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의 차트 정복, 대중음악의 지형을 뒤흔들다.
9월 21일 <빌보드> 지는 신인 팝 솔로 가수 엠넥(MNEK)의 데뷔 앨범 <Language>를 ‘올해의 가장 야심 찬 앨범 중 하나’로 호평함과 동시에 ‘그러나 왜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까?’라는 부제를 달았다. 마돈나와 비욘세부터 두아 리파와 방탄소년단까지 팝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온 숨겨진 고수의 데뷔 앨범이지만 주요 차트 진입은 요원하고 미디어의 주목도 거의 없는 수준이다. 비단 엠넥 뿐 아니라 트로이 시반, 두아 리파, 리나 사와야마 등 인상적인 댄스 팝 앨범을 발매한 신예들 역시 미국 차트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사는 엠넥의 동성애 성적 지향과 흑인의 인종적 요소를 대중의 미미한 관심의 첫째 요소로 꼽았지만 본질은 그다음 제시된 이유가 더욱 정확하다.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댄스 팝 음악을 찾아볼 수 없다. 힙합, 특히 트랩 장르의 힙합이 차트를 지배하고 있다.’. 말 그대로다. 오늘날의 대중음악 중심은 힙합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권력 이동은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2018년은 그 정점의 해다.
올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아티스트 중 비 힙합 아티스트는 단 세 명 - 에드 시런, 카밀라 카베요, 마룬 파이브뿐이다. 현시대 최고의 슈퍼스타 드레이크는 ‘God’s plan’과 ‘Nice for what’, ‘In my feelings’로 올해 차트를 ‘드레이크와 나머지’로 만들어버렸고, 그 ‘나머지’들 역시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와 포스트 말론(Post Malone), ‘Bodak yellow’의 카디 비(Cardi B)의 힙합 아티스트들이다. 오랜 2위 끝 차트 1위에 오른 마룬 파이브의 ‘Girls like you’ 역시 카디 비의 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
정상을 호위하는 톱 텐 차트는 더욱 확실한 지표를 보여준다. 아리아나 그란데,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루노 마스 등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도 겨우 한 두 곡을 진입시킨 톱 텐 차트를 트랩 시대의 팝 스타 트래비스 스캇, 미고스, 카디 비는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릴 펌, 릴 베이비, 식스나인 같은 어린 랩퍼들도 어렵지 않게 톱 텐 히트곡을 보유할 수 있다. 이제는 팝을 힙합이라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트랩은 1990년대 말부터 미국 남부 조지아주를 중심으로 성장한 힙합 장르다. TR-808 드럼 머신의 상대적으로 느린 비트 위에 신디사이저 리프를 깔고, 찰랑거리는 하이햇을 더하여 거리의 삶과 가난, 자기 증명을 독특한 플로우로 읊어가는 장르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중후반까지 티아이(T.I)와 구찌 메인(Gucci Mane), 릴 웨인과 퓨처(Future) 같은 아티스트들이 활약하며 본격적으로 메인 차트에 트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장르가 주류의 문법을 넘보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초중반 음악 시장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LP와 CD같은 전통의 녹음 매체가 사장되고 스포티파이(Spotify)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언제 어디서든 듣고 싶은 음악을 클릭해서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태어난 젊은 음악 팬들은 앨범을 사고 아티스트의 열렬한 팬이 되는 대신, 애플리케이션이 추천해주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유튜브 뮤직비디오를 보며 뮤지션들의 SNS에 하트를 누르는 식으로 음악을 소비한다. 2003년 디지털 음원 차트를 집계하기 시작한 빌보드가 2014년 스트리밍 건수를 차트에 반영하면서 이들의 취향이 주류를 넘보기 시작한다.
