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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Dec 28. 2016

그리움의 바다

Drawing Blue #19

제주를 잘 알지 못했던 시절, 바다가 던져주인상은 어디서든 대체로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의 것과 땅의 것이 만나는 경계에 서 있노라면 그곳이 어디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 하며 내지르는 한 마디의 감탄사로 그 날의 소감을 대신하곤 했다.


책을 쓰기 위해 제주를 자주 찾게 되면서, 늘 같아 보이던 바다도 섬의 어느 곳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 느낌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다. 나의 개인적 경험이 지배하는 주관적인 견해이기에.

비양도와 금능해변
눈부신 서쪽 바다

이 섬의 모든 것이 낯설었던 오래전 그날, 가장 먼저 만났던 것은 제주의 서쪽 바다였다. 작은 스쿠터에 몸을 싣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제주를 일주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 제주시를 벗어나 처음 마주한 그 눈부신 풍경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협재와 금능 해변이지만, 서쪽 바다 위의 비양도를 만날 때면 그 풋풋했던 순간의 기억이 머리 속에 선명한 영상이 되어 다시 살아나곤 했다. 어느덧 해변의 풍경은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서쪽 바다는 여전히 깨끗하고 영롱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모험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처럼.


관곶의 하얀 등대
외로운 북쪽 바다

내게 가장 낯설었던 것은 제주의 북쪽 바다였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제주시에 그렇게 많이 다녀가면서도 정작 제주의 북쪽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바다였기 때문일까. 일상의 숨 막힘을 떠나 섬을 찾아온 이에게 육지를 그리워하는 북쪽 바다가 큰 매력이 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놀랍게도 올레 18, 19코스를 걸으며 이러한 편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제주로 유배 온 이들이 섬에 첫 발을 였던 곳이 제주시의 동쪽, 지금의 조천리 일대이다. 섬에 막 도착한 유배인들은 그들에게 다가올 낯선 삶에 대한 두려움과 육지와 임금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모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연북정이 다시 복원되어 조천리에 남아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유난히 북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갯바위를 만나게 된다. 제주에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 관곶 혹은 엉장매코지라 불리는 곳이다. 아주 먼 옛날 제주의 사람들은 제주 섬을 창조한 여신 설문대 할망에게 육지와 닿는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 설화의 무대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갯바위를 향해 뻗어 바다까지 나 있는 작은 길은 분명 이 지역 해녀들을 위한 통로겠지만,  그 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고립감이 온몸을 휘감곤 했다. 바다를 향해 북쪽으로 뻗어있는 그 길은 마치 육지와 닿길 희망하는 옛 제주 사람들의 오랜 염원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설화와 역사를 통해 제주 사람들의 삶을 알아갈수록 낯설기만 했던 북쪽 바다는 외로움이라는 정서가 가득한 공간으로 변모해갔다. 

갯바위와 망장포
아득한 남쪽 바다

제주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 제주의 남쪽 바다는 육지에서는 이제껏 보지 못한 바다의 느낌을 전해주었다. 연안의 느낌이 아니라 완연한 남국(南國)의 느낌. 저 멀리 남쪽에서 휘몰아쳐 오는 태풍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곳이기에 바다 가까이에 붙어 서 있는 작은 집들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었다.


그중 작은 해안마을 공천포에는 저자가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다. 썰물이 되면 공천포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낮고 평평한 갯바위가 드러나는데, 이 자연 산책로 위를 걷다 보면 곧 망장포의 옛 포구에 이른다.


 제주의 옛 포구는 보통 안캐-중캐-밧캐로 이루어진 3중의 중첩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망장포는 포구가 들어설 터가 작은 관계로 파도를 막을 단 하나의 구조물만이 존재한다. 망장포는 잘 보존된 1중의 구조로 이루어진 옛 포구이다. 사료적 가치 만으로도 충분히 둘러볼 만 하지만, 포구가 전해주는 인상 자체도 무척 매력적이다. 태평양으로부터 불어닥치는 거친 바람과 파도를 이 하나의 둔턱만으로 막아야 했기에, 그 높이는 높아졌고 그만큼 포구 안쪽은 깊어졌다.


포구를 양쪽으로 감싸고 있는 구조물의 느낌이 마치 아이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바다와 싸워왔던 이들이 만든 소중한 공간을 탐닉하는 것. 달콤한 늦잠을 포기하고, 아침 산책을 다녀오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만했다.

평대 해수욕장
그리움의 동쪽 바다

제주는 섬이라는 특성 상 어디에서든 쉽게 바다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풍경 중에서 유난히 마음 속에 깊이 와 닿는 곳은 제주의 동쪽 바다였다. 동쪽의 작은 마을 중에서도 한동리와 평대리가 가장 마음 속에 깊이 남았다. 행정명으로는 분명 다른 동네이지만, 같은 바다를 공유하고 있기에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그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던 바다는 이곳이 유일했다. 그 앞에 서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눈동자는 깊어졌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았기에 마음이 고요하던 곳.

몰아치는 겨울 바람 속에서도 포근함이 느껴지던 곳.


다시 정신없는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지금

다양한 매력과 숨겨진 이야기로 가득한

제주의 가장 푸르른 곳,

그 섬의 바다가 그립다.

드로잉 제주 / 경향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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