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후서 5장 17-19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다가오는 10월, 교회에서 사랑 나눔 축제를 하는데 그 축제의 의미에 대해 설교하는 자리였다.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베푼 아버지처럼, 99마리가 아닌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의 하늘에서의 잔치처럼 전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을 위한 잔치요 이전에 은혜 안에 있다가 나간 자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요 또 우리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이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으니 우리도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교회의 목적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공동체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충만한 것을 누리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의 사명을 이룰 것인가?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가졌으니 화목케 하는 능력도 주어졌다. 바로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감동으로 해야 한다.
17절의 '새것'이 된 나를 보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과 하나님을 화목케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내 안에 행하신 새로운 일들을 그들에게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로마서 8장 1-2 절의 말씀처럼
믿는 자들은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지배와 보호를 받고 결코 정죄받지 아니한다.
이전 것은
갈라디아서 5장 19-21 절에 보듯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이며 요한계시록의 짐승을 섬기는 자들이 행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것에 만족하며 그것들을 가치 있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며 이생의 자랑인 것이다. 그러나
새것은
갈라디아서 5장 22-24절에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이 이전과 달라진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 믿기 전후의 나의 가치관을 적어보라.
그 변화된 이유는 바로 예수님 덕분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셨듯이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것을 전도할 때 이야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며 그 사람이 예수가 누구냐 하거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것처럼 "와서 보라" 라고 하라.
당신은 예수를 믿어서 왜 좋은가?
우리 목사님은 당신의 예를 드셨다.
첫째,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어서 늘 평안하다. 즉 지진이 일어나도 두려움이 없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받아 누릴 수 있다. 천지를 지으신 내 아버지께서 탐심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면 내 필요한 것들을 주신다.
셋째, 이 땅을 떠나 내 아버지의 집-갈 곳이 있어 좋다.
예수를 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임하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전도할 때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질 까 염려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다.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세요?"라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라. 그러면 이유를 물을 것이고 그때 예수를 믿고 난 후의 내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전도다.
----->>>여기까지 2023년 9월 10일 우리 교회 최*근 목사님 설교를 요약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십계명의
구절로 찬송한 적이 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하늘에서의 통치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었던 거구나. 하는 깨달음.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읽어야 된다. 기도해야 된다. 하나님을 만났느냐. 방언을 받았느냐... 등등 주변에서 압박이 많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다.
그것뿐인가? 십일조를 안 하면 지옥 간다. 십일조를 안 하면 그것만큼 물질적인 손해를 본다. 방언을 받아야 성령을 받은 것이니 꼭 방언을 받아라.. 등등. 예수님 외에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던 거다.
해서 예수님의 영접했을 때의 첫 기쁨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그라들었다.
특히 내가 이전에 다니던 첫 교회의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책 여러 권을 들고 내가 일하는 학원까지 찾아왔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꽤 유명했던 조*기 목사님이 추천한 책으로 그 책 중 한 권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안 하면 지옥 간다는 내용들이 너무 상세히 적혀있어서 이후부터 십일조를 두려움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학원이 안될 때는 은행에 있던 돈을 털어서까지 십일조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정말 갈등이 심했었다.
하지만 이미 습관적으로 해왔던 것이어서 그것을 안 하면 다른 것을 잃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목사님들의 설교도 반반 갈렸다. 안 해도 된다. 해야 된다로.
나중에는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 생명의 근원이 예수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 않은가 하고. 그때부터 내 마음에 작정한 대로 십일조를 하게 되었다.
새벽 설교자 이*우 목사님께서는 십일조 논쟁에 대해 본인은 하나님이 좋으니까 십일조를 한다고 못을 박으셨다. 나도 그 목사님처럼 하나님이 좋아서 하는 십일조를 하기를 바란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저주를 받는 다면서 이것을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말들을 듣고 갈등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직분을 가지고 다투고 그 직분을 세상의 감투처럼 여기고 성도들을 무시하고 상처 주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오늘 우리 목사님께서 갈라디아서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후를 적어보라고 하셨는데 나는 정말 자신 있게 내가 놀랄 정도로 많이 변했음을 주장할 수 있다.
내 딸이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내 안의 그 많은 변화된 삶 안에서도 옛것의 잔재가 남아 나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예전부터 교회의 직분에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관심 없다. 직분자는 하나님을 위해 더 헌신하고
더 낮아져야 하는 것이고 아직은 내가 그 직분을 감당할 그릇도 아니기 때문이다.
수입이 생기면 십일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헌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주변의 믿는 자들 특히 권사나 장로의 직분자들이 해주는 말들을 많이 믿고 그대로 실행했다. 그런데 그 말들 안에는 예수님의 사랑보다는 내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더 많았다.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이 크고 놀라운데 그 이름 외 다른 것이 더해져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평가절하하는 십자가의 희생의 크고 위대함을 모르는 것이며 이단이다.
예수 그 이름 하나 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열심히 나를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 전후, 삶의 방향이 바뀐다.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