트랩 음악의 주류 정복은 2017년 애틀랜타 출신 3인조 힙합 그룹 미고스(Migos)의 ‘Bad and boujee’가 싱글 차트 1위를 점령하면서부터 가속화됐다. 그전에도 패티 왑의 ‘Trap Queen’, 드레이크의 ‘One dance’,‘No flex zone’의 형제 래 스레머드(Rae Sremmurd)가 ‘Black beatles’로 정상을 차지한 적은 있었지만, 그 곡들은 멜로디가 존재하는 싱잉 랩 스타일이었다. 미고스의 성공은 랩으로 꽉 찬 5분짜리 트랩 비트도 ‘Raindrop, drop top’ 같은 파괴적인 후렴과 함께라면 폭넓은 대중성을 보유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비슷한 멜로디와 주제 의식의 곡들을 모아놓은 정규 앨범은 그 자체로 훌륭한 플레이리스트의 역할을 했다.
미고스 멤버 오프셋(Offset)과 약혼한 카디 비의 대성공은 물 오른 팝 감각에 고진감래의 스타 서사시를 부여하며 체제 전복을 더욱 공고히 했다. 성공을 위해 스트리퍼로의 삶까지 감내한 카디의 독한 플로우는 일천한 경력의 그를 단숨에 슈퍼스타로 만들었으며, 오랫동안 여성 랩퍼 씬에서 독주하던 니키 미나즈조차 갖지 못한 차트 1위 곡을 손쉽게 획득했다.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선보인 브루노 마스와의 'Finesse' 리믹스 무대로 견고한 실력을 뽐내며 그 성취가 운이 아님을 또 한 번 증명하기도 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새 시대를 선언하는 젊은 재능들 역시 앞다투어 전면에 등장했다. 음원 게시 / 공유 서비스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에 조악한 결과물을 올리던 십 대 랩퍼들은 중얼거리는 듯한 멈블(Mumble) 스타일과 파괴적인 외모로 SNS 세대의 폭발적인 인기를 획득했다. 극히 단순한 ‘Gucci gang’ 반복으로 스타가 된 릴 펌(Lil pump)과 광기 어린 랩의 릴 우지 버트(Lil Uzi Vert), 좀체 알아듣기 힘든 릴 야티(Lil Yachty)의 노래가 톱 텐 히트곡에 오른다. 힙합 씬에서 드레이크나 미고스가 브루노 마스, 테일러 스위프트같은 메이저 스타라면 ‘릴 군단’들은 트로이 시반으로 치환된다.
대중의 기호와 장르 매력을 절충해왔던 드레이크는 상상 이상의 엄청난 위치에 올랐다. 언뜻 밋밋하게 들리는 ‘God’s plan’, ‘In my feelings’는 개성 강한 현 차트에서 역으로 부드럽고 섬세하기에 독특하다. 본래 팝 감각이 있던 아티스트인지라 모두가 편하게 듣기 좋은 곡을 쓰고, ‘Hotline bling’과 같은 엔터테이너적 기질로 ‘In my feelings’ SNS 대유행을 이끎은 물론 ‘God’s plan’과 ‘Nice for what’처럼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기도 한다. 실력 발휘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2015년 퓨처와 함께한 ‘Jumpman’처럼 근사한 트랩 싱글을 만드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정규 앨범 <Scorpion>이 초창기만 못한 퀄리티로도 슈퍼스타에 등극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트랩 음악의 새로움이 스트리밍 세대의 수요를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팝의 차트 열세와 직접 연관되진 않는다. 스트리밍 사이트는 서비스일 뿐 콘텐츠를 선택하는 것은 대중이다. 엠넥, 트로이 시반, 찰리 푸스같은 젊은 팝 아티스트들의 성적 부진은 오랜 시간 대중음악과 동일시되었던 댄스 팝의 작법이 젊은 음악 팬에게 고루하게 여겨지는 탓이 크다.
