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산책 #02
비행기는 부지런히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도착지는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Helsinki. 북유럽 여행의 출발점으로 헬싱키를 선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유럽의 타 국가에 비해 핀란드는 우리나라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인천에서 헬싱키까지의 비행시간은 약 10시간. 물론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한국과 유럽 사이의 거리감을 생각해본다면 감내하지 못할 정도의 긴 시간은 아니다. 핀에어 FinnAir에서 운항하는 인천-헬싱키 간의 직항 노선이 존재하는 것도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짧은 수면과 두 번의 식사를 마친 후 기체가 천천히 선회하며 하강하는 것이 느껴졌다.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함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울리자 가슴이 빠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촌스러운 여행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에 시선을 옮겼다.
헬싱키 반타 공항은 헬싱키 중심가로부터 다소 떨어진 북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일대는 숲과 목초지 그리고 작은 호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란 북구의 하늘과 드넓은 숲 그리고 저 멀리 발트해의 일부가 눈부시게 펼쳐졌다. 빌딩 가득한 김포공항이나 섬 위에 외롭게 세워진 인천공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바다와 숲 사이로 랜딩하는 일련의 과정은 제주국제공항의 모습과 겹쳐져 보이기도 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공항이지만 생각보다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긴 비행 후 마침내 도착한 이곳이 핀란드라는 사실은 입국 심사를 위해 긴 줄을 이루고 있는 중국 단체 관광객 덕분에 잠시 설득력을 잃기도 했다. 평일 오후의 버스터미널 같던 텅 빈 통로를 걸어 입국장을 통과했다.
공항 밖으로 빠져나오자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건물 밖에 나와 있는데도 전혀 땀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난히 지독했던 2016년의 여름으로부터 탈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심지어 약간의 추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제야 내가 입고 온 옷들이 이곳의 날씨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헬싱키에서는 4일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마지막 날은 다른 도시로 이동할 예정이어서 티켓 머신을 통해 3일 정액권을 구매했다. 버스나 트램 등 헬싱키 시내를 오가는 대중교통을 정해진 기간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휴대폰 케이스 뒷면 안쪽에 넣어놓았는데, 버스에 탑승할 때마다 휴대폰을 통째로 내밀어 버스 기사에게 보여주곤 했다. 이렇게 내미는 사람이 드물었던 모양인지 그들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매번 움찔움찔 놀랐다.
공항 앞 정류장을 출발한 버스는 한산한 도로 위를 달려 헬싱키 중심가로 향했다. 좌석에 앉아 배낭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주위를 깊게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도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자작나무 숲. 멀리 있는 풍경이 또렷이 보이는 서늘하고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에 대비된 하얀 구름. 핀란드의 첫 느낌은 이렇듯 싱그럽고 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