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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나 Jun 19. 2020

동치미죽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 누룽지 이야기

완벽해 보이지 않지만 완벽할 수 있는


“동치미로 죽을 쑨다고?”

며칠 전엔 뜬금없이 30분이 넘게 ‘동치미죽’을 검색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장염에 시달리던 친구라던지, 입덧이 심한 친구와 얘기하다 보면 난 항상 동치미죽을 떠올렸고, 나의 동치미죽 얘기에 모두들 매우 의아한 표정들을 지었다. “동치미로 죽을 쑨다고? 동치미 김치 말하는 거 맞아?”

반응이 이러하다 보니 엄마가 해주던 그 시원하고 뜨끈한 동치미죽의 뿌리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정말 국적이 있는 죽인지, 있다면 다들 비슷한 레시피를 쓰는지, 내 추억의 음식에 나름 근거를 찾고 싶어 진 것이다.

자료가 많진 않았지만 다행히 예전부터 배앓이를 하거나, 열이 날 때 꽤나 즐겨해 먹는 죽이라는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던 아버지의 말에 출생증명서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던 일곱 살의 그 느낌처럼 안도감이 들더라는 거지.



 3  해장이라니.”

엄마의 동치미죽은 나에게 해장음식으로 데뷔하였다. 고등학생 시절 매우 심심하고 지루한 학생이었던 나는 그렇다고 눈에 띄는 일탈을 감행할 만큼 겁 없는 학생도 아닌 그냥 영화만 죽도록 보고 글이나 좀 긁적이던 좀 특이한 나름의 모범생이었다. 진짜 나름 모범생이었다. 진짜다. 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진짜다. 외모도 머리도 실력도 뛰어나 ‘그 동네 장동건’으로 불리던 체형마저 완벽한 8등신 오빠는 고등학생이 되어 불같은 질풍노도의 중심에 있었고 부모님은 오빠에게 늘 기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아깝잖아. 너무 완벽한데 이제 와서 방황이라니. 맞다. 아까워요. 어서 오빠에게 신경 더 쓰세요. 난 그저 눈에 띄는 것만 아니면 큰 비난은 면할 수 있었기에 사부작사부작 작은 사고들을 치며 나름의 소심한 일탈을 즐겼다. 지금 내가 딸을 키운다 생각하면 목 뒤를 잡고 쓰러질 일이지만 그땐 작고 아기자기한 일탈이라고 생각했던 하나가 바로 술이었다.



술.

그래도 나름 일탈의 대명사 아닌가. 처음 친구에게 술을 배우던 날 그 알 수 없는 성취감이란. 나도 이제 힙한 반항아 같잖아? 1단계 첫 경험을 클리어했으니, 2단계는 선배들이 사주는 100 일주. 100 일주는 사주고 따라주는 대로 웃고 즐기고 마시는 거라고 누가 그랬나. 암튼 그날의 주량도 모르는 고3은 주는 대로 호로록 잘도 마셨고, 몰래 귀가하여 교복을 입은 채 밤새 변기를 붙들며 그 날 먹었던 모든 음식을 눈으로 확인하며 몸의 장기가 모두 입으로 나올 것 같은 경험을 했고, 그리고 교복을 입은 채 잠이 들었다.

눈뜨기 무서운 아침.
쫓겨날까?
쫓겨나기 전에 미리 나갈까?

바로 그때 상견례를 하였다. 동치미죽씨랑 나씨랑 말이야. 엄마는 식탁 위에 뜨끈한 동치미죽을 한 사발 떠다 주셨고, 전날의 폭풍 같았던 변기와의 조우에 대한 언급도, 눈뜨자마자 교복을 입고 있는 나의 상태에 대한 질문 한마디 없이 “속 비었을 땐 동치미죽이 달래기 좋지. 내 팔자가 아빠 술국도 모자라서 딸 해장까지 해줘야 하냐. 고3 딸 해장이라니.”하고 연신 웃기만 하셨다.



