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위로받은 날
흐린 날씨 탓인지, 계절 탓인지 자꾸 마음이 먹구름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두 달 잘 달려왔는데 덜컥! 마음에 브레이크가 걸려버렸다.
‘이게 다 무슨 의미지?’
의미를 운운하는 걸 보니 현타, 현실 자각 타임이 왔음을 직감했다. 낯설지 않은 이 느낌. 내 의지를 시험하는 최고의 빌런 현타의 등장이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일에 나도 모르게 욕심이 자란 탓이겠지.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현타가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래도 이번엔 조금 늦었네?’
나는 의연히 현타를 맞이했다. 그나마 찾아오는 주기가 길어졌음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예전엔 현타로 인해 무기력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극복하려 애쓰기보다 잘 구슬려서 보내는 편을 택했다.
핑계 김에 쉬어가는 게 좋겠다 싶어 마음먹었던 일들을 잠시 내려놨다. 창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문득 에픽하이의 노래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가 생각났다.
음원 어플에서 노래를 찾아 플레이를 클릭했다. 헤드폰을 쓰고 볼륨을 높여 짱짱하게 듣고 있자니 마음이 웅장해졌다. 비트와 함께 가사가 내 귀와 가슴에 꽂혔다.
인생 뭐 있냐.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인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에픽하이는 내 마음을 콕 짚어 노래하고 있었다. 그래, 인생 뭐 별 건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인 것을. 살다 보면 현타도 맞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엎어지고 넘어지고 그럼에도 다시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가보는 거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역시 제목 그대로 비 오는 날 듣기 딱 좋은 노래였다. 내친김에 빈지노의 <젖고 있어>를 찾아 플레이했다.
툭 툭툭 툭
툭 잎을 건드리는 빗방울에
온 세상이 멍이 들듯
다 젖고 있어.
두 노래를 무한 반복하며 한껏 센티해진 나를 보고 남편이 물었다.
“비 때문에 그래?”
글쎄. 비 때문인지, 노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현타 때문인지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그냥 노래가 좋고, 순간의 분위기에 젖었을 뿐. 그렇게 음악을 듣고, 소설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새 나라의 어린이도 아닌데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대로 아침 루틴을 수행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첫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음악에 위로받은 적 있어?”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 위로! 바로 그거였다.
‘아, 내가 음악에 위로를 제대로 받았구나!’
나는 내가 위로받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음악에 위로를 받다... 정말 멋진 말이지 않은가! 나는 흥분을 감추지 않고 얼른 답했다.
“어제! 어제 딱 이 노래 듣고 위로받았어!”
플레이리스트에 있던 에픽하이의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를 첫째에게 들려줬다. 그런데 첫째는 어떻게 딱 마침 이런 질문을 했을까? 신기했다. 역시 우주의 기운이란 게 있는 걸까?
노래를 듣는 첫째의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나는 우주의 기운을 느끼며 또다시 마음이 웅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