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산책 #03
어떤 도시들은
여행을 떠나오기 전과
여행 후의 인상이
다르게 느껴지곤 했다.
여행하기 전의 헬싱키 역시 상상 속에 만들어진 이미지가 있었다. 핀란드는 국가 청렴지수가 높은 동시에 해마다 학업 성취도 세계 1위를 달성하는 교육강국이다. 부러움을 살만한 점들이 많은 나라였기에, 이 나라의 수도인 헬싱키는 어쩐지 세련되면서도 조금은 깐깐하고 새침한 느낌일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느껴본 이 도시의 모습은 상상 속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항구도시임에도 번잡한 느낌이 없는 차분하고 담담한 거리가 인상적이었고, 저녁 6시면 서둘러 문을 닫는 광장의 노점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조용한 구시가지의 골목들은 소박하지만 허름하지 않았다. 파리나 런던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헬싱키는 한껏 멋을 부린 귀부인의 화려한 미소라기 보다는 나를 향해 흔드는 소녀의 순박한 손짓처럼 다가왔다.
헬싱키는 유럽 각국의 수도 중 가장 젊은 편에 속한다. 1550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 왕이 러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처음 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핀란드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었다. 때문에 이 도시는 오랜 시간 동안 스웨덴어 표기인 헬싱포르스 Helsingfors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후 핀란드는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핀란드의 오래된 수도인 투르쿠 Turku에서 이곳 헬싱키로 수도를 옮길 것을 명하게 되었다. 그 시기가 1812년이라고 하니 핀란드의 수도로서의 헬싱키는 20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헬싱키에는 러시아 지배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의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 Aleksei Gornostaev에 의해 설계된 우스펜스키 성당이다. 빨간 벽돌 위에 돔 양식의 지붕이 올라가 있는 모습이 마치 모스크바에 있는 유명한 성 바실리 성당의 동생을 보는 듯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건립된 동방 정교회 성당 중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헬싱키는 여러 개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북유럽의 흰 수도'와 '발트해의 아가씨'라는 이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별명을 되뇌며, 헬싱키 남항 근처에서 분수대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 하나를 찾았다. 헬싱키를 '발트해의 아가씨'라고 부르는 이유인 하비스 아만다 Havis Amanda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네 마리의 물개에 둘러싸인 분수대 위로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모습이지만, 외설적이지 않고 사랑스럽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외형적으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하비스 아만다는 헬싱키의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핀란드 출신 조각가 빌 발그렌이 1908년 파리에서 만든 것인데, 이후 핀란드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바다에서 떠오른 여인' 이라는 이미지가 곧 민족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비스 아만다는 그 자체로 핀란드의 부활을 상징한다.
헬싱키의 첫인상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 조각상의 이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비스 아만다의 따뜻한 미소는 내게 앞으로 다가올 핀란드에서의 여정이 무척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