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곡점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스물세 살의 이른 봄날 아침일 것이다. 그날 그 강의실에서의 나를 평생 잊지 못한다. 아무런 기대 없이 처음으로 불교 강좌에 참석한 그날, 법화경의 사상과 철학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즈음 나는 존재의 고독과 영문 모를 슬픔에 항상 젖어있었다. 가난과 싸우며 학비를 버느라 지쳐있었기에 대학은 눈부신 이상을 꽃피우는 곳이 되어주지 못했고, 삶은 선악의 구분도 없이 무질서하기만 해서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지독하게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이렇게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홀로 묻곤 했다. 내가 살아있음이 세상에 아무런 변화를 남기지 못한다면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날 내게 다가온 것은 눈부시게 찬란히 빛나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었다.나는 한낱 풀잎 위의 이슬이 아니라불성(佛性)을 간직한 인간이었다. 또한 내가 알든 알지 못하든 우주엔 엄연한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면서, 넘치는 기쁨으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과연 내가 그토록 높은 가르침을 내면화할 수 있을지 가슴이 설레었고, 물밀듯 한 환희는 마치 눈앞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기적을 보는 것처럼 나를 뒤덮고 있던 생명의 어둠을 한 순간에 몰아내었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숱하게 마주치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줌마도 노숙자도 술주정뱅이도 회사원도 잡상인도 학생도 어린아이도 갓난아기 까지도 모두 똑같이 생명이라는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나와 같이 볼품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도 우주를 담을 수 있는 크기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들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는데 단지 내 시선이 달라졌던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이 어떤 차림을 하고 있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관계없이 오로지 단 하나, 그가 생명을 가진 인간이기에 충분히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깊고 눈부신 인생의 비밀인가.
기쁘고 기뻐서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법화경을 증명하고 싶다는 비원(秘愿)이 솟아올랐다.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던 내 생명은 구름 위를 나는 듯했다. 법화경의 거울에 비친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넓은 벌판에 선 가을의 느티나무처럼 화려하고 높고 아름다웠다.
어느날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바삐 걷던 출근길, 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직장 후배였다. 오랜만에 나란히 걷는데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해준 말을 생각하면서 지난 일 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상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니 상대를 보며 아파하지 말고 나를 보라던 그 말에 시선이 안으로 향하면서 소리 없는 전쟁터 같았던 가정에 평온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뜸과 같아서 아프고도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이제 막 분별심을 갖게 된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놀랍고도 가슴이 저려왔다. 그녀의 빛나는 눈과 맑은 미소는, 가난이든 몸의 병이든 혹은 인간관계의 불통이든 삶의 숨 막히는 터널을 지나온 사람에게서만 스며나오는 보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거울은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비춘다고 했던가. 때때로 거울이 흐려질 때면 어김없이 사람이 싫어지고 서운한 감정과 분노에 휘둘리곤 한다. 그럴 때면 한 걸음 물러나 거울을 깨끗이 닦고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그를 대할 때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묻고, 이기적인 나와 싸우며 상대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미소 지으며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타인에 대한 존경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서 자신의 경애가 낮으면 아무리 훌륭한 세계가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법화경과 마주한 그날처럼 설렘과 환희를 간직하며 언제나 맑은 거울로 나를 비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