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Blue #22
좋아하는 이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처럼 반갑고 훈훈한 날들이었다. 계절을 가리키는 시계가 갑자기 빨라지기라도 한 걸까. 지난 주말의 서울은 포근한 숨결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절은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주말의 온도가 다정했던 만큼 다시 찾아온 추위는 서글펐다. 아침 공기 속에 입김이 짙게 피어오를수록 더욱 깊이 봄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드로잉 제주>의 마무리를 위해 마지막 취재를 이어가던 작년 3월에 푸른 함덕을 찾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이곳 함덕리를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조천리에서 시작해 김녕리로 이어지는 올레 19코스를 걷다 보니 메마른 땅에 내리는 비처럼 자연스레 이 마을에 스며들게 되었다.
함덕리는 중문, 성산, 표선 등과 함께 제주에서 주요 관광지구로 선정되어 비교적 일찍 개발된 지역이다. 지난 2007년에'대명리조트 제주'가 개관하여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제주의 여느 조용한 해안마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숙박시설이 해안을 따라 길게 들어서 있었다. 바다가 전해주는 느낌은 달랐지만, 화려하고 활기찬 해변은 마치 작은 해운대처럼 느껴졌다.
비췻빛으로 넘실거리는 바다는 이곳의 대표적인 볼거리다. 하지만 함덕의 여러 풍경 중에서도 올레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작은 오름인 '서우봉'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느린 변화의 속도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해변을 따라 나란히 이어지던 길은 바닷가에 솟아난 작은 오름으로 나를 이끌었다. 짙푸른 소나무 숲 아래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어린 풀잎과 노란 유채가 온몸으로 봄을 환영하고 있었다. 계절의 초침이 봄으로 향할수록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고 있는 서우봉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서우봉 입구에서는 제주를 여행하던 두 명의 여대생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오름으로 가는 길이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찰나에 우연히 나와 마주친 것. 올레길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 친구들의 임시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와."
서우봉을 둘러 넘어가는 길은 완만해 숨이 차오르지 않았다. 시선의 높이가 바뀜에 따라 함덕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것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그녀들의 천진함에 웃음이 났다.
노란 유채꽃과 푸른 바다가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 풍경이 시선을 붙들었다. 우리는 봄이 베풀어 놓은 생명 가득한 풍경을 함께 만끽했다.
일행을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봉우리를 무사히 지나 오름을 내려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그로부터 어느새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앳된 얼굴, 맑은 목소리의 이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시 찾아온 추위. 한 번 더 옷깃을 여며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혹독한 시절 뒤 찾아올 작은 희망을 알기에 우리는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겨울의 서울 속에서 봄의 제주를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