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Blue #04
시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지런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2015년의 절반을 소모해 버린 뒤였다.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던 그 즈음에도 나는 역시 제주에 있었다. 미리 계획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서둘러 비행기 티켓부터 끊어야 했다. 제주 올레 10코스가 다가오는 7월 1일부터 1년 동안 휴식년을 갖는다는 소식. 그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까닭이었다.
형제섬이 지척에 보이는 사계해안을 지나 송악산을 올랐다. 정상으로 향하는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 오른쪽에는 송악(松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숲 반대쪽 벼랑 아래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선명하고 푸른 6월의 제주. 손등만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게 안타까워서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다. 두 손 가득 쏟아지는 햇살로부터 이제 막 시작되는 제주의 여름이 느껴졌다.
제주도 방언으로 '물결'을 '절'이라고 한다. 절벽에 부딪히는 절(물결)의 소리가 범상치 않다고 해서 송악산은 '절울이오름'이라고도 불린다. 둘레길을 걷는 동안 파도는 쉴 새 없이 절벽을 때렸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먼곳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둘레길을 절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찔한 절벽과 하얀 파도에 빼앗겼던 시선이 옮겨와 마침내 어느 한 곳에 닿았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그 시선을 한동안 거둬들일 수 없었다.
연보랏빛 수국이 지천에 흐드러지듯 피어있고, 그 뒤로 방목중인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풍경. 숨막힐듯 감미로운 모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릿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 앞에 펼쳐진 그 풍경을 마음에 차곡차곡 담는 것 뿐이었다.
세상에 아름답게 피어난 것들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아 줄 필요가 있다.
냉정, 무정이라는 꽃말이 무색하게도 그날의 수국은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1. 올레 10코스가 1년 동안 휴식에 들어가지만, 기존 관광지였던 송악산, 산방산, 사계해안 등은 여전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송악산 정상 탐방로는 8월을 기점으로 향후 5년간 출입이 통제될 예정인데, 부쩍 늘어난 탐방객과 말·염소 등의 방목으로 인해 정상부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2. 수국이 탐스럽게 피는 시기는 6-7월입니다. 지역에 따라 수국이 지금도 남아 있겠지만, 아쉽게도 전성기의 제주 수국은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