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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r 15. 2018

고결함 아래의 텅 빈 곳을 향해,
팬텀 스레드

'쓰러지기 전에 키스나 해줘'

런던 사교계의 드레스를 짓는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는 우아한 영국 신사로, 놀라우리만치 엄격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직 드레스만을 위해 사는 남자다. 모델과 드레스로 가득한 저택에서 '늙은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 분)과 함께 지내는 그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며 자나 깨나 일에 몰두한다. '죽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편안해져'라며 단골 식당에서 엄마를 회상하는 그의 말은 어딘가 공허하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시골의 저택으로 내려간 그는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는 알마(비키 크리엡스 분)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런데 노변가의 인터뷰로 영화를 시작하며 매조지하는 알마의 한 마디 역시 심상치 않다. '레이놀즈는 내 꿈을 이뤄줬어요. 대신 난 그가 열망하는(desire) 것을 줬죠.'. 


< 팬텀 스레드 >의 '사랑'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원초적인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별 볼일 없는 레스토랑 직원이었던 알마의 삶은 레이놀즈를 만나고 나서부터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보잘것없는 몸매 위에 장인의 솜씨로 지어진 드레스가 입혀지는 순간, 알마는 그의 수많은 뮤즈 중에서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민하고 우아한 레이놀즈의 삶도 알마를 만나고 나서부터 요동치기 시작한다. 먹는 것만 먹고 다니는 곳만 다니며 오직 일에만 몰두하는 이 폐쇄형 천재는 '게임'이라 칭해지는 저택에서 엄격한 규율과 기묘한 세계를 구축했다. 알마는 극도로 예민한 이 남자의 생활을 서서히 긁어놓기 시작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깊어 보이지 않는 일상 속의 행동을 통해 누구나 품고 있는 지독한 결핍을 탐구해왔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신봉하는 것은 그래서 절대적인 힘으로 상징된다. 누이들에게 시달리는 고독남 아담 샌들러는 < 펀치 드렁크 러브 >에서 사랑을 믿고,  < 데어 윌 비 블러드 >의 다니엘은 오직 기름과 돈을 위해 영혼마저도 팔아버린다. 그 모든 가치가 실종된 청춘들은 < 마스터 >의 호아킨 피닉스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처럼 방황했다. 


레이놀즈와 알마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한다. 레이놀즈는 죽은 엄마를 잊지 못하고 알마는 삶을 바꿔놓은 그를 온전히 갖길 원한다. 그러나 둘의 권력관계는 결국 재력을 갖춘 남자가 승리하는 고전적인 흐름으로 흐르지 않는다. 레이놀즈가 자신의 삶을 강요하면 알마는 그의 강한 척을 꿰뚫어 보고 나약한 심리를 자극한다. 규칙적이고 흐트러짐 없는 레이놀즈를 묶어두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는 알마는 대놓고 '난 당신이 나약하고, 연약해졌으면 좋겠어.'라 속삭인다. 환각 속의 레이놀즈는 알마와 겹쳐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본다. 레이놀즈의 세계는 망가지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이 피어난다. 


고고하고 냉랭한 '유령의 흐름(Phantom Thread)'은 망자의 빈자리를 허무하게 남겨둔 레이놀즈의 처절한 몸짓이었다. 그 나약함을 파고드는 알마는 때로는 잔혹하게, 그러나 고결하게 그의 모든 것이 되고자 한다. 레이놀즈는 알마의 허영을 채우고, 알마는 레이놀즈가 열망하는 내면 속의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레이놀즈의 말에 따르면 '언제나 이유 없이 그립고' '일생 최대의 실수'이자 '이것 없이는 살아갈 자신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감정의 빈칸, 사랑이다.


< 팬텀 스레드 >는 감독의 전작이 그러했듯 또 한 번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용납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자신을 이성적이라 착각하는 숱한 사람들을 닮았다. 마음속 비어있는 각자의 열망을 채우기 위해선 그들은 기꺼이 독버섯으로 된 요리를 천천히 자르고, 입 안으로 가져가 그 맛을 음미하며 곧이어 닥쳐올 끔찍한 고통마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말하겠지. '쓰러지기 전에 키스나 해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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