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양보하는 것, 기대하는 것

by 전병조

저는 불합격했습니다. 1월부터 한 분기동안 이용할 수 있는 동네 대기업 헬스장 회원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연중 가장 경쟁률이 높은 시기는 새해가 시작되는 1분기입니다. 야심 찬 다이어트 결심에 실패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벌써 마련됐습니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여러분의 올해 다이어트는 아직 안녕하신가요?


다이어트는 괴롭습니다. 라면, 피자, 케익, 맥주, 당장 먹고 싶은 건 많습니다. 걷기, 달리기, 수영, 줄넘기, 당장 피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지금은 괴롭지만 꾹 참습니다. 더 비싼 건강식단이나 운동 인프라에 돈도 씁니다. 나중에 살이 빠지면 옷도 사입고 연애도 하고 건강에도 좋은 점이 많을 테니까요. 나중에요.


제 지인은 금연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과 연봉 인상을 기대하는 직장인들도 각오를 다집니다. 이들은 굳이 한데 묶어서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입니다. 그래도 찾자고 들면 여기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얻게 될 기쁨을 위해서 지금 누릴 수 있는 만족을 스스로 양보한다는 거죠. 고도로 복잡하고 실행도 어려운 전략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행동은 인류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미와 배짱이》 우화가 보여주듯, 아주 오래 그리고 널리 지지받아 왔습니다. 양보한 만큼보다 더 얻으면 되니까요. 이 개념에 대한 정의를 훨씬 진지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주신 분이 있습니다.


워런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에게 매년 글을 보냅니다. 2011년 연례서한에 그는 투자를 정의했습니다. "버크셔에서 우리는 더 엄격한 접근을 선택합니다. 투자를 현재의 지불 능력을 다른 곳에 옮겨두는 것으로 정의하면서요. 대신 합리적인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미래에 지불 능력을 더 많이 얻으려는 것입니다."


At Berkshire we take a more demanding approach,
defining investing as
the transfer to others of purchasing power now
with the reasoned expectation
of receiving more purchasing power in the future


와, 이런. 아름다운 문장인가보다, 싶지만, 갑자기 너무 많은 질문이 생겨납니다. 괜찮습니다. 당연한 반응인 걸요. 지금부터 구석구석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러 가보겠습니다.


더 많이 주는 냉장고


지불 능력?은 보통 구매력이라고 번역합니다만. 한국어로도 친근하지 않은 단어라 거칠더라도 직역을 보여드렸습니다. 돈 그 자체와 정확히 같지는 않습니다. 특정 시기 어떤 사회의 돈 안에는 사람들이 투영하고 인정하는 교환 비율이 있습니다. 교환 수단이 뭐가 됐든 그 속에 담긴 지불 능력은 시대, 장소, 관계, 법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시간에 따른 지불 능력의 차이는 투자자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버핏의 정의 속에는 지불 능력이 두 차례 등장하는데요. 각각 현재와 미래에 평가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원하고, 제품과 서비스는 증가합니다. 대출도 그에 맞춰 늘어나고요. 그러면 물가는 오릅니다. 현금이 가진 지불 능력은 그에 반비례하여 축소됩니다. 그 속도가 연간 3~4% 정도만 되더라도 경제는 펄쩍 뛰며 놀랍니다. 사실 지불 능력이 조금만 작아져도 예전과 같은 교환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미세한 변화라도 오랜 시간 쌓이면 교환 비율은 상당히 큰 폭으로 훼손됩니다. 나이든 우리의 노동력도 교환 수단의 매력을 잃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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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따른 지불 능력 축소에 저항하는 것이 투자의 동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현재의 지불 능력을 다른 곳에 옮겨두는 것이 투자의 본질이고요.


transfer to others를 ‘타인에게 이전한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번역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곳에 옮겨둔다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투자되는 현금은 믿지도 못할 사람에게 공짜로 넘겨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옮겨둔다는 표현도 마뜩치 않습니다. 직역의 제한마저 없었다면 맡겨둔다거나 바꿔둔다고 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지불 능력을 돌려받으려면 영수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영수증을 자산이라고 부릅니다. 투자금에 내재된 지불 능력은 이전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산으로 모습을 옮겨 저장됩니다.


