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미장센과 오마주만으로 뚫을 수 없는 각색 시나리오의 한계
<인랑>은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프로덕션 I.G(Production I.G)’과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1999년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1960년대 반정부 대학 투쟁으로 몸살을 앓던 일본 사회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1960년대 말 성난 군중들이 조직화하여 반정부 테러 조직 ‘섹트’가 형성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창설된 ‘특기대’와 기존 조직 ‘공안부’ 간의 권력 다툼 속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를 동화 ‘빨간 두건’의 디스토피아 적 버전으로 풀어냈다.
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 감독이 김지운이라는 건 원작의 진중한 메시지보단 그가 재현할 늑대인간 미래 병정의 비주얼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어떤 장르를 맡든 정교한 미장센을 자랑하는 김지운의 눈에 2차 대전 나치 독일 스타일 갑옷과 MG42 기관총으로 무장한 특기대 소속 정예 부대는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리라. 실제로 영화 시작과 동시에 원작 포스터를 그대로 재현하는 강동원의 모습은 원작 팬이라면 가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선사한다.
이런 감독의 재능은 기괴한 <장화,홍련>으로부터 만주 웨스턴과 인디아나 존스를 적절히 일제 강점기로 옮겨놓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를 재림시킨 <인류멸망보고서> 2편 <천상의 피조물>을 통해 익히 증명되어왔다. 독특한 비주얼과 캐릭터, 김지운은 진중한 분위기의 세기말 일본 SF 시리즈를 실사화하는 이 프로젝트에 어렵지 않게 지목할 수 있는 적임자다.
순식간에 이목을 사로잡는 오프닝부터 시작해 이어지는 광화문 시위 속 섹트의 테러,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천천히 하수도로 진입하는 특기대 인랑 부대들의 모습은 애니메이션 팬들이 기대했던 현실을 근사하게 스크린으로 옮겨낸다. 특히 어둠 속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야수의 눈빛처럼 형형히 빛을 내며 묵직한 걸음으로 무자비한 총탄 세례를 퍼붓는 인랑의 존재감은 영화 내 짧은 등장 시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공언만 놓고 보면 <인랑>은 제법 성공적이다. 그러나 영화의 문제는 ‘오마주와 각색’ 중 오마주의 비중이 더 높다는 데서 출발한다. 수도경 내 공안부와 특기대, 반정부 테러 조직 섹트의 존재는 오프닝의 제법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이 세 조직뿐 아니라 경찰청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 꽤 많은 단체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특기대 내부의 비밀 첩보 조직 ‘인랑’까지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이 조직들이 무리한 경제정책으로 혼돈에 빠진 치안을 통제하며 군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한 중앙 정부의 조직 편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반면 남북 정상이 통일을 결의한 상황에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경제 제재로 인해 통일 반대 세력이 혼돈을 일으키는 실사의 배경은 모든 단체의 존립을 애매하게 만든다. 섹트와 모종의 거래를 하면서까지 특기대를 해체하려 하는 공안부의 목적도 빗나갔고, 과잉 진압에도 통일이라는 과업을 위해 전체주의 / 파시스트적 구성을 묵인받는 특기대의 존재도 애매하다. 심지어 이 모든 알력 다툼이 복잡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인간의 탈을 쓴 늑대’로 조직의 신위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임중경의 고뇌가 제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광화문 진압 작전에서 사살 직전 자폭했던 ‘빨간 두건단’의 소녀는 원작에선 후세(임중경)에게 인간으로의 양심과 조직의 수족 사이 갈등을 터트리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인랑>의 소녀는 이은혜의 동생으로 임중경과 이은혜를 이어주는 역할에 그친다. 이중 삼중의 덫으로 은밀히 임무를 수행하는 이은혜와 임중경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 역시 치밀한 미장센에 비해 허술하게 그려진다.
<인랑>이 인용하는 ‘빨간 두건’ 동화는 인랑 임중경과 섹트 가족을 둔 이은혜의 처지를 비유하는 핵심 메타포다. 폭탄을 운반하면서 딸기 우유 한 팩을 받는 섹트의 소년 소녀들, 국가 기관에서 충성을 다하나 개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임중경, 권력 다툼에 휘말려 이용당하기만 하는 이은혜의 존재는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빨간 두건들이다. 이런 주제 의식도 미묘하게 각색된 결말이 끼어들며 흐릿해지니, 결국 영화는 지하도에서 공안부 요원들과 인랑 간 처절한 학살극만으로만 기억되고 만다.
김지운은 <인랑>에서 늑대만을 보았다. 그가 현실로 데려온 늑대들은 애니메이션의 위압감 그 이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왜 인간이 늑대로 살아야 하는지, 왜 늑대가 늑대를 거부하게 되는지, 왜 거대한 늑대들이 왜 빨간 두건을 속이는지는 흐릿하게 잊혀간다. 미장센과 고증으로만 뚫고 나가겠다는 다짐이 헐거운 시나리오에 막히고 팬심과 오마주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