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쿡인노동자 Jul 28. 2021

나는 출신고등학교가 두개다

말죽거리잔혹사와 두사부일체

"두사부일체" 라는 영화가 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정준호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로 이후에 속편도 여럿 나왔던 영화다. 이 영화의 배경이 조폭들이 뒤를 봐주고 있는 상춘고등학교인데, 영화 자체는 꾸며낸 이야기이겠지만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내가 다녔었던 S 고등학교의 이야기이다.


영화 포스터는 이렇게 생겼었다


S 고등학교는 당시에 꽤 시끄러웠다. S 씨 문중에서 설립한 고등학교인데, 재단비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고 내가 진학 할 무렵에 그것이 본격적으로 여론화되어가고 있는 단계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론화에 성공하여 (9시 뉴스에 재단비리 관련한 뉴스가 방영되면서) 관이 개입하였고, 끝내는 관선이사가 파견되고 정상화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재학생들에게는 (일반적인 사유로는 불가능한) '동일 학군내 전학' 을 희망하는 자들에 한하여 허가되었고, 부모님과 함께 교육청을 방문하여 동일 학군내 인문계 고등학교 리스트를 쭉 펼쳐놓고, 원하는 학교를 선택하면 인원이 허가하는 한도 내에서 전학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나는 S 고등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동일 학군이자 집에서 제일 가까웠던 H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2학년, 3학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당시에 고1 이었던 나의 또래는 정상화 이후, 절반 정도가 타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기억한다.


당시 대통령이 수사 지시를 할 정도의 큰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에 고1 이었던 우리 반의 담임선생님은 사범대를 졸업하고 ROTC 로 장교 복무를 마치고 갓 부임하신 체육 선생님이셨다. 담임을 처음 맡은 분이셔서 열정이 넘치셨고, 당시에 서른 하나이셨으니 지금의 나보다 어리셨다. 이 젊음의 패기가 넘치는 열혈 체육 선생님과 나의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었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 악명이 높았던 두발 규제를 만만히 여기고 춥다며 교복 위에 맨투맨 셔츠까지 하나 더 입고 등교를 했었는데, 담임 선생님께 두발 불량 + 복장 불량으로 걸려서 하키를 전공하셨다는 젊은 체육 선생님의 엑스칼리버 (참나무 종류의 길고 두꺼운 매였는데 우리는 엑스칼리버라 불렀다) 풀스윙을 5+5 해서 열 대를 맞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강력하게 맞아본 적이 없는데, 당일날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집에 와서 교복을 벗어보니 양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지금이었다면 난리가 날 법한 사건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물론, 바로 머리를 반삭발로 밀고 다음 날은 칼 같은 시간에 칼 같이 교복을 챙겨입고 등교했고. -_-;;;


정신이 안 들 수가 없다...

첫 인상이 '흐억 망했어' 었는데, 이 분께서 가지고 있는 그것이 애정과 사랑임을 아는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5명 가량 되는 아이들 이름을 하루인가 이틀만에 다 외우셔서 한명 한명 언제나 이름을 부르셨고,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아이들을 대해주셨다. 그 중에 최고봉은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체벌 대상자에게 그 체벌이 합당한지를 물으셨고, 반론이나 변명거리가 있으면 충분히 이야기 해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는 점이다. 억울한 점이 있으면 맞기 전에 이성적인 상태에서 대화나 토론을 할 수 있었고, 담임선생님을 설득하거나 반 아이들 대다수를 설득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면 체벌을 받지 않았다. (체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과 학생이 동등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큼한 충격이었고, 이로 인해 꽤 강력한 체벌에도 불만을 가진 친구들이 적었다.)


이 분 덕분에 한 때 교사라는 직업에 많은 흥미를 가질 정도로 나한테 큰 영향을 미치셨는데, 이분께서는 전교조 소속이셨다. 나는 고등학교 때의 경험을 통해 전교조에 대해 꽤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에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크게 세 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재단 비리를 공개하고 고쳐야 한다고 외치는 전교조 선생님들과 재단 이사장의 편을 드는 선생님들,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파. 당연히, 재단 비리를 향해 싸우는 전교조 선생님들에게는 항상 열정이 가득했고, 눈에 보이는 / 보이지 않는 다양한 불이익을 학교로부터 받으면서도 학생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시고, 행동에 옮기셨다.


