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있지만 절대 닿을 수 없는 것들>
한번은 남편이 내차를 가지고 나가선 그날따라 수다스럽게 생색을 내는 것이다. 세차를 해놓았고 실내 청소를 했으며, 트렁크도 정리했고 쓰레기통을 비워놓았어. 대단하지 않냐?
새삼 대단할 것도 없었다. 운전을 처음 시작한 수년전부터 늘 자기가 해오던 것이 왜 오늘따라 이렇게 여러번 자랑할 것인거냐. 대답하기도 귀찮았지만, 적절한 칭찬과 고무가 내가 지속적으로 이 특혜를 누리게 하는 방법임을 알기에, 응응 대단해. 진짜 어떻게 이렇게 부지런하지. 기분좋게 부려먹기 메뉴얼 37번을 재생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길에 차의 네비게이션이 접히고 열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차를 바꾼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차에 크리스라는 다정한 이름도 지어주고, 차 속에 향기유지를 위해 방향제도 달아주며 갖가지 애정을 쏟고 있던 때라 그 소리가 매우 신경쓰였다. 결국 나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질 못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시동을 끈 상태로 소리에 집중했다. 내 기어코 소리의 주범을 찾고 말테야. 새차가 이 모양이라니. 당장 따지겠어. 진상의 끝을 보여주마.
전투력을 한껏 끌어모아 도끼눈으로 살피니, 무색하게도 내비게이션 접히는 틈에 주차권이 끼어, 접히고 열릴 때마다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어쭈.... 이것봐라. 남편들이 하는 전과 다른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 이치이거늘.
궁지로 몰아 따지니 사건개요는 주차권을 뽑아, 접힌 내비게이션 밑에 살짝 끼웠고, 주차하려고 후진하니 자동으로 열리는 내비게이션이 주차권을 씹어 틈새로 영원히 박혔다는 것이다. 응징이 두려워 여러가지 도구를 이용해 잡아뽑으려고 진땀을 흘렸으나 실패했다는 자백.
나보다 백배는 꼼꼼하고 건축을 하는 공대출신이 이것을 뽑아내지 못했다면, 나에겐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나름 자기객관화가 냉정했던 나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문제는 내 성격이었다.
운전할 때마다 신경쓰이는 작은 소리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연노란색의 주차권이 자꾸 눈앞에 알짱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서 온갖 도구들을 가지고 나가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매번 실패. 오히려 잡은 부분이 찢겨져 더 잡히지도 않는 난해한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뭔가 알 수 없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주행중엔 들리지도 않는 이 소리가, 알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그 틈새가 자꾸 신경에 거슬려서 어느 순간부턴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 끝장을 보자.
얇은 핀셋을 준비하자 남편은 이미 시도해본 방법이며 절대 불가능하다라고 포기를 종용하였다. 나는 강력본드를 핀셋 끝에 발라 최대한 핀셋 양면을 가까이 하되, 서로 붙지 않도록 조심히 천천히 틈새에 넣었다. 입에는 손전등을 물고 앞좌석 두자리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작업을 하는 모습이 자못 전문 절도범 같았다고 훗날 그는 증언했다. 나는 주차권을 잡아 본드가 강력하게 붙을 때까지 대략 3분정도를 기다렸다. 천천히 조심히 잡아당기자 조금씩 올라오며 쏙. 아 쉬벌 개시원.
내 인생을 두고보면, 덜렁되는 성격탓에 틈새에 끼어 너무 가깝지만 잡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길바닥 철장 사이로 떨어져 집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열쇠라던가, 딱 2센티 쯤의 차이로 닿지 않던 나무로 떨어진 빨래라던가. 뻗기만 하면 닿을 것같은 그 거리에서 결국은 잡을 수 없었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우리네 인생살이에 가깝지만 닿지 않는 것들이 어디 물건뿐이랴. 사람도 감정도 목표도 눈앞에 보이지 않아 내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살아가다보면 어느덧 나에게 닿아있는 것들이 있고, 너무 가까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 그저 뻗기만 하면 내것이 될 것 같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간절한 것들이 아무리 바둥거려도 끝내 닿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땐 오기를 부리지 않고, 그냥 그대로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길.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거리만으로 가능성을 판단하는 실수는 하지 않길. 그런 오기로 나를 태우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길. 가끔은 포기도 용기가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