할머니의 동치미를 무척 좋아하는 둘째



엄마라는 이름의 인내

동치미죽은 마치 엄마의 인격이 응축된 느낌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몰래 담배를 피우고 놔둔 종이컵을 걸렸을 땐 엄마는 종이컵을 버리고 고깃집에서나 볼 법한 사기로 된 큰 재떨이로 바꿔놓으신 사건만 봐도 그러하다. 고3 때 땡땡이치고 야구장에서 소주팩을 마시다 걸려 교감실에서 한 달 내내 반성문을 쓸 때는 네가 반성문으로 논술 훈련을 한다며 당시 2000원에 육박하던 번지지 않는 펜을 자루로 사다 주셨고, 고3이 한 달 내내 자율학습을 빠지고 비디오방을 다니니 담임선생님과 친히 통화 하사,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나마 하는 공부도 안 하니 자율학습을 빼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주시며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딸과 같이 봐주시던 그 속내는 얼마나 타들어 갔을런지. 알아요 알아 엄마. 식상한 말이지만 이제 나도 엄마가 되니 알 것 같아. 그렇게 엄마는 딸의 성향과 작은 방황들을 고스란히 기다리고 인내하셨다.


눈물로 간을 한 동치미죽

엄마의 인내 덕분에 나는 그래도 정상적인 범주의 평범한 성인으로 자랐다. 상위권 대학의 법대를 나와 그 타이틀과 어설픈 지식을 써먹으며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다양한 일들을 하며 두 아들의 일하는 엄마가 되었다. 임신하고 극심한 입덧으로 하루 7번까지 토하고 얼굴의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터질 때도 엄마의 동치미가 있었고, 남편의 투병이 지속되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담당의사의 말에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 울음을 터트릴 땐, 엄마는 내 흔들리는 어깨보다 더한 떨림을 감추고 나를 집으로 데려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며 동치미죽을 먹였다.

“더 힘들어질 텐데 지금 먹어야지. 지금 먹어야 버티지. 속이 비었을 땐 동치미죽이 달래는데 최고지”

수십 년 전 철없는 고3 딸에게 해장죽을 만들어 주시던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며. 하지만 이번엔 “우리 딸 어떡해. 우리 딸 불쌍해서 어떡해. 꼬맹이들 짠해서... “라는 말을 연신 토해내며. 뒤돌아 선 채, 설거지 때문에 움직이는 어깨인지, 참는 울음으로 흔들리는 어깨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완벽한 부모라는 샘플

동치미죽은 바로 그런 엄마의 인내를 고스란히 끓여 만든 나에겐 번접할 수 없는 현명한 어머니상의 상징이었다. 보고 겪은 것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 이런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딱히 야무진 아낙도 아닌 주제에 결혼 후 남편의 아침밥이라던가, 아이들의 집밥에 꽤나 집착을 하며 바지런한 주부 흉내를 냈다. 잦은 야근으로 수면이 부족해도 아침밥 차리는 것을 거르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이었고, 아들놈들은 어린이집 등원 전에 온갖 좋다는 재료를 번갈아 넣으며 우유를 갈아 넣은 주스로 시작해 아침밥에 후식 과일까지 먹이고 출근을 하다 보니 아침시간은 나에게 랩으로만 가득한 힙합 음악이 귀에서 쏟아지는 홍대의 어느 클럽 같았다. 심지어 주말이나 기념일 같은 외식의 명목이 합당한 날조차도 집에서 더 특별하게 먹으면 되지 굳이 나가서 돈을 쓰냐는 알뜰했던 엄마의 입버릇을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 내곤 했다.

