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사랑은 무척 아름답다.
여자들이 늙으면 걸리는 병이라고?
맥주 몇 잔에 얼굴이 벌게진 나를 바라보던 친구는 거들먹거리듯 들고 있던 잔을 벌컥이고 말을 이어갔다. 야야 정진아도 이제 늙었구나. 너 잠 못 자고 성격 까칠해지는 거 그거 어? 그거 뭐냐 거 여자들 늙으면 걸리는 거! 아 갱년기 그거야 그거.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는 내 얼굴을 참 좋아했다. 심지어 할머니들 중에서 가장 예쁜 할머니가 될 거야 라는 둥, 이 나이에 나만한 사람 흔하지 않다?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고 뱉어냈다. 나보다 어린 여자들은 어리니까 예쁜 것이었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성숙미와 인생의 경험을 가진 아름다움이 있다 생각하며 나는 내 나이에서 풍겨져 나오는 고유의 미가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십수 년 전의 나의 기억들은 아이들이 삐악이던 새댁 같은 싱그러움으로 가득했고, 누군가에겐 배를 까고 빡빡 긁어도 마냥 예뻐 보일 시절이었고, 결혼 여부를 묻는 질문엔 굳이 아들이 둘이라고 대답해서, 돌아오는 반응을 예상한 듯 즐기는 오만에 머물러 있었다. 의례 예의상 듣는 예쁘다는 칭찬은 마치 사과는 빨갛다는 당연한 명제처럼 그 나이의 모든 여성의 싱그러움에는 마땅한 서술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당시 극심한 수면장애와 계속되는 열로 PTSD 환자는 조기 폐경이 와도 이상할 게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지라, 친구의 말이 그저 술주정으로 받아들이기엔 굉장히 거슬렸다. 여자들이 늙으면 걸리는 거라니. 갱년기가 언제부터 병인 거냐? 서글프기 짝이 없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내 인생에서 빠지고 늙음만 남았구나 싶었던 거지. 원장님, 이사님으로 불리던 사회적 직함은 낯설어졌고, 수년의 결혼생활로 서로의 뱃살이 너무 당연해지는 법적 보호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젊음을 갉아넣고도 돈 쓸 시간이 없어 쌓인다는 중년의 자산은 온데간데없이 소득세 0의 시대를 맞이한 나는 이제 친구 말 데로 ‘늙음’만 남았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뇌리 속에 박혀 우울감이 밀려왔다. 40년의 넘는 인생의 노고를 치하하며 남은 것은 ‘늙음’ 뿐이라니.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내 얼굴이 부쩍 싫어졌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 심지어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쌍꺼풀은 너무 두껍고 코는 너무 동그랗고 인중은 너무 길고 입술은 또 얇고 이마는 튀어나왔고 등등 그 이유도 제법 구체적이었다. 얼굴을 갈아엎을 수도 없고 이 권태기를 어떻게 극복하나 싶을 때쯤 나는 친구네 부부와 여행을 갔다.
늙어서 좋아
친구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정진아가 자꾸 나랑 여행 가고 싶어서 안달 나게 만들기’로 잡았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나랑 오랜 세월 공부를 같이 했던 한 살 어린 변호사로 세상에 이런 상똘아이가 없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정진아인 나의 친오빠 이름을 이진성이라고 씩씩하게 적고 내 오빠 이름을 기억한다며 뿌듯해하던 대한민국 고학력 변호사의 지적 수준을 의심케 만든 미친년.
남편 병간호를 하며 응급실을 왔다 갔다 하던 그 검디 검은 세월에 하루도 빠짐없이 35킬로를 달려와 한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나의 불안을 담배 연기로 뿜어주던 미친년.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나에게 내 생일이면 단 한 해도 빠짐없이 화환같이 무섭게 큰 꽃을 보내며 언젠간 꽃을 좋아하게 될 텐데 그땐 내 꽃만 기억날 테야라고 악담을 해대는 미친년.
그렇게 이 상똘아이 미친년 친구 내외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여행을 갔다. 친구 내외는 새벽에 일어나 토스트를 만들어 우리를 픽업했고, 2박 3일 내내 운전을 했다. 30분 전에 일어나 미친 듯이 레이싱을 하고 재판에 들어가던 잠 많은 그녀는 아침 조식을 만들어 나를 깨우고, 여행 내내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는 것의 고달픔에 대해 설파하고, 미역줄기를 던지며 아이들과 물놀이를 했다. 배가 찢어질 거 같아 화장실을 세 번을 가게 만들 정도로 고기를 처먹이고, 아침엔 계란 프라이를 15개를 해주었다. 그녀는 이번 여행의 목표를 위해 거의 본인의 능력을 넘어선 초능력에 가까운 집중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친구 내외의 모습을 틈나는 대로 사진에 담고 보니 문득 그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이 찍어주는 한 장의 프레임에 같이 담긴 두 사람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세월의 변화가 신기하기도 했다. 새하얀 피부에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170이 넘는 마른 인형 같은 몸매로 신림동 고시생들을 설레게 했던 그녀와 전형적인 안경을 쓴 똘똘이 공대생이었던 그녀의 남자 친구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후덕해진 중년의 여성과 흰머리가 반이 넘은 그녀의 남편만이 남았다.
여행 내내 그녀와 그는 손을 잡고 걷거나 살가운 애정표현은 전혀 없고 서로의 운전에 딴지를 걸거나 타박을 하기도 했지만, 고기를 구워 틈틈이 서로의 접시에 놓아놓고, 모래가 잔뜩 묻은 출렁이는 엉덩이의 모래를 털어주고, 화장실 문 사이로 휴지를 가져다주고 후덕해진 옆구리 살을 붙이고 드라마를 보았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기보다 영원을 찰나처럼 같이 하기로 한 그들은 어느새 20년의 세월이 지나 늙음의 하루하루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의 늙음이 싫지 않은 것처럼, 그도 그녀의 늙음이 싫지 않은 듯했다. 원시와 근시의 의미를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의미를 설명하며 원시도 근시도 피해 가는 완벽하게 잘 보이는 적정한 거리가 있는데 서로 그 거리가 달라 그 부분은 자기가 읽어준다며 생색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부러운 마음보다도 너무 예뻐 보였다. 사람도 변하고 사랑의 형태도 변했지만, 늙은 사랑은 무척 아름답더라고.
그녀와 함께 심야 산책길에 아 대다. 삭신이 쑤셔 라고 하니 그녀는 언니가 늙어서 좋다고 했다. 뭐가 좋냐 라고 도끼눈을 흘기며 물으니 급하게 수정 수정을 외치고는, 언니가 예쁘게 늙는 거를 내가 맨날 보니까 좋아. 됐냐?라고 이 미친년이 깔깔 거리더라고.
예쁘게 늙는 거를 맨날 보니까 좋다니. 늙음이라는 단어가 섞인 문장 중에 가장 듣기 좋은 문장이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젊음을 얘기하며 나를 사랑했던 시절처럼 이제는 늙음을 얘기하며 나를 사랑하는 시절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아침 바라본 내 눈가의 주름이 제법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