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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레스티얼 m Oct 11. 2023

흙수저의 개척 <1>

남들은 워킹홀리데이 갈 때 나는 선교사업 갔다.


"엄마 나 친구 따라 다른 교회 가면 안돼?"

"안돼."

"왜 안돼?"

"그냥 안돼."


나는 엄마아빠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머리가 좀 크고 알고 보니 내가 다니는 교회 이름을 말하면 이단이란다. 그런데 매주 일요일 왜 그 긴 이름의 교회를 가야 하는지 엄마는 정확히 설명을 해 주지 못했다. 뭐든 논리적으로 생각해 버리게 되는 나에게는 답답한 시간이었다. 일요일만이라도 좀 집에 있고 싶은 데 가기 싫은 교회에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갈 거 아닌가.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더 이상 엄마가 가자는 대로 손잡고 쫄래쫄래 부모님을 쫓아다닐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꼭두새벽부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영어 공부를 하러 가자고 날 깨워 밖에 데려가던 아빠나, 존경할 부분을 찾기 힘들던 엄마가 다니는 "그 교회"에 대한 사춘기의 반항심까지 더해져, 그 둘이 하는 건 안 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따르고 싶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부모님이 지금까지 교회를 계속 다니는 지도 의문이다. 몇십 년을 교회에 다니신 분들이지만, 안타깝게도 가끔 나일론 신자 같은 모습을 보이시니까. 


10대 후반, 일요일은 지옥이었다. 나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 하여 엄마는 몽둥이를 들기도 하고, 막돼먹은 (?) 나는 똑같이 손에 들 수 있는 걸 집어 들고 대치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나는 내가 믿겠다고 결정한 것을 성실한 자세로 대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째 엄마는 반대의 길을 걷는 듯 이젠 교회는 적당히 믿겠다(?)는 눈치다. 이제 엄마는 나를 종교에 푹 빠진 골수분자라고 부를 때도 있다. 복잡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교회 덕에 고향 땅을 떠나 수많은 경험을 하고 삶에 대한 시각이 바뀐 나,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과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온 엄마에겐 분명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한 그런 기틀을 닦아준 것도 엄마인데... 언젠가 내가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수능이 끝나고 간신히 턱걸이로 인서울(?) 대학을 들어갔다는 기쁨도 잠시. 집에서 버스, 지하철, 또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거리를 가야 하는 언덕 위의 학교는 내 흥미를 급속히 사그라들게 했고, 성실이라는 걸 잘 못 배웠던 나는 출석을 거의 안 해서 학사 경고까지 받고 말았다. 게다가 무섭고 엄한 아빠가 없는 시간엔 게임을 하던 습관이 학교 가기 전까지 하려다가 학교는 안 가고 하루 내내 해 버리는 일로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 게임 중독이었다. 라그나로크라는 게임의 아기자기한 캐릭터는 내 우울한 인생의 대체물이었다. 5백만 원에 육박하는 사립 대학의 학비를 그렇게 말아먹자 나는 휴학계를 냈고. 미래가 불투명했다. 실패자였다.


그때 주변에서, 내가 불성실하게 잘 다니지도 않던 교회에서 운영되는 미국 대학교가 있으니 본교가 아니면 분교라도 가라고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한번 준비해 볼까 했지만 입학을 위한 토플 시험공부를 꾸준히 하기엔 내 정신력은 너무 약해져 있었다.


그러던 중 막내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의 통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너 선교사업 가보는 건 어떻니? 한 번 사는 80년 인생에 1년 반 걸려서 다녀오면 큰 경험이 되지 않겠니."

나는 지쳐있었고, 이곳을, 부모님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내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또 이제는 알아볼 시기가 된 것 같았다. 이 교회를 다닐 이유가 무엇인지. 그 당시는 매주 일요일 아침에 3시간이나 할애해야 하는데, 내가 믿을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교회에 내가 믿어야 할 진리가 있다면 확실히 다니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불필요한 시간낭비는 내 인생에서 버리자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선교사업을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도 하지 않았다. 

누가 알았을까. 그 1년 반이 내 앞으로의 인생에 다시없을 황금기가 되었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작점이 되었을 줄. 


한 번도 집 떠나본 적 없이 외동으로 자란 나였다. 아르바이트 몇 가지 했을 뿐 집밥 먹고 세탁기 돌릴 줄도 모르고 살던 나. 그런 스물한 살에 집을 나와 1년 반 동안 선교사업을 하기 위해 선교사를 훈련하는 훈련원으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남과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은 힘들지 않았지만 내가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고 의사소통도 잘 못하는 것은 알게 되었다. 교회에 대해 가르치는 것 (복음을 가르친다고 한다)에 대해서는,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지금까지 교회에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모태 신앙이라서 선교사업을 나온 사람은 나와 다른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6명은 개종자라 열의가 불타올랐던 데다 나이도 내가 제일 어려 위축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모두 나를 조용하고 어리바리하고 수줍음 많은 막냇동생의 이미지로 기억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나는 교회의 기본 가르침들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은 복기하며 몇 주 지났을 즈음, 예전의 선교사로 일했고 선교사 훈련원에서 가르치던 교사가 수업을 하다 말고 말했다.

"근데 여러분들 처음 들어왔을 때랑, 완전히 얼굴빛이 달라진 선교사가 있어요. 너무 밝아져서 다른 사람 같아요."

우리는 그게 누군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맹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 교사는 나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읊었다. 뭔가 더 말을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칭찬의 기쁨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다음엔 무슨 말을 오고 갔는지 이해도 기억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부모님의 손을 떠난 것, 그리고 복음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 분명했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나는 천천히 내 본 모습을 찾아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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