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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y 21. 2018

'될 대로 되라지', < 버닝 >

20대 친구들, 안타깝지만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렇답니다. 


문제작 <버닝>을 드디어 봤다. 배우들의 삽질 때문에 끌리진 않았지만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였다. 처음 보고는 멍했고, 제대로 보려고 했을 때도 멍했다. 그러나 <버닝>은 익히 알려진 여러 주장과는 사뭇 다른 시선을 갖고 있다.  


감독이 의도한 바대로 영화는 혼돈스럽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초반 해미의 팬터마임이 모든 걸 설명한다. 실존하지 않는 것도 진심을 담으면 사실처럼 느껴진다지 않나. 그리고 영화 종반부 텅 빈 해미의 방에서 종수는 그제야 노트북을 펼치고 어떤 글을 쓰기 시작한다. 2시간 30분의 멍한 경험이 어쩌면 종수의 소설 속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사실이든 소설이든 영화는 그 속을 살아가는 20대의 비참한 군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몸으로 때우는 게 편하’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해미나, 글은 쓰고 싶은데 풍비박산 나버린 가정사 때문에 파주 끝 동네서 하나 남은 송아지를 키우는 종수나 모두 마찬가지. 그런데 <버닝>이 특별한 건 이런 현실을 관찰하는 종수의 흐리멍덩한 눈에 있다.  



종수는 뿌연 안개가 자욱한 파주의 시골 풍경 같은 사람이다. 행동은 굼뜨고 반응도 느리며 과거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지진아이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캐릭터는 또 아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찌질한 욕정도 있으며 나름의 애정도, 억한 감정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좀처럼 드러내질 않는다. 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버닝>은 그래서 더더욱 흐릿해진다. 


좀 더 생각해보면 그 모호한 관찰법이 앞서 언급했던 현시대 20대들의 불안한 삶으로부터 도출되었단 걸 발견할 수 있다. 취업 앞에, 경제 앞에, 모호한 꿈 앞에, 도움 없는 가족 앞의 우리는 어딘가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지’ 않는다. 그저 다가오는 대로 ‘살아낼’ 뿐이다. 그 와중에도 해미는 아프리카로 낭만을 찾아 떠나지만 종수는 해미의 빈 방에서 자위나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돈이 많은’ 벤은 반대다. 그는 딱히 하는 일 없이도 부유하고, 뭔가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삶을 산다. 너저분한 종수와 해미의 방과 반대로 벤의 집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재미다. ‘뼛속에서 느껴지는 베이스’를 느끼기 위해 벤은 스스럼없이 가해자를 자청한다. 


벤은 20대가 아니지만 그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은 철없는 20대에 머물러있다. 재미를 위해 ‘비닐하우스 몇 채 태우는’ 걸 하늘의 뜻, 자연재해 정도로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인간이다. 순진한 낭만을 유혹해 욕망을 채우는 벤의 모습에서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많은 가해자들이 보여왔던 어떤 군상을 포착할 수 있다. 나는 그럴 뜻이 아니었는데, 나는 재미로 한 건데,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뭐가 잘못이야.  



<버닝>은 사회 속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명확히 대비하는 동시에 관찰자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돈 많은 가해자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다. 고된 생활에 시달리는 피해자는 낭만적이지만 핀잔만 들으며, 가족조차도 그 행방을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관찰자는 해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어린 시절 추억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뒤늦게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해미에 대해 알게 되는 시점은 이미 해미가 사라져 연락조차 되지 않는 때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여혐’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해미는 피해자지만 그를 담아내는 감독의 시선은 혐오나 도구, 수단의 영역에 있지 않다. 영화는 가게 개업 행사 아르바이트를 뛰지만 긍정적이고 낭만을 꿈꾸며 아프리카로 떠나는 청춘의 모습을 괴롭히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 순수한 인물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비뚤어진 시선을 저격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프리카 대평원의 저녁노을 감동을 전하는 해미의 말에 벤은 ‘나는 눈물 흘리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라 말하고, 종수는 가만히 말만 듣다 벤의 소설 얘기에만 응답을 한다. 자유로이 리듬에 따라 맨몸으로 춤추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해미에게 그를 사랑한다는 종수가 하는 말은 ‘창녀들이나 옷을 그렇게 벗는 거야’다. 해미가 사라진 후 그와 똑 닮은 새 여자와 함께 등장하는 벤에게 여자는 그저 흥미의 대상, ‘불타기만을 기다리는 비닐하우스’ 일뿐이다. 뭔가 익숙한 편견들이다. 



이창동의 영화엔 항상 선 굵은 하나의 주제 의식이 있었다. 섬세한 죄의식의 < 박하사탕 >과 구원을 고민하는 < 밀양 >, 예술의 영역에서 속죄를 구했던 < 시 > 등등. 그러나 < 버닝 >에는 그런 담론이 없다. 흐릿하고 부자연스러운 종수의 몸짓처럼, 점잖은 추악함의 벤처럼, 자유를 갈구하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해미처럼, 영화는 20대의 무기력한 혼란을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다. 


마치 '20대 친구들, 안타깝지만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렇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듯. 친절하게 감독은 일련의 해결책도 넌지시 제시한다. 그 모든 불편함과 비판을 한 데 다 모아서 활활 태워버리든, 혹은 조용히 방 안에서 '하루에 한 번 잠깐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작가를 꿈꾸든. 뭐, 뭐든지. 될 대로 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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