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회사원 시절부터였다. 출퇴근을 반복하던 빡빡한 시절이었기에 그때의 그림들을 다시 들춰보면, 숨 가쁜 일과를 마친 후 터져 나오는 한숨처럼 그려진 것들이 많았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동선 위의 카페들이 주로 작업장소가 되어주었고, 스케치북 속에는 그곳에서 바라본 도심 속 풍경들이 주로 담겼다.
그림 작가라는 새로운 꿈은 그 과정 속에 피어났다. 퇴사라는 큰 고민을 두고 끙끙 앓고 있다가 어느 날 덜컥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말았다. 티베트로 떠나는 8일간의 여정. 오래 참았던 숨을 힘겹게 터트리듯 떠난 그것은 여행이 아닌 도피에 가까웠다.
비행기는 티베트의 유일한 공항, 라싸의 공가공항에 착륙했다. 라싸는 티베트에서 비교적 저지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발고도가 무려 3,600m를 넘는다.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이 찾아왔다. 우려하던 고산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고산증은 사실 병이 아니다.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의 환경에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편하게 유지하고, 산소를 필요로 하는 격렬한 움직임을 삼가야 한다. 느릿느릿 걷고,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차와 음료 등으로 꾸준히 수분 공급을 해주는 것이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산증 덕분에 몹시 느린 템포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오히려 주위를 더 깊게 관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열린 마음속으로 티베트의 자연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티베트의 여러 풍경 중 가장 마음을 흔들었던 곳은 ‘남쵸’라는 이름의 호수였다. 남쵸는 티베트어로 ‘하늘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티베트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3대 호수 중 하나다.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좁게 이어진 2차선 도로를 휘청휘청 달리다 해발 5000m의 고갯길을 넘어가야 했다. 이제 겨우 4000m 환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도가 높아지자 지긋지긋한 고산증이 다시 찾아왔다.
힘겹게 고개를 넘어가자 저 멀리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팔레트에 있는 가장 푸른 물감을 아끼지 않고 타 놓은 것 같은 아름답고 숭고한 물빛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서니 속삭이듯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늘을 닮은 호수 앞에서 때 묻은 나의 고민은 무척 작은 것이 되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다니던 회사에 마침내 작별을 고했다.
티베트 여행 후 자연이 주는 감동과 그것을 그리는 기쁨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햇살과 바람, 공간을 채우는 소리와 같은 자연의 자극을 섬세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요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홀로 또렷해지는 순간을 즐기는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자연을 그린다. 지금은 서울을 떠나 제주의 오름과 바다가 전해주는 무한한 위로 속에 살고 있다. 더 열심히 관찰하고 치열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나를 품어주는 자연 만큼이나 나의 그림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응원과 격려가 되기를 희망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