‘더 많이 얻는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 비교대상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현재와 미래에서 평가하는 지불 능력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물가 상승 때문에 훼손되는 교환 비율을 감안하고도 더 나아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둘째는 (other's'라고 표현된) 검토할 수 있는 후보 자산들 사이의 비교입니다. 지불 능력을 신선하게 저장해 줄 냉장고들 사이에도 성능과 가격의 차이는 있으니까요. 전통적으로는 금, 채권, 부동산, 주식이 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전통적 자산들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대부분의 인류에게 보편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역사가 오래됐든, 생활에 필수적이든, 아니면 둘 다를 통해서든요. 앞으로도 오랜 세월, 각자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지 않습니다. 상실할 유효한 기능이 없거나요. 냉장고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합니다. 그래야 옮겨두었던 지불 능력을 언제든지 쉽게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금이나 채권은 그냥 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지불 능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쉽게 돈과 교환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시장 거래도 활발하고요. 부동산과 주식은 비록 그만한 유동성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금과 채권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죠. 이들도 뒤에 ‘시장’을 붙이면 아주 자연스럽게 발음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시장이 있은 덕분에 가격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자산 냉장고들이 시장 가격을 통해 증명한 성능을 비교해 봅시다.


엽기적인 세계선


애즈워스 다모다란 교수는 웹사이트에 98년치 자산별 가격동향을 정리해 둡니다. 제가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방대한 데이터입니다. 오늘 대표 선수는 넷입니다. S&P500은 미국의 상위 500개 대기업으로 구성된 주가지수, 다시 말해 미국 주식입니다.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0년 만기 국채는 채권입니다. 부동산은 미국 중앙은행에서 발표하는 주택가격 지수 자료를 이용했니다.


2026년 1월에 평가된 금값은 1928년 1월의 210배입니다. 연평균 5.61%씩 오른 셈입니다. 부동산은 56.3배로 커져서 연간 4.2%의 평균 상승률을 거두었습니다. 98년짜리 만기는 아니지만, 채권은 4.53% 속도로 올라 77.2배가 되었습니다. 배당을 재투자한 대기업 주식은 연평균 10.02%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모두 물가를 고려하지 않은 명목 성장률입니다. 고만고만하쥬?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성과는 아래 표와 같습니다. 해당 기간 실제 기록된 평균물가는 3.036% 정도였습니다.


(물가 4%) 금=1.55% / 부동산=0.19% / 채권=0.51% / 주식=5.79%
(실제물가) 금=2.5% / 부동산=1.13% / 채권=1.45% / 주식=6.78%
(물가 3%) 금=2.53% / 부동산=1.16% / 채권=1.49% / 주식=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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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는(해마다 물가상승을 적용한 변화) 거의 엽기적입니다. 주식의 독보적인 성장은 필요한 세로축의 길이를 혼자서 결정해 나갑니다. 그 결과, 나머지 꺾은선들을 무참히 바닥에 찌그러뜨렸습니다. 겨우 4~5% 수익률 격차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완전히 새로운 세계선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림을 아무리 세로로 늘려봐도 나머지 선들이 분리되기는커녕, S&P500의 곡선만 가팔라집니다. 이거, 좀전에 고만고만하다는 평가는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표와 그래프는 공통적으로 주식의 특별함을 드러냅니다. 주식은 인플레이션 시나리오에서도 투자금을 가장 잘 지켜줬습니다. 그리고 작은 수익률 우위로도 장기간에 걸쳐 압도적으로 ‘더 많은’ 지불 능력을 돌려줬습니다. 이들 모두 버핏이 정의한 투자에서 요구한 조건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환호하기에는 이릅니다.


프롤로그에서 ETF의 과거 성과를 보여드릴 때에도 저는 여러분께 의심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왜? 앞으로는? 여기에 설득력 있게 답할 수 없다면 낙관부터 불가능합니다. 다음 글에서 주식의 독특한 성과가 단순한 행운이었는지 실력이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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