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11분부터 8시까지 방송되는 시사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대부분의 라디오 PD가 그렇듯이 우리 직업은 장르를 넘나들며 일한다. 오락프로그램, 음악프로그램, 시사프로그램, 라디오 다큐.. 대부분의 라디오 채널이 인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자신만의 장르를 고집하기란 쉽지 않아서다. 스튜디오가 아닌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벗 삼아편성이나 기획 등의 업무를 하며 회사원의 생활을 했던 시절도 지나왔다. 이런저런 업무와 잡다한 프로그램들을 해봤지만,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은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장르다. 그러나 국방부 시계 못지않게 방송국 시계도 멈추는 법이 없고, 오늘도 저녁 6시 11분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을 울리기 위해 나는 출근한다.
제작진이 모인 단체 톡방은 아침부터 울리기 시작한다. 신문, 방송, 인터넷, SNS.. 핸드폰을 통해 분단위로 계속 업데이트되는 시대에, "8시간 후인 저녁 6시에 어떤 뉴스거리를 방송해야 잘했다는 소문이 날까?"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은 이 뉴스가 포털사이트의 전면을 달구고 있는데, 이따 오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조금만 기다려볼까? 하지만 동시간대에 방송되는 비슷비슷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만 네댓 개에 이른다. 우리뿐 아니다. 공중파 TV의 저녁뉴스들, 종편채널의 시사프로그램들이 모두 핫한 인물을 인터뷰하러 달려든다. 기왕 잡을 거면 빨리 잡아야 한다. 각 프로그램들이 섭외전쟁이다. 배팅 같기도 하다. 그래, 오늘 하루의 운을 걸어보자. 오늘 하루도 물먹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신속한 결정과 판단,
점심 메뉴 고를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요즘같이 보고 듣는 미디어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있었을까? 사람 수만큼 많아진 개인방송들까지 생각한다면 보고 들을 꺼리는 지천에 널려 있다. 그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받을까? 사람들에게 선택받기 위한 몸부림은 또렷한 답도 없다.방송을 비롯해, 소셜미디어, 커뮤니티, 카페.. 유튜브와 팟캐스트까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파악해야 할 루트는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간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업무에서 내가 느끼는 어려움 중 가장 큰 것은 '결정과 판단'이라는 영역이다.
하루 단 두 시간의 방송시간 안에 어떤 뉴스들을 다룰 것인가 선택하는 일이 나를 비롯한 스텝들의 판단에 달려있다. 동시다발적으로 생산되는 오늘의 뉴스 중에 청취자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 뉴스는? 듣는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재미도 있어서 채널 돌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사람들이 이 인터뷰를 듣고 몰랐던 사실이나 비리를 새롭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결정과 판단은 큰 고민을 수반하지만, 결정은 신속해야 한다. 몇 시간 후 생방송이다. 고민을 해서 인터뷰할 분을 결정했다고 쳐도 그 사람과 바로 연락이 닿아야 하며 그 사람이 우리의 섭외를 받아주어야 인터뷰가 성사된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 시간대에 의외로 바쁘다. 성사가 되지 않고 거절되는 경우도 아주 많다. 그럴 경우 다른 인터뷰이를 빨리 찾거나, 없을 경우 불가피하게 다른 아이템으로 방향을 신속히 전환해야 한다. 시간이 금이다.
오늘 하루의 과정이 어땠든, 6시 11분이면어김없이 시그널은 올라간다. 하루의 노동이 두 시간으로 평가받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는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가게를 지키며.. 우리 채널을 들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은 만족과 후회, 보람과 자책감 등 복잡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나만이 알 수 있는 성적표를 들이민다.
오늘 무사히 지나갔으면 오늘의 스트레스는 잊자. 지나친 자책감은 내일을 위해 잠시 덮어두자. 내일은 또 내일의 스트레스가 찾아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