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살에 펼쳐진 시급길
본투비 서울, 그것도 서울 종로에서 유년시절부터 대학까지 다닌 나는 지방러의 외로움이나 자취생의 설움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다. 유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부모님이 학비도 대주셨고, 조금의 노력이라고 하면 생활비와 학원, 여가 등을 위한 알바를 꾸준히 한 정도였다. 물론 영화 제작사, 홍보사로 시작한 월급쟁이의 삶이 넉넉했던 건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었고 함께하는 동료가 있었다. 이제 시작이고, 내 또래 친구들도 다 이제 막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33살의 ‘처음’은 흔하지 않았고, 힘들다고 주변에 쉽게 투정 부리기도 조심스러웠다. 내뱉고 나면 내 결정을 후회할 것만 같달까. 그리고 서울은 더 이상 일상이 아니었다. 일이 구해지지 않아 연락 오는 대로 다니다 보니 대부분 경기도로 일을 하러 다녔다. 수원 광교, 하남 미사, 화성 동탄 등. 이러다 신도시란 신도시는 다 가보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처음 꽃집에서 알바를 하면서 대학교 졸업 이후 오랜만에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빨고 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기분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찾아왔다. 통창 먼지와 손자국 지우는 것에 열중하다가, 쓰레기를 한가득 실은 카트를 끌고 지하로 가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나보다 한참 어린 경력자의 예민한 태도와 텃세를 실감할 때, 은행에서 적금을 위한 카드를 만드는데 담보가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을 때도, 주 5일 일하고 싶어도 아무도 뽑아주지 않을 때, 다음 달 생활비를 채우기 위한 단기 알바를 꾸역꾸역 지원할 때, CCTV로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월급이 제때 들어오지 않을 때 등등등 일하는 순간에는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퇴근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엔 초라해지지 않게 스스로를 다독여야만 했다.
서른 너머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건 예상한 것보다 더 단단함이 필요했다. 회사의 안정감, 소속감, 비전과 성장 같은 건 없다. 꽃 자영업자의 밑에서 일한다는 건 실력이 될 때까진 잡무만 하거나 실력을 갖춰도 최저 시급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마저의 잡무도 경쟁이 치열하다. 좀 더 이론적인 전문성을 갖추는 방법엔 정식 스쿨을 다니는 방법이 있겠지만, 교육과 현장은 또 다르기 때문에 나로서는 교육에 몇 년을 투자하기보다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배우는 걸 택했다. 물론 퇴사 전에 12회의 클래스를 듣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꽃놀이’ 었던 것 같다. 물론 많은 걸 배웠지만 현장과의 괴리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원하던 업계에 들어가 보니 전에는 몰랐던 외부의 편견에 부딪히기도 하는데, 디자인 기술을 베이스로 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인들은 도매에서 싸게 떼다가 파는 과일가게처럼 취급하기도 하고, 늘 꽃을 만지니 여유로운 일이라거나, 부모 잘 만나 적당히 편하게 취미처럼 일하기 위해 혹은 예쁘고 보기 좋은 직업을 위해 선택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한편으론 내 자격지심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더 신경 쓰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편견이 이유 없이 생기진 않았겠지만, 억울하게도 내가 겪은 꽃일은 막노동이다. 매일 접하는 물과 흙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고, 웨딩 세팅과 철거는 중노동에 가깝다. 정말이지 꽃만 예쁘다. 꽃을 즐기는 건 내 몫이 아닌 게 문제고. 사실 아예 모르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잡일이 더 많은 하루를 보내고 퇴근할 때면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왜 몸 쓰는 일을 하냐며, 머리가 나쁜 거냐고 묻는 대사가 떠오르곤 했다.
이렇게 1년 반을 고군분투했다. 경력이 적기 때문에 직원 채용은 면접까진 봐도 합격하는 곳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갈 때쯤 다시 회사 취직을 제의받았고 더 늦으면 정말 다시 직장인은 힘들 수 있겠다 싶어 고민이 되었다. 그 해 연말정산을 하는데 소득이 1천만 원이 채 안되었다. 사실 직원이 돼도 월 200만 원 수준이라 녹록지 않긴 마찬가지였기에 우선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지금까지 쌓은 경험으로 회사를 다니며 주말 알바를 병행하기로 했다.
돌아온 회사는 이제 영화 쪽 일은 아니라서 동기부여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광고 바잉 업무는 전에 하던 일의 한 파트라 적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영화 마케팅이 재밌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프로 야근러의 피폐함도, 그렇다고 다시 꽃에 올인해서 파트타임으로 버티는 외로움도 모두 자신이 없어 어중간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지금 타협한 삶이 백 프로 만족스럽냐면 사실 이 선택도 늘 불안의 연속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여전히 꽃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건 재미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꽃으로 돈을 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