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Blue #20
제주에서 내 고향만큼 마음 푸근하게 하는 동네가 몇 군데 있다. 그중 서쪽에 있는 마을을 고르라면 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고산리를 꼽을 수 있다.
어느 이른 봄에 여동생과 단둘이서 제주에 여행 온 적이 있었는데, 동생이 정한 첫날 숙소가 이곳 고산리였다. 우연히 첫 만남을 한 후 1년 동안 고산리만 다섯 번을 방문했으니, 공항이 있는 제주시 도심을 제외하고는 이곳이 섬 안에서 내게 가장 친숙한 공간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고산리는 여러모로 개성이 강한 동네다. 구릉지대가 많은 제주에서 드물게 넓은 평야와 그 위에 펼쳐진 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제주 서부의 중산간을 연결하는 순환버스와 해안마을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운행하는 서일주 버스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규모가 작지 않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번잡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평야지대에 상가와 주거지역이 넓게 분포하고 있어 마을 어디에 있건 탁 트인 하늘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일몰을 빼놓고 고산리의 매력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제주 본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지를 비추던 태양의 마지막 모습을 가장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오후의 낮고 따뜻한 빛이 너른 고산 평야에 축복처럼 쏟아지는 풍경은 찬란했다. 서쪽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할 때면, 차귀도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기 위해 한걸음에 당산봉이나 자구내 포구로 달려가곤 했다.
행복했던 오늘과의 가장 황홀한 이별이 있는 동네.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달려가 고산리를 만나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