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나 액정 스크린의 입력장치가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우리의 경험 속 가장 친숙한 필기도구를 하나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연필'을 고르지 않을까요.
연필의 기원은 약 2000년 전 그리스-로마인들이 둥근 납덩이를 가죽 위에 문지르는 방법으로 기호를 표현하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중세시대에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납과 주석을 섞은 재료로 심을 만들어 문자를 표현하였는데, 지면 위에 고작 희미한 회색 선을 긋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흑연 연필은 1564년에 영국 캠브리아 산맥에서 질 좋은 흑연이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1565년에는 본격적으로 흑연을 이용한 연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연필심은 동그랗지 않고 네모난 모양이었는데, 이는 흑연을 가공하는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흑연 연필은 1795년에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화가인 '니콜라스 자크 콩테'가 발명했습니다. (소묘 재료인 콩테 Conté 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죠.)
당시 콩테는 새로운 미술도구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었는데,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수 있도록 심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숙제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는 물과 점토 및 흑연 혼합물을 가마에서 1,900 화씨온도로 가열하여 구워내는 방식으로 단단한 흑연 막대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흑연 막대를 목재로 만든 외장재에 끼워 넣자 하나의 도구가 완성되었습니다. 현재의 모습과 유사한 세계 최초의 흑연 연필은 이렇게 탄생되었습니다.
상업용 연필 제조업체들은 흑연과 점토의 비율을 달리하여 연필을 가장 부드러운 9B부터 가장 단단한 9H까지 20가지 등급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H'는 Hard를 'B'는 Black을 의미합니다. 중간단계로서 보편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HB 연필이 주로 학생용과 사무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연필의 왕국, 뉘른베르크
나라마다 고유의 회화 재료가 각기 발전해 왔겠지만, 연필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위치한 '뉘른베르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인 '스테들러'와 '파버카스텔'이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이후로 뉘른베르크에 연필 공장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 북부 해안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길과 파리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의 교차점이 바로 이곳 뉘른베르크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은 유렵 내륙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무역으로 부유해진 뉘른베르크 상인들은 잉여 이익을 동유럽의 광산 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연적으로 금속 제련 기술과 과학 장비의 생산이 가속화되었고, 15세기에 이르러 뉘른베르크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예술과 공예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뉘른베르크가 있는 바이에른 지방에서 흑연이 발견된 것도 연필 산업이 확산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현재 스테들러와 파버카스텔은 연필과 색연필 등 문구 사무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이자 서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다소 생소한 기업이었으나 컬러링북이 유행을 일으키면서 색연필 보급과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최근 '여행드로잉/어반스케치'분야의 성장으로 인해 드로잉 펜인 '피그먼트라이너'로 더욱 친숙한 기업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덧/ 연필의 영단어 'pencil' 은 라틴어 'pencillus'에서 비롯되었으며, 글씨를 쓰기 위해 사용된 작은 펜(붓)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