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장강명
몰입감이 엄청난 책이었어서 그냥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중반부까지는 그럴듯하면서도 다 읽고 나면 ‘음! 멍멍이 소리를 정말 그럴듯하게 써놨군!’ 하는 책이었다.
<표백>은 자살에 관한 소설이다.
나는 사람들이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기도 하면서 이 책에 대해서 내 생각을 마구마구 쓰고 싶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내 감정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음?
그럴듯할지도..
엥?
흠…
엥??? 아니 이런..
ㄷㄷ
아니지?? 아니지?!??
글쿤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하단에 내 생각을 써놨으니 스포주의!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범상치 않다. ('세연'이 가장 특이하지만 그 주변 친구들도 내 기준 보통이 아님..)
내 인생에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생각들이 나에게 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적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내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진짜 내 입장에서는 이 책이 그 자체였음....)
'세연'은 아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삶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자살만이 대안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이런 '세연'의 생각을 반영하여 책 제목이 '표백'인듯하다)
난 '세연'이 아주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그녀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그걸 순순히 허락하지 않는다.
(== 작품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음. 왜냐면 '세연'은 세상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연'이러한 시대정신에 저항하고 거부하고 싶어 하며 그 방법이 '자살'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세연'의 진가가 드러난다.
'세연'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으며 그녀의 추종자는 많았는데, 이러한 추종자들도 자기를 따라 자살하길 원하며 이런 집단 자살은 사회에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고 믿는다. (이 사회에 저항하겠다! 는 목소리)
그래서 '세연'은 자살 후 5년 뒤에 자신의 추종자들이 자살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짜놓는다.
이 과정에서 와이두유리브 닷컴도 만들고 자살선언문도 공개하며 추종자들이 하나씩 실제로 자살한다. (전부 자살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면서, 너 때문에 죽는다.
이 말이 정말 자살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 표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전부 세연이 쓴 건 아니지만) '세연'의 자살 선언문을 읽으면 어느 정도 '세연'의 입장에 논리적으로 100%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연'이 생각하는 표백세대의 현황이 이런거구나..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한다.
...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질만한 의문도 동시에 들었다.
꼭 이 시대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성공한 인생이 아니고 뜻깊은 일들이 많은데 왜 그런 것들을 시시하다고 치부하는 것일까? 왜 자신을 순교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등등...
이런 나의 의문을 책 전반적으로 '적 그리스도'가 하나씩 대신 이야기해 준다 ㅋㅋ..(내가 앞에서 들었던 의문을 뒤에서 '적 그리스도'가 똑같이 말해줘서 신기했음)
나도 등장인물들처럼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시대였던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옛날 혁명이 일어나던 시대에 그녀가 태어났으면 뭔가 좀 나아졌을까?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나한테 '세연'은 그냥.. 그냥 그럴듯한 논리로 이 시대에 화풀이하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근데 '세연'의 세계에서는 내가 이 시대에 순응하면서 시시한 인생을 사는 패배자처럼 보였겠지..!?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위와 같은 '세연'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세연’의 의견을 어떤 식으로 반박할까, 내가 '세연'을 설득한다면 어떤 식으로 설득할까 등등을 꽤나 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세연의 입장이 100%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는 거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엄청 힘든 사람한테 세상에는 아름다운 게 잔뜩 있어 ㅎㅎ 저 하늘을 봐~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대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다;;) 좀 더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을까.... 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소설은 정말 매력적인 것 같다.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등장인물을 창조해 내서 이런 파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호불호가 갈릴만한 책일 것 같긴 한데 한번쯤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