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의 푸른 밤을 지키던 MBC 청룡 시대부터, 잠실 노란 물결의 LG 트윈스를 지켜온 오랜 서포터다. 내게 야구장은 단순한 스포츠 관람을 넘어 삶의 활력소였다. 내 회사 자리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자에는 '무적 LG'가 새겨진 대형 응원 타월이 걸려있고, 모니터 옆에는 트윈스 응원봉과 미니 헬멧이 놓여 있어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내가 LG 트윈스의 찐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관·장 신입사원 세 명이 우르르 내 자리로 몰려왔다.
"허 주임님, 요즘 야구가 붐이잖아요! 저희도 꼭 한번 직관 가보고 싶어요!"
"분위기가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경기장 가실 때 저희 좀 데려가 주세요!"
회사에 야구 팬이 별로 없어 퇴근 후 종종 혼자서 직관을 다녔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야구 문화를 회사에도 전파할 때가 왔구나!'
나는 야구 응원의 즐거움과 매너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했다.
들뜬 마음으로 금요일 저녁 홈 경기를 예매하고 신입 사원들과 함께 직관을 가는 날.
나는 그들에게 노란 응원 수건을 기념 선물로 하나씩 사주었다. 생각지 못한 선물에 기뻐하며 그들은 수건을 목에 두르거나 손목에 묶었다. 우리는 저녁으로 먹을 치킨과 맥주를 사서 오렌지석 208구역, 열정의 심장부로 향했다.
신입사원들은 경기장에 들어차 있는 수 많은 관중들의 에너지에 압도된 듯 주변을 살펴보며 입을 딱 벌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와~ 주임님! 분위기 진짜 끝내주네요!"
아직 경기를 관람하기도 전부터 그들은 엔돌핀과 도파민이 쏟아지는 듯 했다.
경기는 물 흐르듯 흘러 스코어는 3:2 우리가 한 점 뒤지고 있는 팽팽한 6회말이 되었다. LG의 공격이 시작되자 응원단장의 목소리가 잠실을 뒤덮었다. 1사 주자 1, 3루, 숨 막히는 역전 찬스! 타석에는 해결사 오스틴이 등장했다.
무적 LG의 오스틴 딘!
날려버려라 오스틴 딘!
무적 LG의 오스틴 딘!
날려버려라 오스틴 딘!
응원단장의 선창에 맞춰 노란 수건을 머리 위로 힘차게 돌리며 응원을 이어갔다. 나는 신입사원들에게 시범을 보여주듯, 그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힘찬 궤적으로 수건을 돌렸다.
오스틴의 응원가는 2절을 부를때 박자가 좀 더 빨라진다. 그 음악에 맞춰 내 수건이 좀 더 격렬하게 포물선을 그리던 그때, 앞 자리에서 "아얏!"하는 짧은 비명이 들렸다. 내가 미처 속도 조절을 하지 못한 노란 수건의 끝 부분이 앞 자리의 남성 팬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사과했다. 옆에선 신입사원들도 눈을 크게 뜨고 어찌할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 남성 팬은 "아 괜찮습니다. 근데 좀 살살 하세요. 하하"
같은 LG팬이라는 동질감에서였을까. 그는 쿨하게 이 상황을 넘겨주었다. 나는 꾸벅 사과하고는 응원도구를 내려놓고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다. 신입들에게는 "응원을 하더라도, 너무 흥분하면 안 돼. 그게 응원 에티켓이야"라고 말하며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잠시 자숙의 시간을 가졌지만, 오스틴의 거듭된 파울타구로 6회말 찬스는 계속되었다. 볼카운트 3-2, 투수가 공을 던지고, 오스틴이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
"따~앙~!"
타구가 잠실의 밤하늘을 가르며 쭉쭉 뻗어나갔다! 오스틴은 날아가는 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오른 손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르켰다. 홈런을 확신하는 모션! 좌측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극적인 역전 쓰리런 홈런에 경기는 3:2에서 순식간에 3:5로 바뀌었다.
잠실은 폭발했다. 억눌렸던 함성과 기쁨이 터져 나왔다. 나를 포함한 모든 팬들이 서로 얼싸안고 미친듯이 환호했다. 응원단은 축포를 쏘아올리며 응원가를 다시 불러 오스틴의 역전 홈런에 화답했다.
나도 모르게 흥분에 휩싸여, 응원가에 맞춰 온 힘을 다해 수건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때 수건을 쥔 손에 힘이 풀렸는지 내 손 안에 있어야 할 노란색 물체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미사일처럼 포물선을 그리더니, 앞자리 남성 팬의 머리 위를 지나 더 앞쪽 관중석으로 시원하게 날아가 떨어졌다.
나는 '아...'라고 탄식했고, 도저히 참지 못했는지 신입사원들은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주임님, 지금 축포 날리신 거 맞죠? 하하하"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전 홈런의 기쁨은 잠시, 부끄러움이 온 몸을 감쌌다. 두 번 연속 민폐를 끼친 민망함이 잠실의 역전 함성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앞쪽에 있던 커플 팬은 갑자기 날아온 수건에 당황하며 좌우를 두리번 거리다가 물었다.
"이거 누구 건가요?"
나는 창피함에 손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옆에서 신입사원들이 소리쳤다.
"여기, 이분 거에요!"
야구 응원 문화 전파 계획은 오스틴의 홈런으로 최고조에 달했다가, 나의 '노란 수건 비행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끝이 났다. 나의 과잉된 열정이 야구장 응원문화를 처음 접하는 신입사원들에게 잘 못 전파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경기장에서는 더 이상 액션을 과하게 취하지 않았고, 절제의 미학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실의 노란 물결 속, 꼭 무조건 크게 소리 지르고 과하게 흔드는 것만이 응원이 아니라는 걸 마음 깊히 새겼다. 하지만 심장은 그 누구보다 뜨겁고 간절한, 진정한 마음의 LG팬이라는 걸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