림프종 투병 10개월 후 남편을 보낸 나는, 집밥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해졌다. 혹여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이 엄마가 부족해서, 엄마가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라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나에게 아버지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하신 사회적으로 넘을 수 없는 완벽한 아버지였고, 엄마는 완벽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자식들의 스트레스를 어르고 인내하며 올바를 길로 끌어주는 지혜를 가진 완벽한 엄마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가진 완벽한 가족상에서 반을 잃었다.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실패한 사람으로 느꼈으며 그 감정들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나의 유난스러웠던 집밥 집착



그리고 완벽했던 아빠상, 남편

아이들에게 보이는 남편의 사랑은 유난스러웠다. 맞벌이였던 남편은 큰애 때도 둘째 때도 항상 아이들을 끼고 자며 잠이 부족한 나를 위해 밤사이 수유를 모두 담당했다. 주말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든 집 앞 천변이든 몇 시간이고 탐험하고 다녔는데, 그게 너무 즐기던 모습이라 본인 말마따나 정말 작고 약한 마누라의 휴식을 위한 남편의 다정한 배려인 것인지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이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 번은 아이들과 새로 생긴 놀이터를 다녀와 씩씩거리며 한다는 말이

“새로운 아빠가 나타났는데 다른 집 애들까지 다 끼워서 놀더라?”
“그게 뭐 경쟁심 생길 일이야?”
“아니 그 아빠는 애들하고 놀아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더 신나서 놀더라고. 자기가 노는 아빠를 놀아주는 아빠가 어떻게 이겨. 나도 같이 놀아야겠어” 씩씩.

와. 그래. 대단한 아빠다. 육아 스트레스가 없는 아빠라니. 나도 내 배 아파 낳은 아들들이지만 진짜 당신은 대단하다. 존경한다.


아빠가 안고 있는 사진은 넘치는데 유감스럽게도 엄마가 안고 있는 사진은 드물다.



상실 후

그리고 그렇게 그를 잃었다. 내가 보고 겪고 받아왔던 완벽한 부모의 모습을 고스란히 구현하던 완벽한 아빠를 잃었다. 나는 예전보다 몇 배나 더 바둥거리고 종종거리며 아이들이 아빠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매사 예민했다. 길을 가다 들리는 다른 아이들의 “아빠!”라는 부름에 내 아이들이 신경 쓸세라, 행사에 엄마만 가는 게 적적할까 외삼촌과 할머니와 친구들까지 부르고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우며 아이들의 기분을 살폈다. 쏟아지는 일과에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데도 늘 부족했다. 어떻게 그를 따라갈 수나 있을까. 난 이렇게 매일 지치는데. 즐기는 아빠라니. 인내하는 엄마라니. 역경을 이겨낸 아버지라니. 나는 점점 더 먹이는 것에 집착하고 아프지 않게 하는 것에 유난을 떨었다. 그리고 나를 살필 겨를이 없이 약을 먹지 않으면 잠들지 않는 극도의 수면장해와 스트레스로 연거푸 대상포진을 겪고 몸과 마음은 점점 시들해져 갔다.



하나씩 놓는 연습.

혼자 와인 한잔, 맥주 한잔 먹는 날이 늘어나며, 안 그래도 식욕을 잃은 나는 약해진 몸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을 잃은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적극적으로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기 시작하며 일단 잠을 잘 수 있게 되니 조금씩 정신이 맑아졌다.

내가 가진 수십 개의 스트레스에서 적당히 해방되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하고 내가 객사하겠어. 부족한 건 부족한 거야.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가 집안일 스트레스를 줄이기. 로봇 청소기와 건조기를 구매하고, 어질러진 거실은 밤이 되기 전엔 치우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라던지 간단한 설거지를 시켰다. 물론 용돈이라는 포상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리고 아침식사 7일 중 3일은 빵 같은 간단한 식사로 대체했다. 그렇게 공부하는 시간이 늘었고, 장래에 대한 계획들을 좀 더 구체화하기 시작하니, 잠을 잘 자고 몸이 아프지 않고, 병원을 다니지 않게 되었다.


