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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레스티얼 m Oct 11. 2023

유학기<1> 가난한 외동아이. 해외에서 홀로 살아남다.

일하고 공부하면서 장학금으로 미국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 충당하기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어학원의 사진. 딱 저 모습이다.




자가 소유의 집 한 채 없던 부모님을 둔 내가 정말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많은 도움과 기적이 있었다. 첫째로 교회에서 알게 된 유학원을 하시는 형제님의 학생 비자 지원 팁들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통장 잔고 증명 - 지금 생각해 보면 2천만 원이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액수였는데 내 수준에서는 너무나 어마어마했던 유학비용이 통장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야 했고, 친척이 증명을 해 주었다 (보여주고 스폰서라는 확인이 있으면 된다.) 실제 어학원 등록금은 두 학기를 엄마가 부담했다. 도합 5백만원정도였는데 한국 대학교 한학기 비용이었다. 그리고 심장이 쿵쾅거린 기억의, 다행히 한 번에 오케이가 떨어진 미국 대사관 비자 인터뷰 등이었다.




나는 처음 해 본 국제 여행에서 길을 잃지 않고 솔트레이크에 잘 도착했다. 공항에는 이모가 와 있었다. 이모는 늦은 어학연수와 유학을 온 남편을 따라 몇 년 전부터 내가 공부할 곳에 있었고 다행히 타이밍이 맞아 일주일 동안 내 기본적인 미국 정착에 필요한 아파트 구하기, 은행 계좌열기 등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이모 가족도 교회 대학인 B의 다른 분교가 있는 하와이로 떠났다. 그렇게 정말 혼자가 되었다.


정말 스스로 일상생활을 책임지게 되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나는 한국에서 학사 경고를 두 번 받고 휴학을 한번 했으므로,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경험 20대 중반이었다. 새 땅에서 다시 실패할 수는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어학원 수업은 기본 영어 외에는 내게 학점도 인정되지 않는 시간과 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어학원이 한 학기에 한화로 2백만 원이었는데 대학교 등록금도 똑같이 교회 회원들에게 2백만 원 언저리였다. 빨리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또한  어학원 두 번째 학기부터는 학교에서 국제 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 수 있다. 그래서 한 학기만에 토플 성적을 내보자고 마음먹었다.


어학원을 처음 적응할 동안은 사람들과 인사하고 정보도 얻으며 지냈다. 자연스럽게 비슷한 시기에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 한국인들을 알게 되었다. 어디서든 한국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뭉친다. 유학의 고충을 토로할 기회도 된다. 그러다 점심을 같이 먹게 되고, 저녁에 다 같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나는 미국에 와서까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삶에 회의를 느끼며, 시험공부를 위해서도 모든 한국인과의 활동을 그만두었다. 문자도 전화도 웬만해선 하지 않았고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택했다.


대학 신청 서류의 요구사항은 사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토플 시험 점수가 관건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족집게같이 문제풀이를 알려주는 한국의 토플학원이 이런 어학원보다는 효율성으로 따지면 더 낫겠단 생각도 한 적이 있다. 다만 나에게는 홀로 삶을 꾸려내고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일단 마음을 먹은 후는 목표날짜를 잡기 위해 아예 시험등록을 해놓자고 생각했다. 유학생에게는 피 같은 등록비 200불 (약 20만 원)을 두 번 내고, 첫 시험을 보고 내 상태를 파악했다. 무엇을 집중할지 가늠하고 등록한 두 번째 시험까지 남은 날짜는 3개월. 그 사이 점수를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어렸을 적, 아빠는 본인이 자라오며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새벽부터 싫다는 나를 강제로 깨워 영어책을 읽혔었다. 그 덕으로, 내 영어는 다른 과목과는 달리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수능 1-2등급이었다. 이유도 듣지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공부해야 했으므로 하기 싫어서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딴생각을 했었는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 영어의, 아빠의 스파르타식 교육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었다.


