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오쌤 이야기
실행
신고
라이킷
18
댓글
2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미셸 오
Sep 17. 2024
추석이 지나는 중
생애 최초 나의 부모님이 안 계시는 추석을 맞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제 서서히 엄마에 대한 슬픔이 가셔지는 것 같았는데 올초,
아버지마저 이 세상을 떠났다.
추석이 다가오기 전에는 아버지도 없는 추석을 어떻게 맞이할까 좀 두려웠다. 그래서
미리 여행도 다녀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추석.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달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작년에 아버지와 함께 담갔던 김장김치는 아직도 내 입맛을 돋우지 못한다.
아버지가 텃밭에서 가꾼 강낭콩은 앞으로 몇 년을 더 나의 냉장고에서 버텨줄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버지가 없는 추석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
브런치에 글을 오래도록 못 쓰고 있는 것도 아마도 내 가슴 깊은 곳에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기억들이
출렁이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나는 독자들을 의식하고 억지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장기간 글을 올리지 않음에도 나를 기다려주는 독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오래전 티브에서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
상봉한 가족들이 기쁨에 겨워 뛰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같이 눈물을 흘렸다.
가족이란 저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우리 엄마는 생전에 자식들을 많이 낳기를 원하였지만 아버지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
아 잘 기르자'라는 정부의 권유를 잘 따랐다.
나의 동생은 외국에 산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그의 국적은 이제 한국이 아닌 지 오래다.
나는 나의 가족관계 등록증을 보고 아버지 어머니 사망, 내 이름 아래 남동생의 국적상실이라는 도장을 봤을 때
세상에
혼자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생각해 보니 세월이 물같이 흘렀다.
어느 목사님의 말처럼 어려서 부모님의 보호아래 있을 때는 세상에 대한 설레는 희망으로 부풀었는데
성인이 되자마자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마라톤을 했다.
정신없이 뛰어오다 보니 지금 이 상태다.
내 나이가 되면 거의 양부모님이 안 계시거나 한쪽 부모님만 계신 것을 안다.
그들은 다 어떻게 이 시간들을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세상을 살만큼 사시다 가셨다.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는 몇 달간의 고통의 시간만 없었다면 나는 덜 괴로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그냥 편안히 죽지 못하고 병으로 고통받다가 죽는 것이 진짜 불만이다.
죽음을 기다리던 수많은 환자들이 있던, 병동에서 지냈던 시간들의 기억이 늘 힘들다.
잊어버리고 싶다.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다.
나이 드시고 홀로 계신 아버지를 늘 걱정하며 옆구리 한쪽이 결리듯 신경 쓰며 살았다.
올해 돌아가시기 5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번씩 입원하셨었다
처음엔 폐렴. 두 번째는 기흉. 세 번째 심장 부정맥. 그리고 네 번째는 폐암이었다.
그런데 이 네 번째는 아버지는 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티다가 얼굴과 상체가 풍선처럼 부푼 상태서 연락을 했다. 이미
온몸에
암이
전이된 상태였다.
작년에 김장김치를 할 때도 아버지는 밤에 옆구리가 걸려 잠을 못 이룬다는 사실을 숨겼
다.
그때 아버지는 김장용 풀죽 쑨 솥을 옮기다가 베란다에서 넘어지셨다.
아버진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올랐다. 아버지도 우리도 아버지의 숨찬 것이 심장의 혈관이 좁아져서 그런 것이라고. 몸을 따습게 하라고.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고만 했
다.
신발이 미끄러워서 넘어진 것이
아니었
다. 아버지의 몸은
암이 제법 전이된 상태였던 것이다.
의사는, 아버지가
가망은
없지만 또 항암을 해서 나은 사람도
있다고
희망을 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암이 온
몸
에 전이되어 이제 죽을 날만 기다려야 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은 얼굴과 몸은 방사선 치료 일주일 만에 가라앉았다.
아버지는 이전보다 숨쉬기가 수월해지자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항암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항암 부작용까지 겹쳐 돌아가시고 말았다.
병상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버지의 머리는 수없이 빠졌고 아버지의 한쪽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풀었다. 항암 부작용이었다.
아버지는 그 부은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 부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게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내게 무어라고 말을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듣자 아버지는 절망하며 고개를 베개에 떨구어 버렸다. 그렇게 이틀 후 돌아가셨다.
나는 숨이 끊어진 아버지의 시신을
보며
소리 내어 울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아버지의 얼굴이 목각인형 같았다.
엄마에게는 그리 좋은 남편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딸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목이 멘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다.
올해 첫 추석을 보내었으니 내년의 추석은 올해보단 덜 아프겠지.
keyword
아버지
추석
엄마
미셸 오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직업
교사
현재, 고등부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독자
2,014
제안하기
구독
매거진의 이전글
독수리같이 날아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