당시의 내 눈에는 명백하게 보이는 재단의 비리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묵살되고 숨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전교생이 2천명 정도되는 학교이니 그 부모들 중에 소위 힘 있는 분들도 몇 분 정도는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데 그 정도로는 어쩔 수도 없는 큰 힘이 뒤를 봐주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일례로는 당시 학생 2천명이 넘게 다니는 남고였는데 급식실도 없었고, 체육실도 없었고, 강당도 없었다. 대신 학교 바로 옆에는 서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골프 연습장이 붙어있었고, 이는 재단 소유로 되어 있어 억소리가 난다는 월간 수익금은 재단 이사장에게 들어가고 학교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과거에는 학교 선생님들을 불러다 골프공을 줍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내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은 대부분 시위로 보냈다. 혈기왕성한 사춘기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정의감에 불타서 (혹은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학생회를 통해 내려오는 지시를 받아 필요한 단체 행동들을 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재단 이사장 편을 드는 선생님들의 수업 거부 - 해당 선생님이 수업을 들어오면 단체로 교실 밖으로 나가 수업을 받지 않았고, 전교조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수업에는 모두 다시 돌아와 수업을 받았다.


2) 기말고사 보이콧 - 문자 그대로 기말고사를 거부했다. 보통 기말고사라 함은 여름 방학 직전에 치뤄지고 바로 방학이 이어지는데, 여론화를 위해 고1, 고2 전체가 (당시 고3 형들은 수능이 코앞이니 이런 쪽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하는 쪽으로 하고) 기말고사를 거부했었다. (물론 이때 보이콧했던 기말고사는 여름 방학 중에 다시 봤다.)


3) 대법원 앞에서의 시위 - 비리재단 관련한 소송 중 하나에서 패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한번 고1, 고2 학생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수업을 거부하고 학생회의 지시에 따라 각 반별로 운동장에 모였고, 당시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대법원으로 시위성 행진을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학생회쪽에서 집시법 지켜서 신고하고 한 것인가 모르겠다.) 이때의 시위는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께서 너희 지금 너무 흥분해서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우리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막으려 노력하셨었는데, 우리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전교조 선생님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인간 사슬이 되어 교문을 막아서셨었다. 너희 이대로 가면 안된다고, 가려면 우리를 밟고 가라고.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영화같은 장면이었는데, 천여명의 시커먼 남고생들이 그 앞에서 주춤거렸으나 결국에는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라고 외치며 가운데를 조용하게 뚫고 나갔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몇블럭 떨어진 대법원 앞으로 가는 길은 어느샌가 사태 파악을 한 경찰이 전경들을 배치해놔서 뜨악했었던 기억도 난다. 학교 앞의 또 다른 S고 사거리에서, 서초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전경들이 빼곡하게 방패를 들고 막고 있었고, 그 사실이 혈기 왕성한 천명이 넘는 남고생들을 자극해서 전경들한테 물병 던지는 등 시위가 과격해지기 시작했었다. 다행히 이를 알고 달려오신 어머님들께서 전경과 우리가 대치하는 그 사이에 쫙 손잡고 서주시면서 충돌을 막았다고 기억한다. 결국 헤쳐모이라는 지시에 따라 어차피 그쪽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인 우리들은 각자 흩어져서 알아서 대법원 앞으로 모였고, 깃발을 흔들고 있던 학생회 간부들이 있던 앞에 앉아서 구호를 외치며 한두시간 정도 시위를 하고 해산했다고 기억한다. (와... 쓰다보니 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별 일을 다 했었구나. 이것이 격동의 2000년대 -_-)


이 영화도 배경이 S 고인줄은 몰랐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 학교는 정상화 되었고, 전학을 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은 전학을 갔고, 남는 선택을 한 친구들은 남아서 학교를 마쳤다. 이때 함께 고생한 기억에 각자 다른 학교로 가서도 나름 끈끈하게 가끔씩 모임을 가졌었고, 당시의 담임 선생님하고도 가깝게 지냈었다. 각자 졸업하고 스무살이 된 뒤에 다시 모이고, 담임선생님까지 모시고 다 같이 술을 마셨던 날이 있었다. 이미 담임 선생님이 이제 너희 다 성인이고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는데 그냥 이제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ㅋㅋㅋ 다들 형이라고 부르면서 술자리를 가끔씩 가졌었는데, 어느 날 담임형님이 (...) 넌지시 내비쳤었던 그 분의 고민이 있었다.


