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성장한 엄마들 모임
아이들을 키우며 알게 된 특별한 인연들이 있다. 애들 때문에 알게 됐지만 애들과 상관없이 엄마들끼리 친해진 경우가 그렇다. 그동안 많은 인연들이 스쳐갔지만, 채에 걸러지듯 내 곁에 남겨진 모임은 몇 안 된다. 그중 ‘짐보리 모임’이 있다.
‘짐보리’는 2~3세 때 많이 다니는 일종의 체육활동으로 첫째의 첫 번째 사교육이자, 사회활동이었다. 내겐 처음 접하는 엄마들의 세계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프고 수줍고 설렜던 그때,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짐보리 수업을 마치고 첫째를 막 카시트에 앉혔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Y 엄마!”
처음엔 나를 부르는지도 몰랐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지 않았던 나는 나를 부르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계속되는 부름을 듣고서야, ‘아, 나?!’ 황급히 돌아봤던 기억이 있다. 지금 ‘짐보리 모임’의 최고 언니인 S의 엄마였다. 언제 어디서 누구누구 엄마들과 보기로 했는데 같이 보자고 했다. 내향성 인간인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언니가 어찌나 고맙던지, 나는 흔쾌히 좋다고 답했다.
“내 이름은 M이에요. Y엄마 이름은 뭐예요?”
언니의 그 물음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누구, 누구의 엄마로 낯설게 불리면서, 또 그 낯섦에 막 적응해가고 있을 때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을 묻는 사람은 그즈음 언니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짐보리 모임’이 시작됐다. 아들 엄마 셋, 딸 엄마 둘. 각자 첫째 아이를 둔 젊은 엄마, 초보 엄마였던 우리는 직업도 환경도 다 달랐지만, 그 시절 힘이 되어준 육아 동지들이었다.
그리고 12년이 흐른 지금, 나는 두 딸의 엄마가, W는 세 딸의 엄마가, L는 남매의 엄마가 됐고 이젠 사춘기 자녀를 둔 중년의 엄마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초보 딱지는 떼지 못했다. 첫째가 태어나고부터 엄마로서 맞이하는 매일매일은 여전히 낯설고 새롭기만 하다. 매일 성장하는 아이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그러니 내일은 더 다를 테지. 사춘기 1일 차 딸 엄마는 처음이라, 사춘기 2일 차 딸 엄마는 처음이라, 3일 차 딸 엄마는 처음이라... 그러니 죽는 날까지 초보 엄마일 수밖에.
지난 주말, 코로나로 미루고 미루던 ‘짐보리 모임’을 오랜만에 가졌다. 애들이 커가면서 각자 생활이 바빠지다 보니 ‘자주’가 ‘종종’이 되고 ‘간간이’가 되면서 차츰 모임의 주기가 길어졌다. 그래도 최소 1년에 두 번씩은 봤는데 이번엔 무려 1년 만의 모임이었다.
우리는 그간의 공백을 끝도 없는 대화로 채워갔다. 애들 근황부터 각자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공유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흥분했다. 이유식 메뉴를 공유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사춘기를 공유하고, 이성교제에 대한 보호자의 입장을 고민하는 사이가 됐다.
M언니는 팻 로스의 슬픔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토닥토닥) W는 육아에 지쳐 일탈하듯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잘 했어, 친구!) L은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아들의 관심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멋지다!) P는 아들의 연애담에 어디까지 쿨해야 할지 몰라 고민 중이었다. (이미 쿨내 진동) 각자의 이야기이자 모두의 이야기였다.
목이 따끔따끔해질 만큼 수다를 떨고서야 자리를 정리했다. 멤버들과 헤어져 혼자 슬슬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육아 동지에서 인생 동지가 됐구나.
아이들이 크는 만큼 우리의 관계도 성장했음을 느꼈다.
때 이른 가을 한파가 막 시작되던 지난 토요일, 안양천 칼바람을 뚫고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춥지만은 않았다. 든든한 인생 동지들 덕분이었으리라. 당분간 엄마로서, 나로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