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4가지 키워드는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둘째는 인간이요 셋째는 예수그리스도이며 끝으로는 교회라 할 수 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에서 여호와는 '만물의 주인이시요 창조주'이시며 창세기 3장 13절에서 그분은 ' 스스로 있는 자'고 지, 정, 의를 갖추신 분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으로서 자기를 설명하고 자기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출애굽 3절 1절-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직접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분의 목적과 계획을 설명하시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 찾아오셔서 자신을 직접 설명하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설득하고 다투기도 한다. 하나님 그분의 목적과 계획을 설명했을 때 모세는 순순히 하나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설득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들은 하나님을 배우게 하고 우리 인간을 더 높은 경지-하나님의 영광의 존귀함과 은혜의 부요함-로 이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뭔가를 얻으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힘써 알기를 원한다.
바른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런 현실 안에서 살게 하는 지를 알고 깨닫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인간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온 땅을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복을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적 속성이 부여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 것이 그것이다.
인간을 이 땅의 유일한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한 것이니 인간에게 하나님과 다를 바 없는 신적 위상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아들과 아버지는 신분에 있어 동등하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 데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자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창조하였다. 이 믿음과 사랑의 교제를 위해 주어진 것이 바로 자유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선택의 자유를 주시고 그 결과를 보게 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택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고 가죽옷을 입히셨다. 그리고 메시아를 보내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 인간을 찾아오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그분을 분리하지 않으신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자발성이 필요하다. 삶의 자리에서 힘들 때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느냐고 질문하게 되는 데 이때 자신이 하나님을 어디까지 의뢰해야 되는지 배우게 된다.
우리 삶에서 당하는, 우리의 선택의 연약함으로 오는 환경의 불합리함-고통이나 질병 죽음까지도-이 있다.
이때 우리는 그 자리에까지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선악과 안에 숨겨져 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혈육은 끊으래야 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사랑하고 믿음을 나누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허락된 자유를 통해서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유를 거역하는 것으로 선택하고 그 결과는 죽음으로 왔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그 존재가치가 소멸된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힘든 삶을 살아가지만 이를 통해 구원자를 갈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다.
이 깨어진 관계는 메시아를 통해 회복된다.
셋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신이 인생 속에 들어와 인간처럼 고통에 몸부림치고 죽음까지 경험한 경우는 예수님 외는 없다
십자가- 는 '너희가 나를 버리고 간 모든 것이 상실된 자리까지 내가 가겠다'는 의미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지 보여준다.
십자가와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을 보여준 역사적 실재다!
세상의 일들 때문에 힘들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러면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내려간 절망의 자리에 찾아와 우리를 끌어올린다.
넷째 교회
위의 모든 것을 배우는 곳이 교회다. 즉 하나님의 충만함을 맛보고 확인하도록 세우신 곳이 교회이며 그래서 감사한 곳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요 찬송임을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의 충만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출생에서부터 시작된다.
영적사춘기가 있다. 자기 판단과 자기 가치로 수없는 질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자유가 우리를 훈련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자라나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로하나님을 알아가야 되는 데까지 자라지 못하면 안티가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한다. 자라지 못하면 가시가 되어 주변에 상처를 입힌다.
지혜가 자라 청년의 때에 이르고 이후는 부모로서 가르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면 부모로서 책임지고 용납하고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 모든 영적단계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충만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하는 것이 기독교다.
이상은 우리 교회 최상근 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제가 은혜로운 말씀으로 받아서 올립니다.
올 한해는 아버지의 죽음도 있었고 15년 만에 호주에 다녀왔고 여러가지 자잘하고 힘든일. 기쁜일이 혼재하였다. 그런데 추석무렵에는 예전에는 전혀 느끼지못했던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언제나 명절이면 찾아가야 할 부모님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런데 이제는 없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고 외롭게 했다.
'부모님만큼 든든한 나의 울타리는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내 양 옆의 쌍날개같던 아버지 어머니의 부재는 나를 절망 속으로 끌어들였고 말씀읽기는 물론 기도도 소홀해졌다.
그렇게 일년이 후딱 지나고 있다.
2024년 일년은 아버지의 부재를 오롯이 느끼며 울고 슬퍼한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이 한 해가 두 달도 남지 않은 오늘.
교회에 가는 것마저 흥이 나지 않던 차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과 관심을 말씀으로 받으며 많은 위로가 되었다. 나의 진정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날 절망에서 이끌어 올리시는 구나. 내가 지금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나는 진정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했던가...이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가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그것을 고민해야 겠다고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