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다 해변을 마지막으로 1박 2일 여정은 마쳤다. 버스는 히타카츠 항에 우리를 내려주었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으로 돈가스를 먹었다.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식사다.
나는 원래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데다 식은 돈가스가 입에 맞지 않아 거의 남겼다.
식후 가이드가 추천한 아이스크림집 앞으로 갔다.
두 개의 아이스 콘 그림이 그려진 광고판 앞에서 무엇을 먹을지 머뭇거렸다.
"너무 양이 많은데 우리 하나 사서 갈라 먹을까?"
"작은 걸 먹자. 큰 건 좀 비싸네.."
그때였다. 가게 안에서 중년의 여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큰 게 더 맛있어요. 우유가 더 많이 들었어요."
우린 그녀가 단번에 주인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우유가 더 많이'....라는 말에 혹해버렸다.
"큰 걸로 4개!"
잠시 후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각자 한 개씩 들고 길을 건넜다. 그런데 습한 바람에 그것이 녹아서 대책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도저히 입과 눈을 뗄 수 없는 아이스크림의 구애. 여차하면 손에 다 묻을 기세여서 아이스크림에 입을 거의 붙이고 걷는다. 그렇게 버스 앞에 도착하니... 우리가 탔던 버스기사가 창문으로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타지 말라는 강한 눈빛. 우리가 버스를 탈 듯 말 듯 망설이자 아예 타면 안 된다는 손짓까지 한다. 네네.. 알았다고요... 이젠 남은 아이스크림을 각자 입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손에 끈적하니 아이스크림이 묻었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배표를 나눠주었다.
이젠 남은 시간 면세점( 터미널 바로 맞은편)에 들러 필요한 선물을 사고.. 시간에 맞춰 승선하라고 일러준다. 우린 버스 아래칸에 있던 캐리어를 끌며 면세점으로 갔다.
작은 공간에 또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는 일본제 손톱깎기를 샀다.
쇼핑을 마친 후 우린 터미널 2층 객실에서 대기했다. 출발시간이 되니 날은 더 흐렸고 보지 않아도 파도가 심하게 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우린 미리 멀미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1층부터 2층계단까지 우리가 탈 배에 승선할 사람들은 넉 줄로 서서 심사를 받았다. 드디어 배에 올랐다. 좌석표는 올 때와 같았다. 아직까지 파도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아무래도 항구 안이라 그렇겠지.
드디어 불안한 출발.
역시 예상대로 배가 항구밖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롤러코스트가 시작되었다.
올 때보다 심한 파도였는데 이미 경험치가 있어 그런지 덜 무섭긴 하다. 주의하라는 방송이 계속되고 거센 파도는 선체를 마구 후려갈긴다. 앞으로 나가려는 동력과 옆에서 밀어대는 파도가 강하게 부딪칠 때마다 앞으로 나가려는 배가 자꾸 거센 파도에 튕기는 것이 영 불안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아주 얄팍해지는 순간이다.
역시 이럴 때만 나의 기억력과 상상력은 최고치를 달린다. 배가 전복된 사고들... 이후에 내가 얼마나 바닷속에서 견딜까. 비상상황을 대비해 이 많은 사람들을 감당할 보조배는 충족할까...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이 깊은 바다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등등... 바로 내 옆자리에서 멀미가 심한지 봉지에 입을 갖다 댄다.
올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토를 하고... 안내방송이 나오길. 파도가 너무 심해서 배의 속력을 낮춘다고 한다. 그리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아이들과 노약자를 보호하라고 몇 번이나 방송이 나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아... 으으.... 아이고..."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15년 전, 거제도 외도에 간 적이 있었다.
유람선을 타고 섬으로 갈 때는 파도가 높긴 했어도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외도 관광을 마치고 오는 뱃길에는 역풍이라 그런가. 파도가 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배가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선장이 운전대를 놓고 선실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앞 선창에 뭐가 걸렸다고 한다. 선장이 일을 보는 동안 정지된 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려서 배 안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렸다. 그때 곁눈으로 바라본 파도는 배보다 위에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가츠시카호쿠사이의 그림 속 거대한 파도와 비슷했다. 곧 배가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파도였다.
수영 선수라 한들 저 깊은 바닷물에서는 한낱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일 뿐. 10분을 넘기기 전에 물속으로 빨려들 것 같았다. 다행히 선장이 운전대를 잡자 배는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후 외도를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때 배는 50여 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작은 유람선이었지만 이 배는 그에 비하면 아주 큰 배다. 나는 이 바닷길에 익숙한 선장의 노련함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두려움의 싹을 자르고 억지로 잠을 청하고 눈을 뜨고 하기를 1시간 30 여분. 뇌와 내장들이 바닷물에 탈탈 털렸다.
저 멀리 도시 야경의 불빛들이 다가왔다. 조용했던 시골마을을 떠나 찬란한 문명의 불빛을 마주하는 것 같은 부산의 항구였다.
배에서 내린 우린 멀미로 지칠 대로 지쳐서 너나 할 것 없이 말이 없었고 저녁식사는 개뿔. 바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