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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말 Sep 15. 2020

내가 띄운 편지가 오늘은 당신에게 가닿았을까요?


상대가 받아볼지 어떨지 알 수 없는 편지를 매일 보내야 한다면 어떨까?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의 심정은 이와 비슷하다. 아니, 비슷했었다.


'라디오의 매력은 보지 않고 귀로만 듣는다는 점'이라고 말하던 시대가 있었다. 유명 라디오 디제이들이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리던 옛 시절, 부드러운 음성과 사랑에 빠진 소녀팬들은 방송국으로 모 디제이를 만나러 왔고, 마침내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실망했다는 웃지 못할 옛날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요즘은 무엇이든 '보는' 시대니까 라디오도 보여야 한다고 그런다. 처음엔 라디오 부스 안을 CCTV 화질로 보여주던 것에서, 이제는 TV로도 내보낼 만큼 품질을 신경 써서 만드는 프로그램들도 많다. 우리도 보이는 라디오를 할 때는 "지금 바로 유튜브로 들어오세요. 저희 스튜디오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실 수 있어요"라고 계속 독려하는 멘트를 내보내게 된다.


라디오 청취율은 실시간이 아니라 분기별이다 보니 매일매일의 성적표는 나오지 않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프로를 듣고 있나, 그들은 어떤 반응일까 등이 매우 궁금해질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라디오에 접속하는 동시접속자 수와 그들이 채팅창에서 보여주는 반응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옛날에는 엽서나 편지로 보내던 청취자의 의견이 점차 홈페이지 게시판으로 옮겨가더니, 이제는 문자나 앱을 통한 앱 게시판으로 실시간 의견이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방송을 듣고 며칠에 걸쳐 편지를 적어 내려 간 다음,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는 정성을 들여서 제작진에게 오던 청취자의 사연과 의견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동시에 핸드폰 키보드를 쳐내려 가는, 듣는 행위와 반응을 표현하는 행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형태로 바뀌었다. 내가 라디오에 입사했을 때는 이미 이런 편지 시대의 끝물이었다.


청취자들의 반응이야 제작자들에게는 늘 궁금한 대상인 것은 말해 무엇하랴. 그렇지만 실시간으로 뜨는 접속자 수, 실시간 채팅이 꼭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때론 든다.

청취자 입장도 마찬가지로, 스튜디오의 모습이 한두 번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화면을 보면서 듣는 것이 라디오만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는 방법일까?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 나는 가끔 이 라디오를 듣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려 애쓴다. 해가 뉘엿해지는 강변북로 어디쯤을 지나느라 피곤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있는 한 직장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려 애쓴다. 그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우리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 적어도 그 순간만은 유체이탈이라도 해서 바로 그 차 안 뒷좌석에 잠시 타 있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수백 명 수천 명의 청취자들은 살아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 내게 다가온다. 한 명, 한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 살아있는 사람들, 오늘 길에서 내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시기에 공연을 펼치는 뮤지컬배우나 가수들이 무관객 공연을 녹화하여 인터넷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시도를 하였다. 새로운 시도는 신선했지만 배우와 가수들은 관객이 없이 공연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토로했다. 공연은 하는 사람만 있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는 사람이 있고 상호 호흡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서로가 새삼스레 깨달았다고 할까. 우리 직업에 있어서도, 보이지는 않지만 듣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으면 너무 답답한 시대,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 고립감과 기다림견딜 수 없어하는 이 시대에 라디오는  만드는 이에게나 듣는 이에게나 조금 다른 미덕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이메일을 보내도 수신확인이 바로 되고, 카톡을 보내도 상대의 '1'이 사라지는지로 소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라디오는 내가 띄운 편지가 누군가에게 가 닿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계속 편지를 쓰고 또 쓰는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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