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울대 엄마의 공부팁

by 얼룩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어떻게 공부할까? 비법이 있을까? 많은 학생들과 부모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나는 서울에서 외고와 서울대를 나왔다. 소위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에게 '공부 방법'을 질문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 넌 원래 공부 잘했지?

- 넌 머리가 좋으니까.

이런 말은 많이 들었지만 "특별한 공부 비법이 있느냐?"는 질문은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공부 방법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나 가르쳐줄 수도 있다. 아무에게나 가르쳐줘도 되는 까닭은, 이것이 너무 쉬운 방법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반드시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보시길 바란다.




고3 여름방학 때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때는 수학 한 과목 정도만 배우고 나머지 과목은 혼자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방학 보충수업이 끝나면 절친과 함께 동네 구립도서관 학습실에 자리를 잡고 낮부터 저녁까지 혼자 공부를 하기로 했다. 사회와 과학을 끝내는 것이 여름방학 목표였고, 주 교재는 EBS교재였다. 끝내야 하는 교재 양이 있고, 여름방학 날자 수가 있다. 이것을 정해진 날 동안 다 끝내려면 역으로 전체를 나누어서 매일 할당량을 배정하면 된다. 마치 석 달 안에 집을 지으려면 하루에 몇 시간씩 일하시오,라는 과제와 비슷하다. 평일과 주말의 공부량을 고려해서 매일의 할당량을 스스로 배정한다.


여기까지가 내 공부의 비법이다. 너무 쉽지 않은가? 정리하면 이렇다.


1. 일정 기간 동안 끝낼 공부의 목표량 설정

2. 기간 확인

3. 목표량을 기간에 맞게 매일의 할당량으로 분배 : 단, 평일/주말/다른 과목 학원숙제 등 실제 나의 상황을 고려해서 현실가능한 양만큼만 배치



이 방법으로 그해 여름방학에 EBS교재로 사회와 과학을 정리했다. 매일매일의 할당량을 체크해 나가며 보람도 맛보았다. EBS교재는 분량이 아주 많지 않았지만 핵심내용만 들어있어서 알찼던 걸로 기억된다. 선생님들과 언론매체에서 EBS를 활용하라고 굉장히 강조했지만 실감하지 못했는데, 직접 공부하면서 EBS에 대한 신뢰감이 크게 올랐던 기억이 있다.



나의 공부를 두 시기로 나눈다면, 이 방법을 맛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 방법 이전까지는 '공부 방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 방법을 써본 뒤로 요즘말로 '각성'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를 먹고 보니, 이 방법은 (내가 알고 한건 아니지만) 대단한 공부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주도 학습'이기 때문이다. 학생 때는 자기주도 학습이 뭔지도 몰랐다.


일단은 내가 끝내야 하는 목표량의 설정이 중요하다. 공부뿐만 아니라, 직장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중요한 것은 내가 끝내야 하는 일의 목표를 아는 것이랑, 내가 지금 있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공부와 일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나의 현재 지점과 가야 될 목표지점 파악이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점이다.


목표량을 설정하는 것도 사실 쉬운 것은 아니다. 여름방학에는 사회를 한번 끝낸다는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회를 일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자가 진단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학기 중에 긴 호흡으로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흐름이 자꾸 끊겼으니 방학에는 긴 시간을 이용해서 사회를 끝내야겠다는 진단이다. 그래서 1번 단계에서 목표를 설정하다 보면 나 자신의 공부 현황과 상태를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2번에서 주어진 공부가능 일수를 파악한 다음, 3번 단계로 넘어간다. 3번 단계에서는 달력을 직접 종이에 만들어가면서 매일의 공부 할당량을 직접 채워 넣는다. 학원수업 및 숙제가 있는 날도 빠짐없이 표시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어디 가거나 하는 일정이 있다면 그것도 고려해서 내가 실제로 공부를 할 수 있는 날을 파악한다. 이것을 통해 나의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


수험생활이나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나는 '생활의 컨트롤'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이 바로 '시간의 컨트롤'이다. 게임을 해도 좋고 영상을 봐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이 나라는 주체에 의해 컨트롤이 되는 한에서다. 매일매일의 공부 할당량을 내가 스스로 부여하고 체크하는 것은 내 생활과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한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이 할당량은 밀리거나 당겨지게 되어 있다. 처음 계획한 것에서 주로 많이 밀릴 것이다. 그러면 최대한 목표치를 정해진 기한 안에 끝낸다는 데드라인을 유지한 채로 세부적으로 조절해 나간다. 어느 날은 시간을 더 하고, 덜 하고를 나 스스로 조절하면서 공부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나간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90년대 중반에는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말이 없었다. 아마 있었더라도 전문가 사이에서나 있었을지 모른다. 2000년대 이후 나는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말을 들으며, 내가 했던 이 방법이 가장 기초적인 자기주도 학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각 과목의 세부적인 내용을 학원이나 과외,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시간과 생활을 조율하고, 계획하며 통제해 나가는 것은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부모도 한계가 있다. 부모가 계획을 짜 주더라도 대신 공부해서 머리에 넣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부의 주체인 내가 직접 계획을 관리해야 한다.


요즘엔 공부 플랜을 지도해 주는 학원도 있다고 한다. 플랜을 짜는 방법을 배워서 나중에 학생이 직접 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플랜을 계속 받아서 이끌려 가기만 한다면 한계는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을 아무에게나 다 알려줄 수 있는 까닭은, 무척 쉽게 들리지만 누구나 쉽게 실천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 종이에 달력을 슥슥 그리고 할당량을 채워 넣는, 간단해 보이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은 그것부터가 나의 생활을 내가 통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숙제를 하려고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펴는 행동은 이것에 비하면 오히려 쉽고 편하다. 주어진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 작은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시켜서 하는 것과, 내가 주도권을 잡고 시작하는 것이 아주 다른 결과를 만든다. 이것을 직접 경험해 보면 실제적인 결과가 좋을 뿐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이뤘다'라고 하는 엄청난 보람과 성취감, 자존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느낌이 그 이후에도 동기를 부여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봉준호 감독이 사랑한 영화들 도장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