본인이야 이게 옳다고 생각하고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서 행동에 옮겼지만, 과연 교사인 자신이 학생들에게 이런 영향을 끼쳐도 되나... 라는 고민. 사춘기의 혈기왕성한 아이들에게, 그리고 학업에 있어서 한참 중요한 시기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이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으셨지만 혹시나 본인이 아이들을 '선동'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을 내내 하셨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우리를 행여나 이용하거나 치르지 않아도 될 댓가를 치르게 한 것은 아닌지 하는.


그때는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나,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교사로서 정말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다. 본인이야 옳은 것을 옳다고 생각하여 실행하는 것이겠지만, 아이들이야 아직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이르고 본인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분이 옳은 일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어렴풋하게나마 정의를 말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얼마나 많은 댓가를 감당해야하는지 알게 해주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나마 항상 응원하고 지지하게 되었으니까. 인터넷에서 누군가를 '선동'하네 마네 하는 표현을 볼 때마다 이 분이 하셨을 고민과 함께 '선동' 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아직 이렇다 할 결론은 못 내렸다. 워낙 모호한 개념이기도 하니까.


*


언젠가 담임형이 왜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전교조 활동을 하고, 자신한테는 별 이득도 없는 재단과의 싸움을 이어나가는지 지나가듯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담임의 뒷조사를 한 결과, 담임은 안암의 K대 체육교육과의 8x 학번으로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담임 스스로 자신의 대학시절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 시대에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군사정권에 맞서서 민주주의와 옳음을 외치면서 피흘리고 최루탄을 맞고 제적 당하고 교도소에 가던 시절이었는데, 자신은 솔직히 그때 그 사람들을 보면서 한심하게 생각했었다고.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빨갱이'가 되서 시위를 하는지, 혀를 차면서 홀로 공부를 했고, 그래서 자신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너무 부끄럽다고 했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지금 자신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고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참 그때나 지금이나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


나 역시 그 당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나름 인생에서 학업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는데, 홀랑 시위하고 놀러다니느라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공통xx 라고 시작되는 부분들은 거의 다 스킵했다고 보면 된다. 우리 부모님께서도 이런 학교의 상태와 나를 걱정하셨었고, 사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최근에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당시에 학업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 걱정된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고 한다. '너 지금 전학갈래? 그러면 절차 알아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되는데, 어때?' 그때의 내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아빠 지금 친구들은 다 저기서 저렇게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저만 빠져요.' 사실 아버지가 마음 먹었으면 내 의사에 상관없이 전학 보내실 수도 있었을텐데, 그 1년이 얼마나 중요할지를 알았지만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고 한다. 친구들 놔두고 혼자 도망간 녀석이 되지 않게 해주셨다. 그래도 조금은 아쉬우셨는지, '너 그때 그 1년 그냥 무난하게 학교 다녔었으면 충분히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짜식.' 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었고. '하하하 아버지 될 인연이었으면 수능을 두번이나 봤는데 인연이 됐었겠죠. 그 1년보다는 제 노력이 부족했던거에요. 그래도 더 좋은 것을 배운 것이 아닐까요' - 물론 이건 지금 생각이지만.


*


나는 남고에서 공학으로 전학을  케이스였는데, 다들 전학가서 초반에 뻘쭘하니  학교로 전학  친구들끼리 문자로 수다를 떨곤 했었다. 남고로 전학 갔던 친구 하나가 ' 공학은 어떠냐' 라고 하길래 '  완전 복도에  여자애들 걸어다녀 겁나 어색해' 라고 답장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고 보니 2 때는 특이하게 전교에서 우리 반만 합반이었어서,  고등학교 3년은 1학년은 남고, 2학년은 공학+합반, 3학년은 공학+분반에서 다녔었다. 가능한 모든 조합  경험한 느낌.


졸업한 모교는 현빈님이 영화에서 입어주셨다


그런 시절이 있었더랬다. 어딘가에서는 아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