어학원을 다니며 하루 중 토플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의 목표를 세웠다. 4시쯤 수업이 끝나면 남아 매일 저녁 8시 반정도까지, 너무 길지 않게 공부할 마음을 먹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에 오후 9시 즈음 집으로 향해도 아직 해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서 어학원에 가서, 수업 사이사이나 점심시간에 밥 먹으며 숙제를 해치웠다. 수업이 다 끝나면 다 떠난 텅 빈 건물에 퍼지는 청소기 소리를 들으며 빈 강의실에 혼자 들어가 안락하게 느끼며 토플 공부를 했다. 밤 6시쯤이 되면 점심에 반 먹고 남은 도시락을 마저 먹고, 리딩 지문을 풀었다. 그 지문에서 모르는 단어를 뽑아 수첩에 단어장을 만들고, 아침과 저녁에 집에서 걸어오고 걸어가는 시간에 틈틈이 외웠다.


그사이 아르바이트로 건물을 청소하던 금발의 학생이 내가 공부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며 내가 공부하는 교실에 들어와 내 번호를 물은 일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서로 쉽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을 이 경험으로 배웠다. 내겐 첫 번째였고 몇 번 식사를 같이 하거나 놀러 갔지만 내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고 마음에 완전히 드는 사람도 아니어 곧 거절했다 (단호박).


3개월 후. 나는 원하던 시험 점수를 손에 쥐었다. 내가 공부 목표를 잡고 달성한 소중한 초기 경험 중 하나였다. 남은 것은 지원하는 일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것은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마치 벼랑 끝에 몰린듯한 마음가짐 있었기 때문이라 본다. 이후 5년 동안 나는 한국에 가지 않았고, 비행기삯이 큰 이유도 있었지만 가고 싶은 마음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가봐야 나는 부모님에게 종속된 자녀일 뿐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내가 독립적인 성향이 너무 컸고, 그런 면에서 부모님과 한국 사회에 부딪힌 면이 많았던 것 같다. 집을 떠나, 누구도 나에게 뭐라 압력을 줄 수 없는 환경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 최적이었던 것이다.




어학원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 어학원은 대학의 일부로서 바로 옆에 대학 본교가 있어 국제 학생이어도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건물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청소 등 다양한 일이 있는데, 음식 코너에서 간단한 음식 준비 하는 일을 최저 시급을 받고 일하게 되었다. 그 최저 시급조차도 한국에서 하던 아르바이트의 두 배였기 때문에 생활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시급은 7불이 조금 넘었는데 현재는 시간당 만원이라고 들었다. 한 주에 20시간을 일할 수 있으니 한 달이면 거의 100만원 근처의 수입을 공부하면서 버는 것이다. 이 때쯤부터 아파트, 식료품 등의 생활비를 내가 알아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경제적인 부분이 많이 커버되고, 어학원 수업이 끝날때마다 거대한 대학 도서관의 컴퓨터를 사용해 차근차근 대학 지원서를 준비해 마감날 전에 지원을 할 수 있었다. 이 교회의 대학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대학이 세개가 있는데 한 개는 유타 주의 중심부에 있고, 분교가 아이다호와 하와이에 있다. 그리고 거의 연결된 학교라 볼수있는 2년제 단과대학이 솔트레이크에 있다. 


비행기 삯을 못 치를 것 같아 지원하지 않은 하와이를 빼고 모든 학교에 원서를 넣고 대학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녔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만약 다녔다면 미국 대학 지원 시스템상 한국 성적을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학사경고를 받은 그 F와 C 일색의 성적 말이다. 핸드폰을 붙들고 그 순간 많은 생각이 지나갔지만 나는 홀린 듯 대답하여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성적이 있다고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그 종이를 정말로 접수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차피 본교에서 한국으로 연락해 검사하는 것도 아니므로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 생각에 잠을 뒤척인 적도 몇번 있었고, 그걸 왜 시인하고 접수했냐고 가족으로부터 한소리 들었었던 같다. 그러나 나는 정직함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던 그 상황의 유혹에 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 전체 인생에서 봤을 때는 뒤돌아볼때 부끄러운 점이 없게 되었으니까. 


