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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y 15. 2018

트립 투 스페인, 꽃중년 만담 투어

영국을 위한, 중년을 위한, 영화 팬들을 위한, 그런 이야기들. 


중년 남자 둘이서 떠나는 유럽 여행이 뭐 특별할 게 있겠나. 그러나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의 트립(The Trip)은 사뭇 다르다. ‘걸어 다니는 대중문화 백과사전’이라 불러도 무방할 두 남자들은 빼어난 광경과 군침 도는 식도락 사이사이를 쉴 새 없는 유머와 패러디, 성대모사로 채워 넣는다. 셰익스피어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던 북부 영국 여행, 시인 조지 바이런과 퍼시 셸리를 기억하던 이탈리아 여행에 이어 그들이 떠나는 곳은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이다.   


본래 < 더 트립 > 시리즈는 2010년부터 영국 BBC에서 방송되는 단편 코미디 여행 시리즈다. < 트립 투 스페인 >역시 지난해 4월 6일부터 5월 11일까지 5부작으로 전파를 탔다. 이국으로의 여행기를 주제로 하지만 실제 영화의 초점은 그 여정을 즐기는 두 남자,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의 만담에 집중된다. 아름다운 풍경과 유명 레스토랑의 별미는 여느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에서도 볼 수 있는 수준. 그러나 그 사이사이 빈틈을 채우는 두 절친들의 대화엔 입이 떡 벌어진다.    



요리를 기다리면서, 리조트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웃고 수다를 떨며, 유명인들을 모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영국인들에겐 거의 종교와 같은 007의 장면을 코믹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옮겨오고, 말론 브란도가 되었다가 데이비드 보위와의 ‘트위터 친분’을 과시하며, 고전 영화와 문학 속 한 장면을 옮겨오는 그들의 대화는 이 ‘트립’이 대리만족이나 여행지 소개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걸 들려준다.   


주인공들은 가명을 쓰지 않는다. 배우이자 작가인 스티브 쿠건과 배우 겸 레스토랑 리뷰를 겸하는 롭 브라이든은 현실 속 모습 그대로 작품에 임한다. 그러다 보니 < 트립 투 스페인 >에선 전 시리즈와 달리 세월의 무상함이 많이 다가온다. ‘50대야말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며 긴 연설을 늘어놓고, 관광지에서도 아침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스무 살 아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스티브 쿠건은 할아버지를 앞두고 있고, 롭 브라이든은 이미 두 자녀의 아버지다. 벌만큼 벌었고 자국에선 나름 유명하지만 중년의 씁쓸함은 성대모사나 슬랩스틱으로 다 메꿔지지 않는다. ‘아재’들의 만담 여행기가 뭔지 모르게 애잔하다.



아름다운 관광지 스페인의 풍경을 기대했다면 미스. 그러나 이국적인 광경 속 오랜 친구와 함께 항상 늘어놓는 긴 설명과 취미, 인생 이야기를 듣는 건 그리 지루한 시간이 아니다.  그 주인공들이 입담으로는 대적할 자가 없는 친구들이기에 더더욱. 몸은 빌딩 숲 대한민국에 있지만 마음만은 낭만적인 유럽을 꿈꾼다면 자연스러울 러닝타임이다. 본인이 나 같은 ‘영화 덕후’라면 더 재밌을 것.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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