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본 사랑, 아는 사랑,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랑
마라탕
아직 마라탕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마 작정하고 나열해보면 못 먹어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다. 가끔은 그래서 창피하다. 여태 뭐하고 살았냐는 소리도 간혹 듣는다. 가리는 게 전혀 없는데도 못 먹어본 게 많은 모순이 많은 인생이다. 지나고 보면 낯선 것에 대한 탐구 정신이 희박하다 보니 새로운 음식, 새로운 길, 새로운 사람들은 항상 궁금하지가 않았다. 우리 동네인데도 항상 만나러 오는 친구들이 근처에 편의점이니 음식점이 새로 열었다고 알려주곤 한다. 여전히 나는 가던 편의점만 가고 딱히 까다롭지도 않은데도 사람은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난다.
우연히 마주친 좋은 기억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갈망하고 탐구하지 않아도 가끔은 우연히 알게 되는 맛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시작했던 근력운동의 맛이라던가, 우연히 맛보았던 똠냥꿍의 매력적인 풍미라던가, 예의상 던진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마지못해 나간 자리에서 나의 또 다른 버전 같은 친구를 만난다던가. 그렇게 만난 우연한 행운들. 그런 경험들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점점 뚜렷해지고, 어떤 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는 것이 나를 위로할 수 있는지 자기만의 매뉴얼이 생긴다. 운이 좋아서든 타고난 환경이든 그렇게 알게 된 좋은 감정들은 아는 맛이 되고, 자주 찾는 맛이 되어, 경험이 되고, 결국은 내 것이 되어 나도 남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나의 맛이 되는 것이다.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
늘 입버릇처럼 들어왔던 말이고, 우리네도 어느새 어른이 되어 마치 알아서 하는 말처럼 되어버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베풀 줄 안다’.
모든 말들엔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의 예외가 있다 보니 결국은 그런 입버릇 같은 말들은 별로 귀에 먹히진 않았지만, 최근에 친구가 우울해하는 나에게 마라탕을 사주겠다고 하더라. 너 안 먹어봤잖아. 그거 먹자. 늘 먹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지만, 굳이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먹고 싶진 않았다. 모르는 맛이라 배고플 때 떠오르지도 않았으며 특히 입맛까지 잃은 마당에 굳이 모르는 맛이 당길 리가. 그 제스처가 끌리지 않는 나를 보며, 몰라서 모르는구나. 먹어본 사람만 아는 맛이라 좋았던 기억으로 갈망하게 되고, 사주고 싶어 하는 그런 맛이구나. 그런 생각의 끝에 다다른 사소한 깨달음이었다.
감정을 표현하고, 위로를 건네고, 사랑을 표현하는 말투와 방식 혹은 제스처까지도 어느 정도의 경험으로 누적되는 학습이란 생각이 든다. 우연히든, 또는 가정환경이라는 반복적이고 당연한 노출이든, 주위의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받아왔던 방식들에서 좋았다고 느껴진 기억들이 누적되어 그 속에서 보고 배우고 학습되어 아는 맛이 된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순간, 또는 몸도 마음도 지쳐 무엇이라도 필요한 순간, 이미 학습되어 아는 맛이 된 그 방식들을 반사적으로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누군가 그런 것들이 필요한 순간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매뉴얼이 되기도 하고.
사랑은 받은 사람이 베풀 줄 안다. 물론 여전히 이 말에도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의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의 예외의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의 예외의....(누가 그만 좀 말려줘). 어쨌든. 아는 맛이라 참으로 다행이다.
지친 하루에도 누군가의 어이없는 농담에 정말 어이없게도 빵 터졌을 때 그 ’의도된’ 실없는 순간의 맛을 알아서.
무거움을 무겁지도 않지만 가볍지도 않게 받아쳐주는 ‘최대한의’ 위트를 준비한 배려의 맛을 알아서.
그냥 논리로도 경험으로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을지언정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흐느끼는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며 욕을 해주는 안타까운 마음의 맛을 알아서.
힘들 때 달려와 말없이 밥 한 끼 먹어주는 정성의 맛을 알아서.
울음이 그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맥주 한 캔을 같이 비워주는 그 절절한 맛을 알아서.
단 5분의 위로를 위해 왕복 70킬로를 매일 달려와 맞담배를 피워주는 무거운 공감의 맛을 알아서.
내가 그 아는 맛이 필요한 순간을 알아서. 알기 때문에 갈망할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순간이 필요한 사람에겐 내가 베풀 수 있는 맛이라서.
그것들이 모두 내가 아는 맛이라 참 다행이다.
<나에게 좋은 기억들로 남아 아는 맛이 되게 해주었던 감사한 이들을 마음에 두고두고 새겨 잊지 않아야지. 덕분에 위로의 맛만 고급스러워져서 버릇이 잘 못 들여졌어도, 그래도 알기때문에 누군가에게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