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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말 Sep 19. 2020

직장에 소속된 사람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한 선배가 PD라는 우리 직업의 좋은 점에 대해 해준 말이 있다. 이 사회의 아주 낮은 곳과 아주 높은 곳을 다 만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실제로 입사 1년도 채 안됐을 무렵 시사프로그램에 AD로 들어갔는데, 선배가 취재물을 시켜서 난생처음 취재를 하고 구성해서 출연까지 몇 회를 했다. 한 주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가 나와 교육부 차관 사무실을 방문해 차관과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제도가 뭐며 우려되는 문제점은 뭐냐'는 내용으로 방송을 했는데, 바로 다음 편은 추워지는 날씨에 서울역 노숙인들 어디로 가나 하는 주제로 서울역 부근의 노숙인과 자원봉사자들을 취재해 방송하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서 했던 선배의 말이 아주 적절히 들어맞았던 것 같다. 십수 년이 지난 일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교육부 차관님은 아주 공손하고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것 같고, 서울역 앞 노숙인은 나의 질문에 조금 대답하다가 천 원만 달라고 했고 돈이 나올 것 같지 않자 '이 십 원짜리야' 류의 욕을 해댔다. 쓸쓸한 서울역 뒤편에서 누군가가 틀어놓은 조용필의 '허공'이 들려오던 한낮이 생각난다. 천 원짜리 몇 장 쥐어줄걸, 지금 생각하면 잔뜩 긴장한 1년 차라, 내 코가 석자였던 것 같다.



어느 직업인들 비슷하겠지만, 회사나 조직에 속해있으면 나의 직책, 직업, 직위, 소위 '타이틀'이 곧 '나'라는 동일시의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방송사의 특성상 PD는 연차가 적어도 연출 권한을 가지기도 하고, 섭외를 하거나 취재를 하면서 다방면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누군가는 나를 PD님 하면서 깍듯이 존대해 주지만 누군가는 나를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상대해주지도 않아 굽실대며 부탁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자연인으로서의 나,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유명인이나 높으신 분들을 PD라는 명함 덕분에 섭외하고 만날 기회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처음엔 그런 사실이 정말 나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한다. 자리와 나 자신을 혼동하지 말자. 이 자리를 어느 날 훌훌 박차고 나가면 나의 명함은 더 이상 내 이름도 무엇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며 단단히 착각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분노를 넘어 연민마저 느낀다. 저 자리에서 벗어난 순간, 저들은 그렇게 자부하던 자기 자신이 없어졌음에 더 이상 티지 못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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