매력적인 솔로 가수들과 맥스 마틴 같은 거물급 프로듀서의 조합으로 매끈한 전자음을 섞어내는 전략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엔싱크부터 최근의 저스틴 비버, 케이티 페리로 공고히 이어졌고, 블랙 뮤직 진영에서는 브루노 마스로 대표되는 짙은 알앤비나 흥겨운 펑크(Funk) 디스코의 변용이 널리 사랑받았다. 1980년대 MTV 개국 이래로 자리 잡은 이 팝스타들의 공식은 자잘한 수정은 있을지언정 기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음악도 젊은 세대의 입장에선 옛것이 됐다. 당장 새로운 제드, 체인스모커스, 알란 워커, 칼빈 해리스 같은 스타 DJ들의 ‘소프트 EDM’은 기성 작곡가들을 급속히 대체하고 있다.
고민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의 젊은 팝 아티스트들은 복고로 눈을 돌린다. 그중에서도 전자 음악이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에 파고들던 1980년대다. 펫 샵 보이즈, 티어스 포 피어스 같은 신스 팝 그룹들과 마돈나, 신디 로퍼,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를 오마주한다. 두아 리파, 트로이 시반, 빌보드가 주목한 엠넥의 음악은 엄연히 따지면 과거의 유산을 빌려 재활용 혹은 각주를 다는 과정이라 해도 무관하다. 혁신이라 해도 뉴 오더와 디페시 모드의 그늘을 떨치기 쉽지 않다.
이들의 작품 경향이 LGBTQ로의 정체성, 소수와 연대, 개인의 성숙 등 특정 주제 의식을 강조하며 수려한 외관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도 비슷한 음악 스타일에 차별을 두기 위함이다. 냉정히 말해 이제 댄스 팝 시장에서 웰메이드는 등장하더라도 시대를 대변할 혁신의 무언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그들은 당당한 정체성으로 소수의 결집을 유도하고 화려한 퍼포먼스의 투어를 통해 개별 팬덤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테일러 스위프트,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급의 아티스트들은 이미 공고한 지지층을 갖추고 있기에 차트 성적은 보장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지난 싱글 ‘Ready for it’과 ‘End game’은 트랩 스타일이었고 저스틴 비버의 최근 히트작은 DJ 칼리드와 함께한 ‘No brainer’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새 정규 앨범 <Sweetner>에 <롤링 스톤>이 내린 평은 ‘트랩이 새 시대 팝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였다.
2018년의 팝은 힙합이 되었고 고전적 의미의 팝은 보다 아티스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신예 팝 스타들이 매끈한 완성도의 앨범, 싱글을 발매해도 이전과 같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메시지는 21세 기지만 형식은 1980년대에 완성된 기성의 문법으로 흥미를 끌기 쉽지 않다. 취향 개척 대신 추천 목록을 선택하는 21세기 음악 팬들은 과거처럼 음악을 찾아 듣지 않는다. 개성을 위한 강한 정체성은 주류보다 소수에 가깝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쿨하고 따라 하기 좋은 노래, SNS 놀이에 잘 어울리는 신나는 노래, 플레이리스트 형식으로 고민 없이 틀 수 있는 노래 모음, 그것이 현시대의 트랩 뮤직과 굉장한 시너지를 내는 중이다.
물론 주류 차트에는 힙합 말고도 다양한 장르들이 공존한다. 전통의 컨트리 곡은 언제나 일정 인기를 보장하고 저명한 팝스타들과 어느 정도 팬덤을 확보한 아티스트들의 곡 역시 메인 차트에서 힘을 발휘한다. 스트리밍의 수혜는 올해 ‘Mine’으로 바찌(Bazzi)와 같은 팝 신인에게 서광을 비추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핵심의 문법이 재편되어 조금씩 규격화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랜 상식을 뒤집어 이해할 때가 왔다. 우리가 알던 팝은 포퓰러(Popular)와 동의어가 아닌, 힙합에게 상업적 성취의 자리를 내주고 장르화 되어가는 중이다. 현시대의 차트-프렌들리 뮤직은 힙합, 그중에서도 트랩이다.