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2시.
나는 루즈한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소파에 늘어진 채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이런 남편을 만나고 싶다'는 회사 여직원들의 성화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폭삭 속았수다'를 정주행 했다. 대체 어떤 남성상이 나왔길래 다들 '관식이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연애 실패자인 나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집돌이 모드로 소파를 유영하는 나의 핸드폰에 여사친 '초선'의 이름이 떴다. 주말에 잘 전화하지 않는 그녀의 이름을 보자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놀리듯 말을 건넸다.
"어이, 우리 초 선생 주말 오후에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 요즘 연애가 잘 안 되시나?"
하지만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는 잔뜩 겁을 먹고 떨리고 있었다.
"야, 허저! 장난치지 말고, 나 지금 사고 났어. 앞 차가 갑자기 급정거해서 나도 멈췄는데 범퍼를 박은 것 같아!"
"뭐라고? 지금 어딘데! 보험사에 연락은 했어?"
"응, 바로 하긴 했는데, 앞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좀 무서워. 여기 너네 집에서 가까운 데거든? 좀 와줄 수 있어?"
나는 바로 차 키와 지갑을 들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하지만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기검사가 며칠 남지 않아 차를 정비소에 맡겼기 때문이다.
"아, 맞다. 내가 지금 차가 없다! 일단 지하철 타고 바로 갈게!"
다급하게 말하며 복잡한 사거리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금이었다. 친구가 무서운(?) 상대방 앞에서 떨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역까지 전력 질주해 하행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급한 마음에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려던 찰나, 나는 내 걸음 속도를 통제하지 못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려던 순간 몸의 균형감각을 잃고 기우뚱했다. 그 순간, 대충 귀에 꽂아두었던 블루투스 이어폰 한쪽이 '툭'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갔다.
이어폰은 발판 위를 미끄러지더니, 하필이면 에스컬레이터의 끝부분에 안착했다. 그 흰색의 작은 물건은 에스컬레이터가 평평한 바닥 틈새로 맞물려 들어가는 경계선 위에서 팽이처럼 데구르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멈춰 서서, 마치 시안폭탄처럼 반판 틈새 위에서 회전하는 내 이어폰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한 번의 잘못된 움직임만으로도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갈 아찔한 상황이었다.
발판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역무원실 인터폰을 눌렀다.
"저, 죄송합니다. 에스컬레이터 좀 멈춰주세요! 물건이 끼일 것 같습니다!"
역무원님이 달려와 상황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하행선 에스컬레이터, 안전 문제로 비상 정지합니다."
"크르르릉.... 꽈광!"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가 멈췄다.
큰 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그들의 얼굴에는 호기심 반 짜증 반이 섞여있었다. 다행히 주말이라 그런지 역 내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에스컬레이터에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면 그 상황은 더 민망하고 아찔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주말 오후의 신스틸러이자 민폐유발자가 되었다.
역무원님은 멈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조심스럽게 이어폰이 돌아가던 위치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틈새에 멈춰 있는 이어폰을 꺼내주셨다. 기름때와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위험했습니다. 다음부턴 뛰거나 걷지 마세요."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연신 사과와 감사를 전하며 그 자리를 떴다.
초선이 있는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보험사가 와서 모든 상황을 거의 정리한 상태였다. 상대방 아저씨들은 그냥 평범한 회사원들이었다. 초선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얼굴이 벌건 나를 보며 핀잔을 주었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잖아!"
나는 에스컬레이터의 흑역사를 털어놓았다.
"아, 진짜! 나 너 구하러 뛰어오다가 완전 민폐남 됐어! 내 에어팟 한쪽이 에스컬레이터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거 구출하느라 지하철 놓치고 사람들한테 눈총 받고 완전 생쑈하고 왔다니까!"
초선은 그 말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라고? 하하하. 웬일이니. 니가 나보다 더 큰 사고를 치고 왔구나!"
"아, 살아생전에 에스컬레이터도 세워보고.... 나 원 참... 창피해 죽겠다."
"너 진짜 레전드다. 대단하셔."
내 에피소드에 긴장했던 초선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아무리 급해도 대중교통 시설에서 절대 뛰지 않겠다고.
그 이후로 내게는 습관이 하나 생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전 이어폰이 제대로 착용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손으로 꾸욱 눌러 확인하는 것이다. 나에게 이어폰 사건은 나, 허저에게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큰 민폐와 창피함을 초래할 수 있는지 제대로 가르쳐준 비싸고 드라마틱한 교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