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7세 고시, 아니 그것도 모자라 4세 고시라는 말까지 들린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엔 '저렇게까지 아이를 내몰아야 하나? 난 저렇게까지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주변이나 방송에서 보고 듣는 이야기들을 무심코 흘려보낼 수는 없게 되었다.
인터넷도 보고, 선배 언니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면서도 나는 어디까지 그런 유행을 따라갈 수 있을까, 너무 안달복달하면서 아이에게 크나큰 짐을 지우는 건 아닐까, 아이에게 어떤 방향을 가르쳐줘야 맞는 걸까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이와 함께 유튜브로 이것저것 보다가 EBS에서 과거에 만든 다큐멘터리가 알고리즘에 떴다. 그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대치동 돼지엄마'.
돼지가 새끼돼지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듯이 귀한 입시정보를 다른 엄마들에게 앞서서 알려주고 공유하는 엄마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돼지엄마.. 무슨 웨이터 이름도 아니고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단어 뜻 정도는 아는 중학교 학부모가 되었다.
'새끼 선생'. 주요 과목은 유명한 일타강사의 수업을 듣고 그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그 아래급 선생을 따로 붙여 과외를 받거나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학원을 위한 학원인 셈이다. 이 정도의 단어도 이제 나는 안다.
"맞아, 저렇게들 한다더라. 학원 테스트 붙으려고 따로 과외를 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아이가 옆에서 이런다.
"돼지엄마 저런 말.. 좀 불쾌하다."
"그래?"
"왠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돼지로 변한 아빠 엄마가 떠올라. 음식을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는 장면이 떠올라. 뭐지... 꼭 토할 것 같아. "
이런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아이는, 놀랍게도 그 말이 지닌 숨은 의미를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돼지엄마, 새끼 선생.. 이 말은 노골적이다. 내 자식을 일류대학에 넣는 것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사람이 돼지에 비유당해도 더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어린 짐승을 지칭하는 새끼라는 말이 존경의 표현 선생과 함께 나란히 쓰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노골적일 뿐 아니라, 그 안에는 감추려고 하지 않는 욕망이 담겨 있다. 목적 앞에서는 수단이 문제가 아니라는, 오직 욕망을 위해서 앞다투어 달려가는 느낌이 그 말에 담겨 있다.
돼지엄마, 새끼선생. 나도 이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아이가 말한 그 불쾌함을 분명 느꼈었다. 눈살을 찌푸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스스럼없이 이 말을 쓰는 가운데 어느덧 나도 익숙해졌던 것이다.
아이는 유튜브를 보며 먹던 간식을 내려놓았다.
"아 입맛 떨어졌어."
우리가 입에 담고, 귀로 듣는 말들은 놀랍게도,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의 생각을 반영하고 또한 생각을 만든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욕망들이 자기 계발, 인생을 위한 투자, 성공, 발전 등등의 이름으로 차고 넘치는 시대다. 그러나 욕망은 위험하고 지나칠 때가 분명 있다.
어떤 순간에 불쾌함을 느낀다면, 그때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불쾌함이나 이상함 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불감의 상태다. 그때는 아마도 욕망에 나 자신을 잠식당한 후 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