결국 나는 본교 지원에서 떨어졌지만 분교에 조건부로 붙었다. 입학 허가에는 요약하자면 "붙여주겠지만 지켜볼테니 앞으로 잘해라."라는 첨부 내용이 있었다. 결국 어학원 두 학기 만에 원하던 시기에 미국 대학수업을 시작했다. 사실 분교는 난이도가 조금 쉬운 편이었는데, 영어로 수업을 처음 시작하며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첫 학기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면 누구나 다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눈치코치로 수업을 받고 시험을 본다. 난이도에서 말했듯 아무리 어려워도 분교였던데다가 시험 자체가 한국 대학보다 더 쉬운듯했다. 아니 그냥 영어가 한국어보다 단순한 것 같다. 시험 범위를 알려준대로 공부를 하니 올 A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주변 한국인들은 보통 다 올 A를 받았다. 대학 첫 수학 수업이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포자인 나도 처음 단어 공부만 힘들었지 실제 학기 말에는 시험을 어려움 없이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 학교였기 때문에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잘 신경 써 주셨다.


내 영어는 학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학생들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어서 많은 유학생들이 그렇듯 토론수업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지만, 막상 성적 결과가 나오고 보니 한국 교육시스템에서 쌓은 문제 풀이 스킬이 빛을 발했다. 알고 보니 수업시간엔 토론 잘하고 질문 많은 미국 학생도 시험 때는 나보다 낮은 성적이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이 시기 나는 선교사업을 다녀온 사람에게 주는 반액 장학금부터 시작해 성적만 좋다면 장학금을 신청도 할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성적 3.9 이상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내 성적은 거의 4.0만 점의 4.0이었다. 매 수업에서의 작은 성공이 내게 크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어느새 나는 공부 잘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탈바꿈 되어있었다. 나는 어학원에서 하던 대로 수업 끝나고 학교에 남아 공부했고, 도서관이 문 닫는 밤 11시까지 남아있다가 학교의 3분 거리인 내 자취방으로 돌아와 잤다. 그리고 새벽 네시 반부터 청소를 하고 아침 수업으로 돌아갔다. 나의 노력뿐만 아니라, 정말 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교수님들의 배려와 도움, 룸메이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우울했던 20대 초반이 무색하게 내 삶은 한국에서와 180도 달랐다. 집세가 빠듯하긴 했지만, 아르바이트로 생활비, 식비를 충당하면서 대학 등록금을 내지 않고 거의 2년 가까이 무료로 다닐 수 있었기에 이런 대학 시스템을 만들어 준 교회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대학에 적응이 되어갈 때쯤 나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자라오며 과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친척의 권유로 미국에 정착을 잘할 수 있는 간호학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다. 그 전공을 하려면 심지어 대학 지원 때보다 더 높은 토플 점수를 따야 했는데, 지원에 필요한 내 필수 과목 성적은 높았지만 학교를 다니며 시험 본 토플 점수가 약간 부족했다. 유학하며 알게 된 미국 시스템은 사정사정하면 봐주기도 하고 융통성이 끼어들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부분에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내가 지원하던 그 시기의 바로 전, 어떤 한국 학생이 부족한 토플점수에도 본인의 힘든 상황을 호소해 이 전공에 합격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이 나쁜 성적을 받고 말았고, 이러한 이유로 간호학 입학 사정관은 더 이상 그런 융통성은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완벽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몇 번 없는 지원에 떨어져 망연자실했다.


다음 지원시기를 기다릴지 포기할지,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런 경우 내 종교에서는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즉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할 수있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이때쯤엔 새벽 4시 30분에 청소를 하여 생활비를 벌었고, 젊었을 적 본인이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했다는 교수님께 잘 보여서 어찌어찌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학생들 질문을 이해 못 해 식은땀을 흘리는 일도 많았지만... 그런데 이렇게 학교를 다니는 와중 이상하게도 예전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전공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지금이 아니면 이건 공부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미국 정착도, 직장도, 수입도 너무나 불확실한 전공. 부모님에게 기대할 수 없으므로 내 삶을 혼자 꾸려나가려면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 전공.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그 전공을 목표로 해서 지금 다니는 대학교가 아닌 본교로 편입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가 떠올랐다. 너무 강한 느낌이었다. 결국 미국 대학 생활 정확히 2년 후 나는 편입을 통해서 내가 지원에서 탈락했던 그 대학 캠퍼스를 밟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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