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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1 : 손목 위 제국의 탄생

Longines hunter case 1925 & trench 1923

by Zait

전쟁은 공간을 점유하기 위한 투쟁이자, 동시에 시간을 지배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특히 수만 명의 병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여야 하는 근대전에서 '시간의 동기화'는 승패를 넘어 생사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인류의 전장이 정글과 사막, 그리고 참호 속으로 확장되면서 시계는 주머니 속의 귀중품에서 손목 위의 생존 도구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885년 버마의 정글: '리스틀릿(Wristlet)'의 등장


손목시계의 기원을 논할 때 흔히 보어 전쟁(1899)을 언급하지만, 역사의 시곗바늘은 그보다 앞선 1885년, 울창한 정글로 뒤덮인 버마(미얀마)와 험준한 인도 북서부 국경 지대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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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군은 3차 버마 전쟁과 1888년 블랙마운틴 원정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탁 트인 유럽의 평원과 달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글과 산악 지대에서 깃발이나 수신호 같은 시각 신호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각 부대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오직 '약속된 시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손엔 고삐를, 다른 한 손엔 무기를 든 기병 장교들에게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일은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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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박함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리스틀릿(Wristlet)'입니다. 이는 시계 자체가 아니라, 회중시계를 담을 수 있는 가죽 컵이 달린 손목 스트랩이었습니다. 부대 내에서 가죽 장구류를 수선하던 장인(Saddler)들에게 의뢰해 만든 이 투박한 가죽 띠는, 시계를 손목에 고정함으로써 장교들의 두 손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시계를 손목에 올리고 조직적으로 전투에 임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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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보어 전쟁: 가죽 컵에서 '러그(Lug)'로의 진화


1899년 발발한 보어 전쟁은 리스틀릿을 넘어 현대적 손목시계의 구조가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거친 환경과 더운 날씨 속에서 시계를 감싸는 두꺼운 가죽 컵은 부피가 크고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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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영국의 시계 제조사 H. 윌리엄슨(H. Williamson Ltd.)의 일화는 중요한 기술적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1933년 인터뷰 기록에 따르면, 보어 전쟁 중 한 장교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싶다"며 12사이즈 회중시계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윌리엄슨의 경영진은 가죽 컵 대신 시계 케이스 위아래에 금속 고리(Loop)를 땜질하여 끈을 끼우는 획기적인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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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디어는 1901년 영국 무역위원회에 디자인(등록번호 383942)으로 공식 등록되었습니다. 이는 시계와 스트랩을 연결하는 '러그(Lug)'라는 개념이 정립된 순간이자, 시계가 '담는 물건'에서 '차는 물건'으로 진화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트렌치 워치(Trench Watch)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만 해도 회중시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1915년 갈리폴리 전투에 참여한 호주군 사진을 보면 리스틀릿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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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손목시계는 선택이 아닌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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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경에는 참호전이라는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개발된 전술, '이동 탄막 사격(Creeping Barrage)'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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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술은 아군 포병이 적의 참호를 향해 포격을 가하면, 보병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 바로 뒤(약 50~100야드 후방)를 따라 전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포격은 사전에 계산된 시간표에 따라 3분마다 100야드(91m)씩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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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이 30초만 늦게 도착해도 적군은 포격이 멈춘 틈을 타 참호 밖으로 나와 기관총을 난사했고, 반대로 30초만 빨리 전진하면 아군의 포탄에 자신이 희생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시계의 정밀도에 수천 명의 목숨이 달려 있었습니다. 시간이 동기화되지 않았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는 영화 <갈리폴리(Gallipoli, 1981)>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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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8월 7일, 갈리폴리 전투. 영국군 포병대는 호주군의 돌격 직전까지 적 참호에 집중 포격을 가해 터키군을 제압할 계획이었습니다. 돌격 예정 시간은 04:30. 그러나 포병대의 포격은 예정보다 7분 이른 04:23에 멈췄습니다.


호주군 장교의 손목시계는 아직 7분이 남았음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영국군 포병 장교의 시계는 이미 04:30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시계의 오차였는지 통신의 실수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전장에는 치명적인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 '침묵의 7분' 동안 흙더미 속에 숨어 있던 오스만 튀르크군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나와 기관총 조준을 마쳤습니다. 기습의 이점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다급해진 호주군 장교는 본부에 전화를 걸어 절규했습니다.


"포격이 너무 일찍 멈췄습니다! 적들이 이미 방어 태세를 갖췄습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입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본부의 목소리는 차가웠습니다.


"자네 시계가 몇 시든 상관없네. 작전상 자네들은 이미 3분 전에 돌격했어야 했어. 당장 공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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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전 4시 30분, 돌격 호루라기가 울렸습니다. 참호 위로 몸을 던진 수백 명의 호주 청년들을 기다린 것은 빗발치는 기관총 세례뿐이었습니다. 고작 몇 분의 시간 차이, 맞춰지지 않은 시계바늘이 수백 명의 운명을 영원히 갈라놓은 순간이었습니다.


이 비극 이후 군대는 시간 동기화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했습니다. 공격 개시 시간을 '제로 아워(Zero Hour)'로 통일하고, 시간을 멈춰서 초 단위까지 맞출 수 있는 '핵 기능(Hacking seconds)'이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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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이 손목시계를 응시하다가 아군의 포격이 멈춤과 동시에 호각을 불면, 병사들이 참호를 박차고 나가는 모습은 1차 대전의 상징적인 풍경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장의 장교들이 찬 이 시계를 일컬어 '트렌치 워치(Trench Watch)'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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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일상으로: 남자의 시계가 되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전장에서 쓰이던 수많은 물품은 일상으로 스며들어 패션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해군의 네이비블루 제복은 블레이저가 되었고, 참호 속의 코트는 트렌치코트가 되었으며, 트렌치 워치는 세련된 슈트에 어울리는 드레스 워치로 변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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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대가 찾아오자 시계들은 다이얼을 밝게 하고 투박한 숫자를 바(Bar) 인덱스로 바꾸었으며, 소재는 스틸에서 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특히 1932년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이 발표한 칼라트라바(Calatrava) Ref.96은 케이스와 러그가 일체화된 유려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현대 손목시계의 원형을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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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까지만 해도 손목시계는 여성들의 장신구로 여겨졌고, 남자가 손목시계를 차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전쟁을 거치며 시계는 생존을 위해 시간을 통제해야 했던 장교들의 상징이 되었고, 이제는 치열한 일상의 전장을 살아가는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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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위의 거대한 제국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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