며 플렉스와 허슬도 할 줄 알지만, 스토리텔링도 할 줄 아는 앨범이다. 예컨대 8분의 방대한 길이를 자랑하는 킬링 트랙 ‘WILSHIRE’에서는 여행지에서 마주친 인연이 스쳐 지나가고, 사랑을 놓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놀랍고 구체적인 묘사력으로 하나 하나 풀어내는데 여기에서 감정의 변화를 그리는 타일러는 로맨스 영화의 각본가나 시인 같다.



2. “Promises”, Floating Points, Pharoah Sanders &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Luaka Bop)


  어디 가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사실 나는 파로아 샌더스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로아 샌더스는 무려 존 콜트레인이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그의 세션으로 명성을 떨친 테너 색소포니스트였고, “Karma”(1969, Impulse)와 같은 본인의 클래식 그리고 앨리스 콜트레인과의 협업을 통해서는 아예 ‘스피리추얼 재즈’라는 장르의 이름을 만들기도 했던, 그만큼 ‘고전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그는 여든의 나이에도 정정하게 살아있었다. 죽은 사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


  앨범 발매 소식을 듣고 파로아 샌더스가 여전히 작업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도 놀랐지만, 더욱 뜨악했던 것은 그가 일렉트로니카 DJ 플로팅 포인츠(샘 셰퍼드)의 팬을 자처하며 그에게 먼저 협업을 제안하고 또 그의 독립 레이블에서 앨범을 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몹시나 파로아다운 일이기도 했다. 젊은 프로듀서 플로팅 포인츠가 15년도와 19년도에 각각 발매한 정규 앨범은 포 텟을 연상시키는 (마치 유리알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는) 탁월한 IDM과 공명하는 앰비언트 사운드를 담고 있었고, 파로아 샌더스가 동양적인 스케일과 충만한 공간감의 텍스쳐에 색소폰을 얹으며 영적인 아방가르드 재즈를 만드는 방식은 앰비언트의 문법과 여러 모로 맞닿아 있었으니.


  이후 순식간에 앨범을 듣고 난 뒤 느낀 것은, 앞서 언급한 시시콜콜한 호사가적 이야기들은 모조리 필요 없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숨막히는 경이로움이었다. 총 9개의 ‘Movement’로 구성된 연주곡 모음은 마치 스티브 라이히의 실험이나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처럼 간결한 테마를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맴돌게 하고, 똑같은 테마가 반복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이것이 변주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며 소리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하지만 이 앨범은 마치 포스트 록처럼 차곡차곡 쌓은 앰비언스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일순간 터트려,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황홀경을 선사한다. 예컨대 ‘Movement 6’의 종반부는 말러에게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압도의 미학을 뿜어낸다. 한편 특유의 노회함과 완숙함으로 앨범에 알 수 없는 깊이를 더하는 파로아 샌더스의 색소폰 연주는 앨범이 갖는 아름다움의 성격을 자연의 거대함으로부터 신적인 영역으로까지 이끌어 온다.


  우리 시대에 파로아 샌더스가 내놓은 새로운 불멸의 클래식. 이런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축복받은 것이다.


1. “Fatigue”, L’Rain (Mexican Summer)

  

  케이트 부시, 뷰욕, FKA 트윅스의 탁월함을 뒤 이을 새로운 아방가르드 팝 ‘아티스트’의 등장.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판타스마고리아. 르레인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브루클린 출신의 타자 칙은 아직 대부분의 리스너들에게 생소한 뮤지션이지만, 그가 내놓은 두 번째 정규 앨범 “Fatigue”는 다양한 장르를 경유하며 사이키델릭한 감각의 경지를 보여준다.


  “Fatigue”는 다양한 장르를 정합적으로 삼키고 내뱉는다. R&B의 호소력과 드림 팝의 나른함을 넘나드는 르레인의 보컬은 아방가르드 재즈 풍의 브라스, 네오 소울에서 슈게이징에 이르는 몽환적인 사운드 메이킹, 부유하는 앰비언트 텍스쳐가 경합을 벌이는 가운데에 당당히 끼어들고 끝내 어울린다.


  르레인은 사이키델릭 솔의 대부 마빈 게이에서 핑크 플로이드 출신의 천재 시드 배릿, 그리고 2000년대 네오 사이키델리아의 주역 애니멀 콜렉티브에 이르는 사이키델릭 음악의 영향을 두루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르레인은 어떤 지점에서는 이미 그들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마치 영적인 ‘챤트’처럼 들리는 ‘Find It’의 후렴과 뒤따라 연출되는 아방가르드 재즈 브라스의 카타르시스는 곧 가스펠로 황홀하게 마무리되며 사이키델릭 음악의 어떤 선을 넘어선다. ‘Blame Me’를 비롯한 여러 트랙들에서는, 숱한 얼터너티브 R&B 명반들을 들으면서도 쉽게 경험하지 못했던 솔 보컬과 리버브 사운드의 환상적인 비례가 돋보인다. 동료 인디 록 싱어송라이터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다채로운 인스트루멘털이 장점인 ‘Two Face’같은 트랙도 있다. 영가의 성스러움을 앰비언트 문법으로 풀어내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감정을 르레인은 앨범의 마지막 트랙 ‘Take Two’까지 탄탄하게 끌어오며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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