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졸함과 믿음의 경계에서
<서운함의 위치>
가끔 분노나 화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당하곤 했다. 표현해라, 참으면 병 된다 라는 진취적인 조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는’ 사람들의 감정 표출을 유도하곤 한다.
‘화가 난다’
사실 나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애써 외면하며 게임이나 청소에 몰두한다던가, 목소리의 톤이 격앙되고 공격적이지 않을 뿐 반복적으로 나의 기분을 설명한다던가, 아니면 화를 내야 할 당사자를 피한다던가, 애써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던가. 평상시 기본 사양인 콧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까지.
‘화’라는 형태만 없을 뿐 표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계속 표현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 부분은 평생의 습관이고 어느 정도는 큰 목소리가 오고 가는 분위기를 매우 싫어하는 성향의 나로선 굳이 바꾸려고 애쓰고 싶진 않다. 게다가 오랜 세월 친밀도를 높였던 기민한 사람들이라면 나의 이런 소심한 행동변화에서 ‘화’라는 감정을 인지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기에 화를 참지 말라는 일반적인 조언은 별로 먹히지 않는다.
‘서운하다’
하지만 ‘서운하다’라는 감정은 매우 다른 영역이다. 서운함을 느끼는 포인트는 엄밀히 말하면 개인의 이해의 영역 안에 있으므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엔 자기 검열은 더욱 엄격해진다. 서운함은 대게 상대가 눈에 띄는 흑백이 분명한 잘못을 했다기보다, 방식이 맞지 않았거나, 사건의 추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거나, 서로가 서로일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한 나를 알 수 없는데서 오는 착오인 경우가 많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초코파이뿐이므로.
나의 경우엔 화가 나는 감정보다 서운하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분명 닭다리보다 닭가슴살이 좋다고 얘기를 했는데도 나를 위한다고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닭다리를 내 접시에 놓아주었을 때 그 배려를 생각하면 닭가슴살이 좋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주지 못하는 서운함 따위는 자칫하면 스스로를 이해심이 좁고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위험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으면서까지 표현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늘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서운함을 표현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 감정의 원인이나 형태가 분명하지 않아 화나 슬픔을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표현할 때는 상대가 그 감정을 보듬어줄 수 있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믿음이 있어서이다. 오히려 서운하다 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상대가 이조차도 하지 않을 때이다. 간혹 서운함을 표현하던 상대가 언제부턴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더 완벽 해저 서가 아니라 그 감정이 당신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학습에 의해서거나,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다. 가끔은 관계의 틈을 흔드는 것은 화나 분노라는 격한 감정보다 서운함인 경우가 있는데 서운함은 표현하지 않기 시작하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였다가만기에 이자까지 붙어 한번에 찾아가는 만기 적금형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아.
닭가슴살이 좋은지 닭다리가 좋은지 꼭 얘기해주렴. 그리고 난 냉면 먹을 때 계란은 마지막에 먹으려고 남겨놓는 거니 허락도 없이 집어가서 니 입에 좀 넣지 말고. 응? 그거 무지 서운하다. 계속 그러면 안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