설거지 하는 모습이 제법 진지하다



동치미죽 대신 누룽지

아이들과 공부 때문에 집 근처를 벗어나기 힘든 나를 위해 친구들은 가끔 찾아와 나와 간단히 술 한잔을 하며 내 스트레스를 풀어주었다. 어느새 그런 시간들도 상처를 상기하는 발화점이 아닌 즐겁게 웃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던져내는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지만 문제는 숙취였다.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매번 엄마의 시원한 동치미죽이 생각났지만, 내가 만들면 그런 맛이 왜 안 나는지.

매번 전화로 재차 확인한 엄마의 동치미죽 레시피는 이러했다.

1. “엄마가 가져다준” 동치미를 꺼낸다.
2. 무를 통통통 채를 썬다.
3. 멸치와 다시마로 미리 끓여놓은 육수에 불려 놓은 쌀을 넣는다.
4. 썰어놓은 무를 들기름에 살짝 볶는다.
5. 끓이고 있는 죽에 무를 넣어 쌀이 퍼질 때까지 마저 끓인다.

어려울 것도 없는 레시피였음에도, 갈비찜이니 묵은지 닭볶음탕이니 온갖 한식을 해대던 꽤나 칭찬을 받아온 실력임에도, 내가 만든 동치미죽은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는 무척 심심한 맛이었다. 왜 엄마의 시원한 동치미를 뜨끈하게 느낄 수 있는 그 미묘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몇 번을 끓여도 결과는 마찬가지. 다른 죽들보다 훨씬 맛이 심심하다는 아이들의 평가를 냉철하게 수용하고 그런 이유로 끓이게 된 것이 누룽지였다. 다행히 아이들 모두 엄마 숙취 때문에 끓인 누룽지를 좋아했고 그렇게 누룽지는 아침 식사 대용으로 자리 잡았다.

큰 아들은 어느새 자라 11살이 되었고 아들과 주고받는 대화가 요즘은 제법 만담같이 즐겁다. 어느 날은 아침에 또 누룽지를 내어놓으니, 엄마가 왜 누룽지를 좋아하는 지를 물었다. 엄마는 친구들 만나 한잔 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먹는 누룽지가 너무 맛있어.라고 설명하니 나도 너무 뜨으으으끈 해서 맛있어. 이게 해장이야?라고 하더라. 네가 무슨 해장이야 이 자식아. 그런데 속이 너무 시원하단다. 뜨거운데 시원한 그 맛을 네가 알아?


한 장의 그림처럼 자라주는 아이들



완벽해 보이지 않아도 완벽할 수 있는

그래 아들. 네 말이 맞다. 엄마 나름의 해장이지. 이렇게 잘 아는 아들인데, 나는 너무 혼자 다 지고이고 할머니의 동치미죽처럼 완벽한 해장죽만 생각했네. 동치미죽처럼 완벽할 수 없어서 엄마는 그렇게 슬퍼했네. 엄마는 아무리 애를 써도 동치미죽이 아니라 누룽지 인데 매일 지쳐하는 엄마가 너무 부족한 것만 같아, 고작 해장한다고 만드는 음식 따위가 포장되어 나온 누룽지 끓이는 게 다라서. 그렇게 엄마가 어깨의 짐만 마구마구 올려놨네. 몇 번을 반복해서 걸음을 해도 결국 있어야 할 자리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이고 지지도 못할 짐들을 한꺼번에 다 올리고 다리가 후달릴 때마다 울고 징징거리며 나는 왜 이것도 못해. 엄마인데. 엄마는 어떻게든 버티는 건데. 그렇게 인내하는 건데. 그렇게 자책하며 너랑 나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마주하며 볼 수 있는 웃음을 놓치고 있었네. 너에겐 엄마의 누룽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완벽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완벽한 것을.

오늘 아침도 오랜만에 나온 누룽지에 아들은 후루룹 유난을 떨며 묻는다.

“엄마, 친구 만나 한잔 했나?”

아니다 이 자식아. 엄마 설사해서 끓인 거다. 이 자식아.

그렇게 우리 집 해장음식의 세대교체가 도래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만의 유산이 된다.  

그리고 엄마는 이제 누룽지로 자신있게 매일 아침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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