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동으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라지를 않았으니 인간관계를 많이 겪지 못해 사회성이 떨어졌다. 엄한 아버지 덕에 주변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그럼에도 엄마의 칭찬에 내가 아주 똑똑한 줄 알았었다. 숙제나 준비물 기한을 지키는 것을 배우지 못해 지각하기 일쑤였던 초등학교 (그 당시는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그것 때문에 문제가 있던 적이 많았다. 숙제를 제 때 해간 기억이 없는 것이다. 하지 않아서 엎드려뻗쳐한 상태로 맞은 기억은 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들어갔을 때, 첫 중간고사를 며칠 앞두고 한 번 공부를 해보자고 생각했고, 평준화되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정말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없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해 그제야 선생님의 시선을 받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지루하고 미래가 없던 짧은 대학생활을 통한 맛보기로 나는 세상에서 마치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이 뚝 떨어진 막막한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돈은 없고, 학교생활도 잘 못했고, 거기에다 부모님, 특히 아빠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선교사업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휴식 기간이 된 것이다.
선교사업이란 기간은 여러모로 나의 인생을 뒤바꾼 시간이었다.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수도 없이 우리가 더 나은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전하는 메시지가 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고 실수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나 인생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고, 내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치면서, 특히 교회에서 그 중심으로 여기는 것이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전에 만난 적 없는 훌륭한 교회 회원들의 모범은 나도 그런 가족을 꾸려야겠다는 교훈을 주었다. 또 죽음 이후에 예수님처럼 모두가 부활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큰 희망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님일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사랑했으므로, 불완전하더라도 그분들이 죽고 나면 끝이 아니고 내세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큰 위안으로 작용했다.
별 볼일 없는 나여도 태어나 살아가는 목적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 많은 경험을 하고 성장하며, 내 가족을 꾸리고, 아이들을 복음에 따라 예수님의 사랑을 본보기로서 가르치고, 결혼해 가족을 꾸리면 영원히 함께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세상은 알고 보니 살 만한 곳이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선교사업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시간은 나 스스로를 개종시킨 시간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가르치면서 배우는 사람보다 더 많이 깨우치게 되므로 그제야 나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더 자주 생각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약속을 만들고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던 하루는 길 때가 수도 없었는데, 1년 반이란 시간은 너무 짧아 눈 깜짝할 새 훌쩍 지나갔다. 나는 수많은 기억과 친구들을 만들고, 중간에 그만두거나 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꽉 채웠다는 자신감에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왔다.
나는 이제 1년 반을 부모님 없이 살아남은 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에서 운영하는 미국에 있는 대학교의 어학원에 지원서를 넣었다. 많은 20대 초반의 교회 회원 학생들이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며 토플 준비를 하다가 점수가 나오면 대학교에 지원하고 합격해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고 했다. 실감은 잘 나지 않았지만 나는 몇 달 후면 정말로 미국에 가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선교사업으로 장기간 집까지 떠나 있던 내가,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가장이 시키면 따라야 할 꼬맹이었었나 보다. 다음은 조금 우울한 내용이므로 스킵해도 된다. 요약하자면 출국을 아빠와 크게 다퉈버린 것이었다. 나에게는 한국에 학을 떼게 된 사건이라 적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보게 될 것이므로 수정할지 모르겠다. 단지 지금은 아직 내 안에서 상처가 되는 사건이라 적는다.
선교사업을 다녀와 나는 일반인으로 돌아왔다. 딱히 하는 일은 없었고 종종 짧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했다. 곧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싱숭생숭한 시간이었다. 그때쯤 아빠는 골목골목 다니며 엄마가 운영하고 계시던 작은 학원 광고 전단지를 붙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말했는데, 아빠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화를 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따라와." 그런데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빠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아파트 상가 건물 복도에서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맞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그 큰 팔을 움켜쥐었다. 50대의 아빠는 정말 힘이 셌고, 어린 시절에 나는 그 주먹으로 예상치 못하게 머리, 얼굴이나 다른 곳을 맞기도 했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1년 반동안 나는 타인과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태도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다면 내게 아이에게 시키듯 무언가를 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아빠는 쉼 없이 계속해서 주먹을 들어 나를 때리려고 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막고, 잠깐 도망쳤다가 다시 분에 못 이겨 달려든 아빠를 다시 떼어내려다 안경이 휘어지고, 구두의 장식이 떨어져 나갔으며, 머리와 온몸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사이 눈치채고 나온 엄마는 막으려 했지만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아빠의 흥분을 가라앉히진 못했다. 엄마가 잠시 아빠를 막은 틈을 타 나는 몇 층을 뛰어내려 가 다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러 쫓아오는 아빠를 피해 1층의 상가 경비실로 뛰어들어 경찰을 부르라고 소리쳤다. 경비실에서 나를 끌어내려고 아빠가 코트를 잡아당겨 단추와 지퍼가 떨어져 나갔다.
눈물과 흥분으로 잠시 시간이 지나자 경찰이 왔고, 나는 길바닥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 좀 잡아가라고. 나를 죽이려 한다고.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었을듯한 경찰은 그저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타이를 뿐이었는데, 그 순간의 나에게는 절대 보내서는 안 될 유일한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엄마가 울면서 나한테 일단 어디 가 있으라고 해서 나는 당분간 친구 집에 묵게 되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며칠이나 머물게 해 준 친구 G에게는 지금도 참 고맙다.
그렇게 한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좁은 집에서 아빠와 서로 투명인간 대하듯 말도 하지 않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지났다.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엄마는 나를 안방으로 불렀고 거기엔 아빠가 앉아있었다. 엄마가 시켜서 하는 느낌이 다분했으나 전에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사과를 아빠가 본인도 익숙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했을 때, 그 말들은 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공항에 마중 나온 엄마와는 최소한의 말만 했고, 아빠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말을 전혀 섞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가방을 밀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뒤를 돌아 게이트로 향했고 엄마 아빠를 돌아보지 않았다. 미움과 온갖 복잡한 감정이 섞여 눈물로 흐려진 눈을 닦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안녕. 지긋지긋한 한국.
정을 떼려던 것이었는지 뭔지,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으므로 나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는 정말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뒤를 돌아보면 그렇게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선택까지도 기적과 축복에 가까웠다. 외동으로 자라 심지어 20대 초반에 집에서 5시간 거리인 선교 지역도 가본 적이 없던 내가, 선교사업의 기회와 유학이 없었다면 집을 뒤로한 채 떠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이 일을 뒤돌아 보고, 나는 알게 되었다. 부모 자식 관계에는 서로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나은 관계도 있구나라는 것을. 사람은 변하는데 아주 오래 걸린다. 관계에서 한쪽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면, 그 다른 쪽과는 거리를 조금 둘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흙수저란 부모가 자녀에게 지속적으로, 정신적, 물질적,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에야 그 단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도움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 최대한 모든 면에서 독립해 스스로의 삶을 살면, 흙수저가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내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걸 전부 한 번에 할 수는 없다. 경제적인 것은 차근차근 해결해야 하며, 요청하지 않은 참견을 흘려보내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도록 잘 생활해 나가고, 때로는 나의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다 알리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다. 나의 경우 바다 건너 땅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바로 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