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모 Mar 18. 2017

사치에의 흔적 찾기

하얀 산책 #04


북유럽에 여러 나라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핀란드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먼저 생겼던 이유는 순전히 <카모메 식당>이라는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는 출연한 배우들의 모습 만큼이나 담백했다. 헬싱키에서 식당을 운영하게 된 세 명의 일본인 여성과 핀란드 사람들간의 에피소드가 주된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2006년에 개봉했으니 어느덧 10여년 전의 작품이 되어버렸지만, 영화 속 풍경을 상상하면 지금도 세 여자의 손으로 두런두런 빚어내는 오니기리의 온기와 알싸한 시나몬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안락한 휴식처를 찾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었던가. 부둣가에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영화 속의 따뜻함이 그리워졌다. 헬싱키에 남아있는 카모메 식당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은 촬영 이후에 핀란드인에게 인수되었고, 카빌라 수오미 kahvila suomi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한동안 운영되었다. 현재는 일본인이 인수하여 다시 카모메 식당 Ravintola Kamome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중이다. 지금은 업데이트가 되었지만 여행할 당시만 해도 구글맵에 바뀐 식당 이름이 반영되지 않아 '카빌라 수오미'라는 옛 이름으로 검색해야만 했다.


서울에 비해 헬싱키는 거대한 몸집이 아니다. 왠만한 명소는 걸어서 가기에 부담스럽지 않았고, 숙소에서 구시가지까지도 트램 한 번에 오갈수 있어 편리했다. 하지만 카모메 식당은 트램을 한 번 환승하고, 다시 10여분을 걸어가야 닿을 수 있었다. 며칠사이 이 소박한 도시에 익숙해진 것일까. 객관적인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음에도 30분 정도의 이동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이따금 내리는 여름비 사이를 걸어 마침내 갈매기 한 마리가 그려진 파란 간판을 발견했다. 씌여져 있는 가게 이름은 분명 카모메 식당 かもめ食堂 이었지만, 내부는 리모델링되어 영화 속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시 비를 맞기 싫었기 때문에 더 고민하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카모메 식당 かもめ食堂


테이블을 둘러보니 예상한대로 동양인 손님이 많았다. 그 사이에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작은 식당에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십중팔구 영화의 영향일테지.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메뉴판에는 영화 속에 등장 했던 오니기리가 보이지 않았다. 현실의 카모메식당은 일식이 아닌 핀란드 가정식을 파는 가게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런치세트로 대구 요리를 주문했다. 북유럽 음식은 건강식 스타일이라더니 과연 조미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맛은 그렇다 치더라도 코스메뉴임에도 양이 너무 적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배고픈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빗속을 뚫고 찾아온 수고로움이 한순간에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맛과 분위기 모두 만족스럽지 않아 섭섭했다. 하지만 이 곳이 상상 속의 카모메 식당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한편으로 다행스럽기도 했다. 실존하는 이 공간은 내 마음속 이미지에 어떠한 간섭도 할 수 없을테니.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토록 찾던 영화의 공간 속에 있었지만,

다시 영화를 보고 싶어져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트해의 아가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