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집대성, 가족의 의미를 묻다.
<어느 가족>으로 희석된 <만비키(万引き : 도둑질) 가족>은 도둑질로 구성되고 도둑질로 유지된다. 고령의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분)는 외도한 전 남편의 재혼 가정을 찾아가 ‘체면 비용’ 명목의 돈을 받고, 그 집안의 큰 딸 아키(마츠오카 마유)와 함께 살고 있다. 도망자 신세의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와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는 하츠에 앞으로 나오는 연금에 빌붙어 살고, 집안의 두 아이 쇼타(죠 카이리 분)와 유리(사사키 미유 분) 역시 친자가 아니다. 이 집안의 가장 큰 수익원은 오사무와 쇼타의 좀도둑질이다.
도쿄 외곽의 허름하고 좁은 집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시바타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들을 총망라하면서도 그 구성은 사뭇 다르다. 포스터 속 환하게 웃음 짓는 이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화목한 대가족으로, <아무도 모른다>와 <태풍이 지나가고>, <걸어도 걸어도> 속 방임과 실종, 요절이 야기하는 트라우마는 언뜻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바타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도태되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구성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개개 씬에선 비참하지만 ‘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정에선 더없이 화목하게 그려진다. 도둑질, 막노동, 유사 성행위로 생계를 유지하고 ‘귀가’한 이들은 저녁상에 둘러앉아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아무도 그들이 낮에 어떤 일을 했는지 묻지 않는다. 중요한 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이고, 정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현실의 안정’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가족이라 불릴 수 있다.
어린 소녀 유리는 시바타 가정의 존재 이유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도쿄의 어느 가정에서 학대당하며 매번 베란다로 내몰리는 유리를 오사무가 데려오고, 노부요는 아이를 돌려놓으려다 부부싸움 소리를 듣고는 아이를 키우겠다 다짐한다. (도둑질해서 얻은) 새 옷을 입히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오빠 쇼타와 함께 동네를 뛰어노는 유리를 보며 노부요는 ‘유괴일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행복하면 그만 아닌가’라 말한다. 그리고 유리로 인해 그저 모여 살던 공동체가 가족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고레에다는 따스한 시선으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 사이사이에 비수처럼 시린 장면을 심어놓기로 유명하다. <어느 가족>의 가장 낭만적이고 행복해야 할 씬에서 가족의 다정함을 느끼려는 찰나 그는 냉정한 질문을 던지며 딜레마를 파고든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쇼타와 유리에게 아빠 엄마로 불리길 원하지만 사실 그 아이들은 유괴된 누군가의 아들 딸들이다. 쇼타는 오사무를 아빠라 쉽게 부르지 못하고, 노부요는 유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동료 직원 탓에 세탁소에서 해고된다. ‘학교는 집에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 말하는 오사무가 쇼타에게 가르친 건 도둑질이 전부다.
좁은 세계에의 행복은 자그마한 균열에 곧바로 무너진다. 해변에서의 행복한 추억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하츠에에게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사망 사실을 숨기고 그녀 이름으로 나오는 노인 연금을 대리 수령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한 쇼타가 도둑질 과정에서 체포되자 가족은 ‘아들’을 두고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각자도생의 논리 앞에 불꽃놀이와 해변가에서의 추억은 곧바로 해체되고, 그들은 다시금 사회로부터 내몰린 개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의 해체 이후를 담아내는 종반부가 그래서 더욱 잔인하다. 좋은 부모이자 누나, 할머니였던 이들은 사실 우리들의 상식선에선 이미 실격된 인간 군상들이다. 비참했던 과거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경찰에 취조당하는 장면을 1인칭 시점으로 담아내는 구성은 ‘가족’이라 불리고 싶었던 공동체를 완전한 개인으로 해체하는 과정이다. 온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리가 다시금 폭력에 노출되는 장면은 끔찍함의 정점이다. 모두가 순식간에, 홀로 남겨지고 만다.
<어느 가족>의 비참하면서도 깊은 울림은 그 개인들을 함부로 재단하려 하지 않음과 동시에 가정으로의 애정과 개인의 실책을 엄격히 구분하는 데서 온다. 비록 도망치려 했지만 오사무에겐 아버지의 애정이 있고, 개인적 트라우마로 유리를 키운 노부요의 사랑은 가식 아닌 진심이다. 고레에다는 사회로부터 내몰린 개인들의 잘못된 선택에 엄중히 책임을 물으면서도 이들의 독특한 유대감을 변호한다. 혈연으로 맺어져야만 가족인가?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가?
<어느 가족>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낭만보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씁쓸함과 가깝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인정받을 수도 없는 시바타 가족은 현실에서 등장하기 힘든 어떤 이상향에 가깝지만, 소외된 그들이 보여주는 끈끈한 연대는 현대 사회 속 점차 희미해지는 가족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도둑 가족이라도 분명 ‘가족’이었으니까. 여름날 찬란했던 해변가의 추억, 소리만 들었음에도 행복했던 불꽃놀이 날의 추억은 분명 아름다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